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깜짝 공개! 촬영장 습격사건 [2] -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2004-10-2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오계옥
<달콤한 인생> 인천 연안부두 촬영현장

넘버 투의 핏빛 운명이 시작됐다

감독·각본 김지운
출연 이병헌, 황정민, 김영철, 신민아, 오달수
개봉예정 2005년 설

평일 새벽이면 수북이 쌓인 생선을 놓고 소리없는 경매전쟁이 치러지는 수협 공판장. 넓디넓은 그곳이 텅 비자 음습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연일 밤샘 촬영에 몰두해 있는 제작진들의 심각한 표정이 누아르영화를 닮았다. 김지운 감독은 그 어느 영화보다 힘들다고 ‘고백’했다.

여름 한철 같은 가을이 지루하게 이어지더니 급작스레 ‘한파주의보’가 내린 10월2일, 인천 연안부두의 밤은 두터운 방한복이 아니면 버티기 힘든 지경이다. 평일 새벽이면 수북이 쌓인 생선들을 놓고 소리없는 경매 전쟁이 치러지는 수협 공판장이 오래도록 버려진 창고처럼 텅 비어 있다. 그 풍경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어 추위를 더한다. 그런데 한 모퉁이에 이병헌이 와이셔츠 차림에 피투성이가 되어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 앞에서 현실이나 스크린 속이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던 황정민이 날카롭게 긋고 간 입가의 칼자국을 실룩이며 차갑게 내뱉는다. “지저분하게 시간 끌지 말고 치워버려.” 말이 떨어지자 은근히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킬러가 사시미 같은 ‘연장’이 잔뜩 든 양동이와 커다란 고무 대야를 이병헌의 코앞에 들이댄다. 킬러가 칼을 들어올려 이병헌의 배에 대고 뭔가를 가늠하더니 대야를 잘 받치려고 발로 툭툭 차 위치를 맞춘다. 순식간에 인간 횟감이 돼버린 이병헌이 긴장을 참지 못하고 토사물을 쏟아낸다.

물론 이 토사물은 진짜가 아니다. 그렇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상황의 센 강도를 보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 어디쯤이 떠오르는데 나직이 “액션!”을 외치는 이는 김지운 감독이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으로 덧쓰게 된 코미디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떠올리지 않더라도, 섬뜩한 호러 <장화, 홍련>에서 세련되고 섬세한 스타일을 ‘과시’했던 최근의 그를 기억하면 의아한 현장이다. 액션누아르 <달콤한 인생>은 촬영의 70∼80%를 야밤에만 찍는 올빼미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고 액션신 하나를 찍는 데 일주일 정도를 잡아놓을 정도로 ‘세게’ 가고 있다. 게다가 기관총까지 등장하는 총격신까지 예정돼 있다는 말을 듣고 나면 호기심은 더욱 증폭된다. 에스프레소와 더불어 긴 담소를 즐기는 김지운과 피 철철 흐르는 누아르라니. “누아르를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담긴 어두운 세계관도 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게 사람들의 표정에 있다는 것과도 상관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누아르는 어떤 순간에 가장 고조된, 충만된 표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다.” 이건 <장화, 홍련>이 “서사와 내러티브가 아니라 주제에 해당하는 낱낱의 인상들이 초래하는 비극으로 영화를 전개시키려 했다”는 <씨네21>과의 예전 인터뷰와도 맥을 같이하는 말이다. 이번 누아르에서 그 표정은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에 담긴다.

‘지루촬영에 조루액션.’ <달콤한 인생>의 액션 컨셉이다. 대롱대롱 매달린 이병헌에게 뭉둥이 찜질을 하는 장면은 이번 영화에선 액션 축에도 들지 못하겠지만 가격하는 각도와 높이, 피를 토해내는 순간 등 손발을 맞춰야 할 것들이 만만치 않다.

어떤 장르건 인물의 인상과 표정에 집중하는 감독의 키워드를 수행하는 건 배우 이병헌이다. 이유진 프로듀서는 농반진반 <달콤한 인생>이 “이병헌을 위한, 이병헌에 의한, 이병헌의 영화”라고 말한다. 본인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병헌을 위한’ 사이에 빠진 말이 있는 것 같다. 이병헌을 죽이기 위한. (웃음)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보니까 그랬겠지만 영화의 95%에 내가 나온다. 지금까지 10편을 찍었지만 이 영화가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과묵한 의리와 빈틈없는 일처리로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경영을 책임지기까지 7년을 보낸 선우(이병헌)가 사소해 보였던 하나의 선택으로 조직 전체를 상대로 거대한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새벽 6시가 넘자 날이 훤해지면서 이날 촬영분을 끝내느라 감독과 스탭의 발걸음이 더욱 분주해진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모양으로 창고 안에는 비둘기가 날아들고, 창밖에선 갈매기가 끼억끼억대더니 급기야 강아지까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이 진지한 촬영장을 기묘한 표정으로 방해한다. 은근슬쩍 유머가 스쳐지나갈 영화의 단면 같은 풍경으로 이날 촬영은 마무리되어갔다.

전날 밤 9시께 시작된 촬영이 다음날 아침 7시쯤 끝났다. 이병헌은 그 사이 단 한순간도 팽팽한 눈빛을 흩뜨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홑겹의 옷을 입고도 추운 티 한번 내지 않는다. 그리고 꼼꼼한 김지운 감독보다 더 뚫어져라 모니터를 지켜보던 그는 이건 이러니 더 찍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이따금 내밀며 감독을 ‘쪼았다’.

김지운 감독 인터뷰

“누아르의 매력은 운명적 순간에 나오는 인간의 표정이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누아르라고 했었는데 굉장히 멀리 돌아온 셈이 아닌가.

=장르로서의 누아르라기보다는 누아르적 분위기를 좋아한다. 누아르를 보면서 느꼈던 감흥들, 어두운 세계랄지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는 인간의 어두운 열정이랄지, 이런 캐릭터와 설정을 좋아했던 것 같다. 코미디를 하든 호러를 하든 내 영화의 군상이 그랬던 것 같고.

-누아르 하면 떠올리는 장르의 관습이 있는데 이 작품은 어떻게 다른가.

=기존 장르와 다른 것을 하려고 한다기보다 장르의 클리셰를 가져와서 내가 하려고 하는 것과 어떻게 맞춰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영화는 생물학적인 변화무쌍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런 것들이 계속 꿈틀꿈틀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과물을 봐야지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과 어느 정도 일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감독 특유의 여성적 섬세함이 누아르의 남성 세계와 어떻게 어울릴지, 어떻게 드러날지 궁금하다.

=나도 궁금하다. (웃음) 사실, 내가 가진 감수성이 이런 누아르 장르를 했을 때 어떻게 삐져나올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하는 거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와 흥분, 감동을 번갈아 겪으면서 가고 있다.

-누아르 장르를 빌려와 말하고자 하는 테마는.

=어떤 무엇에 사로잡힌 한 남자가 겪는 삶의 피곤함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사랑에 빠지면 생기는 사랑의 판타지와 행복 못지않게 삶의 피로를 느끼게 된다고 생각되는데 그 와중에 허둥대고 우왕좌왕하는 한 인물의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자력에 운명적으로 끌려가는 이야기. 어떤 인물의 한순간에 나오는 불가해한 표정이 있는데 그걸 잡아보고 싶어서 누아르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액션누아르라고 부르던데 액션이 얼마나 들어가고, 어떤 종류의 액션을 염두에 두고 있나.

=액션이 길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굉장히 순간적이고 스펙터클하다. 우리는 지루촬영에 조루액션이라고 한다. (웃음) 촬영은 너무 힘든데 (장면이) 너무 빨리 끝나서.

-본격적인 액션 촬영은 이제부터인가.

=아주 큰 액션 두개가 남아 있다. 짧고 깨끗하고 간결한, 군더더기 없는 액션을 하고 싶다. 사무라이 영화에는 다찌마와 리 영화와는 달리 어떤 순간의 희열, 쾌감이 느껴지는 게 있는데 그걸 다찌마와 리에 옮겨보고 싶다.

-<장화, 홍련>에선 미술, 세트, 조명 등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번에는.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게 누아르영화의 속성인 것 같다. 찰나적 순간에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선 일상적인 친숙한 공간 안에 누아르적 공간이 있다는 것을,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배경이 화려한 호텔인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다. 실제로 호텔의 로비와 직원용 통로는 굉장히 다르다. 친숙한 공간에서 한발만 나가도 어두운 이미지로 빠질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로 보여주고 싶다.

시커먼 남자배우들의 행진

카리스마, 우리도 만만치 않아요
황정민
김영철
이기영
김해곤
오달수
김뢰하

“이거 <실미도> 못지않네요. 히유∼.” 대표부터 마케팅팀 막내까지 유난히 여성이 많은 영화사 봄에서 <달콤한 인생>은 남자배우들이 점령한 ‘떼남자 영화’로 인식될 법하다. 주인공 선우 역의 이병헌을 시작으로 김영철, 황정민, 김뢰하, 이기영, 오달수, 김해곤 등 선굵고 개성 강한 남자배우들이 저마다 한 자락씩 꿰차고 있다. 중견배우 김영철은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 법”이라며 룰을 어긴 자는 가차없이 처단해야 조직이 영위된다고 믿는 냉혹한 보수 강 사장 역을 맡아 심상치 않은 눈빛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순둥이’로 소문난 황정민의 변신은 극적이다. 헤어와 의상 스타일은 물론이고 스카페이스까지 새 단장을 했는데 여기에 그의 잔혹한 사이코 짓이 더해 소름끼치는 웃음을 던져줄 예정이다. 황정민을 보스로 모시는 킬러 오무성은 이기영이 맡았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에서 김지운 감독과 짧은 인연을 맺었던 그가 이번에는 ‘임자’를 만났다. 뿔테 안경에 모자를 푹 눌러쓴 외모가 단정해 보이는데 실은 이병헌의 단단한 근육과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버리는 무서운 살인기계다. <살인의 추억> 하면 단순과격하지만 우직했던 형사 김뢰하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이병헌과 나란히 강 사장을 모시는 조직의 넘버3이지만 잘 나가는 경쟁자 때문에 자리보전이 자꾸 위태롭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이병헌 아니 또 다른 넘버3를 뭉개버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유의 야비한 행동력을 맘껏 발휘한다. <올드보이>에서 생이빨을 뽑히며 험악한 상황에서 이상한 유머 솜씨를 발휘했던 오달수는 이번에도 그 장기를 발휘한다. 총기 밀매업자 명구로 분한 그가 러시아 양아치의 통역 ‘따까리’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구와 한패인 태웅은 걸걸한 목청으로 낯익은 김해곤이 맡았다. 그는 <달콤한 인생>의 반전(?)에 돗자리를 깔아주는, 짧지만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병헌에게 치명타를 날리는 비밀병기를 비롯해 이보다 더 많은 시커먼 남자들이 줄지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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