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레시브 인라인에 청춘을 싣고
감독 정재은 출연 김강우, 천정명, 이천희, 조이진 개봉예정 2005년 2월
우리는 황량한 인천부두를 가로지르던 다섯 소녀의 매력적인 행보를 기억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 어떤 매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스무살 무렵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낸, 인상적인 데뷔작이었다. 데뷔작 이후 3년. 정재은 감독은 두 번째 영화로 거친 스포츠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20대 남자아이들의 질주를 그릴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고, 그것은 그 또래 남자아이들의 싱싱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기대해도 좋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지난 8월 말 촬영을 시작한 <태풍태양> 현장에 대한 호기심은 짙은 녹음,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돌진하는 젊은 그들의 열기로 가득한 공기를 호흡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탁 트인 야외에서 시원하게 펼쳐질 스펙터클을 기대하며 찾아간 촬영장소, 서울 강남 대청공원 내부 파출소 안에 얌전히 방치된 스케이트들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주인공들을 발견한 것은 솔직히, 다소 맥이 풀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양이를 부탁해>가 지닌 미덕에는 다섯명의 소녀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던 내러티브와 두명 이상의 인물들 사이의 교감과 엇갈림을 예민하게 포착한 연출력도 포함된다는 사실. 10월2일, 다소 정적인 분위기의 파출소 현장은 그러한 정재은 감독의 강점에 온전히 의지한 채 진행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 소요(천정명)가 유일하게 의욕적으로 매진하는 것은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 이는 도심 속의 난간이나, 각종 기구 위에서 묘기를 선보이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일종을 말한다. 어느 날 그는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는 모기(김강우)의 모습에 매료되고, 소요는 모기와 갑바(이천희), 한주(조이진) 등이 속한 어그레시브 인라인 모임에 합류한다. 그 속에서 소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에 매진하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는다. 이날은 파출소에 붙잡힌 일당을 모기, 갑바, 한주가 찾아오는 장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즐기지 못하도록 공원쪽이 설치한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익근무요원들과 일행 사이에 승강이가 생긴 것으로, 영화 속에서는 그 승강이의 충격적인(?)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그간 보여줬던 반듯한 이미지와는 달리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김강우, 대사도 액션도 없는 촬영분량이지만 끝까지 현장을 지키던 천정명, 엄청난 경쟁의 오디션 끝에 <태풍태양>에 합류했으며 최근 <늑대의 유혹>에서 강렬한 인상을 선보였던 모델 출신 이천희, 연기를 처음 시작한 신인답게 구김살 없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던 조이진 등 <태풍태양>의 배우들은 저마다 다양한 출신과 연기경력을 자랑한다. 정재은 감독은 그런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거나, 의견을 묻는다. 지시한 것을 배우가 불편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대화 끝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에 골몰했다. 때로 배우들에게 지금의 전체적인 문제를 알려주면, 이들이 스스로 의논하는 과정을 거쳐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민감한 두 주체, 감독과 배우들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저마다의 왕성한 혈기와 열정을 발산하는 일군의 젊은 배우들을 통제하고 연출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 속 인물들을 너무나 닮아 있었던 배우들,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100% 혹은 그 이상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감독이 함께 만들어간 현장의 결과물은 내년 2월에 확인할 수 있다.
정재은 감독 인터뷰
“쉬는 시간에는 축구를 하지 않나, 애들이 힘이 넘쳐나요”-전작은 다섯명의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아홉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등장한다. 연출하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장단점이 있다. 일단은 남자들이다보니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촬영장 분위기가 밝아진다는 점이 좋다. 언제나 기운이 남아도는 아이들이라서 쉬는 시간에는 축구를 하지 않나, 현장분위기가 시종일관 유쾌하기 그지없다. 물론,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이 많기 때문에 디테일한 연기지도가 어렵다는 것이 안 좋다.
-배우들의 연기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번 영화는 호흡이 많이 짧기 때문에 한숏 안에서 배우들의 포즈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전체적인 리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각각의 캐릭터와 배우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나리오 수정을 많이 한 편인가.
=연기 경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젊은 배우들이 섞여 있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케이팅을 전문으로 했던 애들과 연기가 전문이었던 애들이 서로를 가르쳐주면서 맞춰가고 있다. 애들이 서로 조언을 하면 나는 전반적인 톤을 조절한다.
-지난 인터뷰 때 첫 영화와 달리 이제는 영화를 만드는 것의 즐거움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촬영이 기다려진다고 했는데.
=글쎄, 아직 촬영 초반이라 뭐라고 말하긴 어렵다. 영화의 65%가 낮촬영이라 구름의 방해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전체적인 톤 관리도 힘들고. 하지만 야외에서 시원하게 찍을 수 있어서 늘 즐거운 것도 사실이다.
-배우들의 스케이팅 실력에 만족하나.
=모두가 여름 내내 열심히 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몇몇 배우들은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고, 이들이 최선을 다한 덕분에 나름대로 무리없이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다음 영화로 혹시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
=이제는 단둘만 나오는 영화를 찍고 싶다. (웃음) 액션영화를 찍고 싶기도 하고.
스케이팅 훈련
매일 7시간씩 두달간 맹연습, 무더위보다 더 살인적<태풍태양>의 젊은 배우들에게, 지난 여름은 살인적인 더위보다도 온몸을 던졌던 스케이팅 훈련으로 기억될 것이다. 스케이트와 한몸이 되어 생활하는 영화 속 인물들을 소화하기 위해 두달간 집중, 속성 코스로 진행된 스케이팅 훈련의 책임자는 국내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 1세대이자 국내 최고의 프로선수이기도 한 두명의 테크니컬 디렉터. 훈련은 8월 말 크랭크인 전까지 꼬박 두달 동안 보라매공원 등에 마련된 게임파크에서 하루 7시간씩 매일같이 진행됐다. 첫 한달은 평지에서 전진, 후진, 회전 등 기본적인 주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는 데 소요됐다. 나머지는 액션스쿨에서 와이어를 착용하고, 핸드레일(난간의 손잡이) 묘기 등 본격적인 기술연마 과정. 각각의 캐릭터들이 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케이팅 스타일을 구사하기 위한 개인훈련 과정이었다. 남자답고 힘있는 스타일의 갑바, 부드럽고 세심한 기술을 소유한 모기, 두 사람에게서 고르게 영향을 받아 둘의 장점을 모두 겸비한 소요, 그리고 나머지 6명에게도 각자의 스타일이 존재했던 것. 테크니컬 디렉터 강훈씨는, “이 정도의 기술을 두달 안에 연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누구보다 근성을 가지고 있는 배우들이 정말 열심히 해줬기에 그만큼 좋은 성과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배우들은, 수백번씩 시도해도 실패했던 기술,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기술이 영화 속 대사처럼 “딱 되는” 희열을 최고로 꼽기도 했다. 어려운 스케이팅 장면들은 촬영 후반부에 포진돼 있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배우들은 촬영기간 중 쉬는 날이면 연습장에서 훈련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