△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라퓨타 아사가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이름과 디자인을 따왔다.
다양한 컨셉의 묘를 살린 도쿄의 시네마테크
도쿄 변두리라고들 하지만 신주쿠에서 전철로 딱 10분 걸렸을 뿐이다. 아사가야역에서 5분이나 걸었을까, 조용한 주택가 한가운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가 툭 나타났다. 만화 속 공간을 현실로 옮겨온 ‘라퓨타 아사가야’의 입구는 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처럼 꾸며졌다. 일본 고전영화의 흑백 포스터를 붙여놓은 게시판도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나마 비바람에 탈색돼 초현실적 느낌까지 준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 마당에선 예쁜 연못이 손님을 맞는다. ‘주인장’ 사이타니 료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중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 같다. 맘 좋게 생긴 그 아저씨는 ‘나는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다 알지’ 하는 듯한 엷은 미소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공간이 주는 친밀한 매력과 그곳을 운영하는, 넉넉한 여유의 사람들이라는 두 가지 인상이 출발점부터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는 도쿄의 짧은 여정 내내 단 한번도 끊기지 않았다.
“유산은 지키고 전통은 잇는다!” 라퓨타 아사가야
아니나 다를까 주인장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렬한 팬이자 친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그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만화 월간지 <코믹 박스>를 20년 넘게 발행해왔다. 언젠가, 무슨 사연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대만 사람이 출판사 옆에 있던 자기 아파트를 사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급매물이어서 값이 적당했고 일단 사긴 샀으나 후속 투자의 여력이 없어 땅을 놀려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때맞춰 출판했던 <원령공주 독해>가 히트를 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 제작과정을 독점적이다시피 담았던 책이다. 그때 번 돈으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본떠 ‘라퓨타 아사가야’를 만들 수 있었다. 1998년, 128석과 50석의 극장 두개와 레스토랑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주요 상영작은 흑백의 일본 고전영화들과 젊은 작가들의 애니메이션. 일본 고전영화을 특화한 건 젊었을 적 즐겨 찾던 명화극장, 나미키극장 등이 사라지면서 옛 흑백필름을 볼 수 있는 곳도 사라져간다는 안타까움에서 나왔다. 4대 메이저의 협조로 필름을 공급받아 옛 영화를 상영하다보니 스즈키 세이준, 오카모토 기야치, 구로키 가즈오, 오카다 마리코 등 나이 지긋한 감독, 배우들이 단골처럼 들르는 곳이 됐다. “내가 명화극장을 이용할 때의 영화 환경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비디오조차 없던 시절이니까. 지금은 DVD 등 갖가지 매체로 손쉽게 고전영화를 구해볼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일본영화의 유산을 스크린으로 보여줄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장은 ‘유산 지키기’를 사명처럼 여겼다. “내가 71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오시마 나기사를 싫어했고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유산을 지키고 알린다는 차원에서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도 상영해왔다.”
△ 친근감을 물씬 풍기는 이 시네마테크 건물의 ‘주인장’ 사이타니 료 역시 미아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본 듯한 인상이다. 수십년 동안 만화잡지를 발행해온 사이타니 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자 친구였다.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도 대단하다. 젊은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 잔치를 벌여주는 ‘라퓨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올해로 5회째다. 공간과 사람이 주는 향기에 이은 세 번째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사명감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특징일 터인데 도쿄 시네마테크와 미니시어터들이 작품 생산을 독려하고 지원하는 실질적인 기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친구들이 페스티벌에 출품하도록 많은 작품을 만들게 제작사와 직접 교섭하기도 한다. 몇편의 애니메이션 배급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뜻밖에도 러시아의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영화 제작에 인연이 닿은 것도 한우물을 파다보니 생겨난 가지치기다.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대가 유리 노르슈테인 특별전을 할 때 소쿠로프를 만났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서” 레닌과 스탈린의 교차하는 운명을 다룬 <토러스> 등 2편을 제작하는 데 힘을 보탰다.
도쿄에서 선택한 다섯 방문지의 공통적인 특징. 그들은 한결같이 ‘자력갱생파’다. “정부 지원? 그런 거 없다. 극장 운영으론 턱없이 적자다. 출판사 경영으로 손실을 메워나간다. 재정문제로 문을 닫는 극장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영화를 덜 사랑해서 그런 거다.”
시네마테크의 표본, 아테네 프랑세즈
△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모델로 만든 아테네 프랑세즈의 극장 규모는 다른 시네마테크에 비해 무척 컸으나 오랜 역사를 입증하듯 꽤 낡았다. 극장 안의 빈 공간을 활용해 우편물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영사실의 반쪽을 프로그래머 등의 사무실로 활용하는 알뜰함을 보여준다.
라퓨타 아사가야가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으나 이곳은 도쿄를 대표하는 시네마테크가 아니다. ‘녹차물’이란 뜻의 오차노미즈 지역에 있는 ‘아테네 프랑세즈’야말로 표본이다. 1913년 세워진 외국어학교를 기반으로 1970년 프랑스어 교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모델로 아테네 프랑세즈를 만들었다. 초기에 유럽 고전영화들을 단골 레퍼토리로 삼은 것이나 극장 수입만으로 운영이 안 되니 다른 방편을 찾아야 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종의 ‘공식’이다. 일본에서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면 1순위로 떠올리는 곳이 이곳일 만큼 어학원은 유명하고 그 수입이 시네마테크의 기본 자산이 됐다. 그렇지만 파리를 모델로 한 이곳은 곧 ‘일본화’됐고 ‘자력갱생파’가 됐으며 감독들을 양성하는 학교까지 건설했다. 케케묵은 창고 같은 영사실 한켠을 사무실로 쓰는 프로그램 디렉터 마사미치 마쓰모토는 검정 양복에 검은 안경을 끼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그 요점들을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방송사 자막작업(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한국어 자막 기술 지원도 했다), 영화제 운영 관여 등 외부 기획일로 수익을 올리는데 기업들이 주최하는 미술전시회 기획도 자주 수주해 시네마테크의 운영 경비를 마련해왔다. ‘일본화’의 의미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다양한 영화들을 오리지널 포맷으로 보여주며 영화의 근본 뿌리를 되새기는” 기능은 기본이지만, 일본 안에서 실험적인 영화들과 새로운 작가들을 발견하는 작업에 더 주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고전적인 시네마테크 기능은 국립필름센터, 후쿠오카 중앙도서관, 가와사키 시민뮤지엄 등 3곳이 더 적절하게 하고 있다. 이곳은 고전영화와 실험영화를 동시에 수용한다.” 예컨대, 아테네 프랑세즈는 97년 도쿄의 대표적인 미니시어터 ‘유로 스페이스’와 공동 프로젝트로 ‘영화미학교’를 세웠다. 신인감독을 발굴·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 프랑세즈에서 고전영화를 보고, 유로 스페이스에서 유럽영화를 보며 성장한 스와 노부히로,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만다 구니토시 등의 감독들로 교수진을 꾸렸다. 이 학교에서 매년 700∼800편의 영화를 만들고 우수작은 상업 시스템 안에서 재평가받는 체제를 가꿔놓았다. 조금 더 놀라운 사실, 기득권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이들은 자신이 세운 학교를 비영리단체로 독립시켰다.
또 아테네 프랑세즈는 70년대부터 독립영화를 발굴·소개해왔다. 일본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작가 오가와 신스케의 배급권을 갖고 있는 것도 일찌감치 그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프랑세즈, 나고야 시네마테크, 삿포로 시어터 등을 운영하고 있는 수많은 시네필들의 고민은 좀더 넓고 깊어서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배급·상영을 좀더 전국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길 원했다. 한해 제작되는 300여편의 장편영화들조차 도쿄에서 상영되는 게 90% 안팎이라면 지방은 20%에 불과한 현실이다. 96년부터 고민이 시작됐고, 올해 6월 ‘커뮤니티시네마재팬’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킬 수 있었다. 전국의 영화제 프로그래머, 시네마테크, 미니시어터, 박물관, 도서관 등이 연합한 영화상영 네트워크다. 박물관과 도서관을 포함해 지방자치단체에서 놀고 있는 영사시설을 이용해 대안적인 배급·상영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커뮤니티시네마재팬이 어떤 일을 해낼지 아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