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감독 김대승 출연 차승원, 지성 제작 좋은영화 개봉예정 2005년 상반기
질곡의 역사를 담는 리얼리즘의 그릇. 이것이 한국영화에서 전통적인 사극을 정의내려왔던 문장일 테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사극은 변하고 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청풍명월>(혹은 TV시리즈 <다모> <대장금>)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변화의 조짐이었다. 심지어 김대승 감독(<번지점프를 하다>)의 <혈의 누>는 조선 시대를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대담무쌍한 시도를 진행 중이다. 과연 조선 시대와 장르영화의 합방이 가능한 것일까.
지난 10월3일 전남 영광군 <혈의 누> 촬영현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당산나무를 둘러싼 거대한 삼베색깔 장막이다. 토템신앙의 은밀한 사교장소인가. 장막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서자 기이하게 만들어진 지형도가 펼쳐진다. “원래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그냥 휜 장막이 감싸고 있는 공간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민언옥 미술감독은 사극에서 만날 보던 게 그런 거니 다르게 가자더라. 돌담을 쌓고 언덕을 황폐하게 깎아내고. 그렇게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공간이다”는 김대승 감독의 설명처럼, 이것은 흔한 사극에서 언제나 보아온 익숙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 기묘한 세트는 끔찍한 연쇄살인 현장의 무대다. 나뭇가지에 기묘한 방법으로 몸이 꿰뚫려 죽은 시체는 이제 거적 위에 조용히 누워 있다. 특수분장팀이 거적을 휘이 걷어내자 고통에 일그러지고 흉측한 자상을 가슴에 지닌 남자의 고통이 드러난다. <텔미썸딩> <살인의 추억> 등에서 작업했던 특수분장팀 Mage가 두달을 꼬박 세워 실리콘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살해방법이 특이하니까 그걸 잘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는 신재호 팀장의 말을 뒤로하고, 한 여자 스탭이 시체의 (너무나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중요 부위에 면장갑을 살짝 덮는다. 오호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스탭들에게도 이게 여간해서는 가짜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10월3일에 진행된 촬영분은 주인공인 원규(차승원)가 장학수라는 남자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원규가 살인의 현장으로 들어서자 시체를 둘러싸고 서 있는 검시관들과 두호(지성)가 절을 한다. 자리에 앉는 원규. “그럼 시작하게.” 시체 주위에 놓여 있는 갖가지 검시도구들은 마치 <스캔들…>에서의 화장도구처럼 낯설다. 조선 시대에 저런 검시도구들이 있었을까. 계속해서 배우들의 동선을 바꾸어가며 진행되는 촬영을 지켜보다가 콘티를 한장 얻고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림 콘티는 없고요. 글로 된 콘티가 있어요”라며 스탭 중 한 사람이 얇은 복사지를 한장 건넨다. 각각의 조연들에게 위치와 동선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지정해주는 감독과 거기에 맞춰 여러 가지 컷을 시험하는 최영환 촬영감독(<범죄의 재구성>)의 호흡이 콘티 없이도 착착이다. “최영환 촬영감독은 컷이 빠르고 힘있게 넘어가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긴 호흡으로 가다가 끊어버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현장에서 주고받으면서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김대승 감독의 이야기다.
사실 <혈의 누>는 쉬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화가 아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연쇄살인 추리극이라는 것은 여전히 낯선 조합이다. 제지업으로 살아가는 외딴섬 동화도. 조정에 바쳐야 할 제지를 싣고가던 수송선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사관 원규 일행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원규 일행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소름끼치는 방법으로 살해되어가는 섬사람들의 시체들이다. 김대승 감독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탐욕과 오만함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서, 동화도라는 섬이 지옥으로 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며 자신에 찬 의지를 보였다. <혈의 누>는 11월 초에 크랭크업해 올해 안에 개봉할 예정으로 바쁘게 달려가는 중이다. 역사극의 외피를 둘러쓴 생생한 지옥도를 스크린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김대승 감독 인터뷰
“차승원은 역시 영리한 배우다”-큰 키 때문에 현장에서도 단연 차승원이 눈에 들어온다. 왜 차승원인가. 코미디 배우라는 인식이 있지 않나
=일단 부딪쳐보면 이전과는 다른 것을 끄집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진지한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들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세련되고, 건조하고, 도도하다고 할까. 물론 초반에는 서로 부딪히기도 했다. 나는 방임형 연출가가 아니라서 하나하나 구체적인 요구를 하는 편이니까.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알 만한 사이가 되었다. 워낙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배우라. 금방 알아듣고, 요구도 금방 따라주고. 요즘은 아주 즐겁다. (웃음)
-민언옥 미술감독과의 작업은 어떠한가.
=<춘향뎐> 작업하면서 ‘언젠가는 저 사람과 꼭 일을 같이 해야지’ 했었다. 나보다 나이도 10살이나 많은 분인데 진취적이고 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맞추고, 함께 헌팅을 가고 하면서 함께 많은 고민을 나누었다.
-사극이라 아무래도 <혈의 누>도 고증과 미술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텐데.
=고증은 굉장히 중요하다. 결국은 리얼리티가 기반이 되어야 판타지가 제대로 구축되니까. 하지만 관객이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 정도 안에서 자유롭게 가고 있다. 제주도는 아니지만 갈옷처럼 옷도 염색하고. 외부와 내부 사람의 의상도 다르게 하고. 이를테면 사람을 살해하는 방법과 수사과정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새롭게 만들었다.
-“매우 무서운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전 인터뷰에서 이야기했었는데. 그렇다면 그 공포를 관객에게 안겨주기 위한 기술적 방법은 무엇인가.
=기술적인 부분들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호러영화를 즐겨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적인 부분들은 귀를 열어놓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내가 꼭 가져가야 할 것은 이런 거다. 결국 무서운 것이 사람인데, 사람이 탐욕에 눈이 먼 순간. 내가 익히 알아오던 친절한 그 사람이 아닌 살인마로 돌변하는 것. 거기서 오는 긴장감들을 가지고도 충분히 무서운 영화가 되는 게 아닐까. 장르영화라는 특별한 구애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
-규모가 적지 않은 작품이라 제작비와 촬영기간을 맞추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나.
=그런 것은 정확하게 맞출 거다. 겨울방학과 설 넘어가면 비수기로 넘어가는데 그전에 개봉해야 하지 않겠나. 예산도 결코 방만하지 않게 운영하고 있다. 정해진 제작비를 넘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트 제작 10군데 헌팅, 바지선으로 기자재 공수<혈의 누>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기 위해 김대승 감독이 불러들인 사람은 <춘향뎐>의 조감독을 하면서 인연을 쌓았던 임언옥 미술감독이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지옥의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감독의 주문에 임언옥 미술감독은 10군데가 넘는 장소를 헌팅하며, 그가 머릿속으로 그려두었던 이미지의 느낌을 구현할 수 있는 지형을 찾는 데 주력했다. 포구마을을 건설할 여수 근방의 해안가를 마침내 발견한 것은 세트작업 시작일이 거의 임박해서였다. 포구마을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될 동화도로 들어가기 위한 지옥의 통로 같은 장소. 그러나 세트 제작에 따르는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 해안선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찾은 장소라 차량 진입도 불가능했다. 겨우 찾아낸 방법은 바지선을 이용해 해안으로 기자재들을 공수하는 방법이었다. “리얼리티를 살리는 세트보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모양을 변형하고, 확대하고, 과장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는 임언옥 미술감독의 이야기는 “고증은 굉장히 중요하다. 결국은 리얼리티가 기반이 되어야 판타지가 제대로 구축되니까. 하지만 조선 시대의 고증을 되도록이면 맞추더라도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을 정도에서 자유롭게 가고 싶다”는 김대승 감독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고증을 무시하지 않되 새로운 영화적 시공간을 창조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임언옥 미술감독은 실제를 바탕으로 하는 변형된 이미지들 위해 박물관을 다니며 더 완벽한 고증을 연구하였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질감으로 독특한 공간을 만들었다. 사진으로 볼 수 있는 포구마을의 세트에는 어구의 그물들이 거칠게 찢어져 널려 있고, 위험스러워 보이는 죽방들이 뾰족하게 서 있어 불안하고 거칠게 과장된 느낌을 전달해준다. 총 16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되어 완성된 포구마을과 동화도는 아직까지도 그 완전한 모습을 공개하지 않은 채 베일에 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