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깜짝 공개! 촬영장 습격사건 [3] -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2004-10-20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주먹이 운다> 탄천 촬영현장

유쾌한 악동이 웃음을 버렸다

감독 류승완
출연 최민식, 류승범, 임원희
개봉예정 2005년 4월

류승범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다음 장면에서 류승범은 허리 높이 정도까지 차오르는 탄천을 건너야 했다. 물살이 의외로 빨라서 경찰들의 곤봉과 권총들이 물에 죄다 떠내려갔고, 테이크마다 그걸 찾느라고 소품부는 비상이 걸렸다.

류승완 감독의 촬영현장은 3D 업종의 공장 같다. 구경꾼에겐 그렇게 느껴진다. 톱밥 날리는 인천의 폐공장(<피도 눈물도 없이>)이나 스모그 가득한 김포의 촬영소(<아라한 장풍대작전>)보다 숨쉬긴 편하지만, <주먹이 운다> 5회차 촬영지인 탄천 또한 엉덩이 편히 붙일 곳은 아니다. 진흙을 피해 한발 옮기면 멋대로 웃자란 잡초들에 매달려 있던 잔벌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게다가 그늘 하나없는 천변이다. 진흙구덩이에 빠져 헛도는 경찰차 바퀴 촬영을 위해 이것저것 지시하고 돌아서는 류승완 감독에게 인사 대신 “이번에도 여전하군요” 했더니 “어제까진 깔끔했는데…”라고 놀리듯 말을 흐린다. 촬영현장을 찾은 날은 9월29일. 추석 연휴를 몽땅 반납한 제작진은 송편 대신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우고 난 뒤 곧장 모여서 구덩이를 판다. 경찰의 추격을 뿌리쳤다고 안심한 상환(류승범)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미끄러지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다. 어디선가 커피 한잔을 구해서 마시는 한재덕 프로듀서에게 “혼자 먹기냐”며 “난 흙탕물이나 마셔야겠다”고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류승완 감독은 여유롭긴 한데 못 보던 모습이다. 전작들의 액션장면 촬영 때마다 웃음을 거두고서 일일이 시연을 해보이기까지 했던 그가 어찌된 일일까.

“<주먹이 운다>는 생짜 거리영화예요. 인공적인 세트영화가 아니라. 배우들한테도 디렉션을 탁탁 주는 게 아니라 그냥 편하게 열어두고 가요.”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 때 현장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감독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만 빼곤. 오전에 천변에서 웃통 벗고 몸을 그을리고 있다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한 류승범(레게 파마를 한 뒤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부터 긁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의 말도 그렇다. “원래 저 질문이 많은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형하고 이야기 별로 안 해요. 계산된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동감을 전달해야 하거든요.” 실제 촬영에서도 류승범은 형에게 대략의 동선만 묻고서 알았다며 오토바이에 올라타 부르릉거린다. 테스트 대신 곧바로 슛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류승완 감독은 “<아라한 장풍대작전> 하면서 테이크가 많으면 배우의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걸 알았다”며 “세번 안에 OK 컷을 못 건지면 그때부턴 나 또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리게 된다”고 설명한다. 본능의 에너지가 엄습해서였나. 수풀더미를 뛰어넘는 류승범을 포착하던 노련한 사진기자 또한 뒷걸음질 끝에 넘어진다.

구덩이에 걸려서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지는 장면의 연속사진. 6개월된 초보 레이싱 스턴트맨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다. 걸려서 넘어지는 장면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정두홍 감독의 지시 아래 구덩이를 더 깊게 파야만 했다.

<주먹이 운다>는 링 위에서 주먹을 뻗어 사연을 전하는 두 남자의 삶을 번갈아 보여주는 영화다. 이들 두 남자는 영화에서 후반부에 단 한번 만난다. 그것도 사각의 링 위에서. 폭행죄로 감옥에 가게 된 20대 초반의 상환과 거리에서 사람들의 주먹을 맞고 푼돈을 버는 40대 중반의 태식, 보잘것없는 밑바닥 두 남자는 링에서 무릎을 꺾을 수 없는 사연들을 품고 있다. 오기와 객기 빼곤 가진 것 없다가 감옥에서 복싱을 배우게 된 상환과 빚더미에 나앉은 삶을 건지기 위해 글러브를 다시 낀 전직 국가대표 복서 태식의 신인왕전 대결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는 복싱영화도, 스포츠영화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영화 속 태식과 상환의 대결은 주먹으로 대사를 주고받는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어떻게 상대를 타격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풀려서 후들거리는 두 사람의 다리를 보여주려고 한다. 관객이 어느 한쪽도 응원하지 못하도록 했다가 마지막에 두 사람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게 만들고 싶다.” 혹시 뭔가 숨기는 게 아닌가 싶어 정두홍 무술감독에게 마지막 대결장면에서 어떤 액션을 구상하고 있느냐고 묻자 “민식이 형님이 그냥 6라운드 실제로 뛰자고 하니까 뭐 생각할 것도 없죠”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든든한 한축은 이제 막 몸을 풀기 시작한 최민식이다. 몸 만들기에만 전념하고 있는 그는 10월 들어서야 촬영에 돌입했다. 벌써부터 관심을 모으는 태식과 상환의 신인왕전 경기는 내년 1월, 대구 컨벤션센터에서 벌어진다.

오토바이가 쓰러지면서 류승범이 굴러떨어지는 장면. 테스트 촬영을 준비하던 류승완 감독이 “승범아. 우리 한번 바로 가볼까?”라고 제안하자, 류승범은 제자리에서 덤블링을 한 뒤 흙탕물에 몸을 던졌다.
준비된 오토바이를 타본 류승범은 “에이, 이 오토바이 후진데”라고 말했지만 촬영에 들어가자 오토바이를 굉장히 아끼는 듯했다.
류승완 감독은 <주먹이 운다>를 촬영하면서 배우들에게 동선 정도만 체크해줄 뿐 대화는 삼가는 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끝나고 나서 배우들이 류승완화된 연기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우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능력을 포착하는 데만 신경을 쓸 거다. 캐릭터의 역할과 정서를 대화로 좀더 풀면서 배우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다.”
극중 류승범처럼 차려입은 이는 정두홍 무술감독 아래의 막내 스턴트맨. 오토바이가 날아가도록 세팅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정두홍 감독이 나서서 코치를 하고 있다. “얘가 투지도 좋고, 능력도 있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류승완 감독 인터뷰

“테크닉, 잔재주 안 부리고 정서와 인물에 다가간다”

-두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들었다.

=하레루야 아키라라는 전직 복서 출신의 사업가가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주기 위해 거리에 나와서 매를 맞아가며 돈을 버는 방송 다큐를 봤는데 인상적이었다. 다들 빚 때문에 도망치고, 자살하는데 저 사람만은 거리에서 자신의 시련과 맞서고 있구나. 또 한편의 다큐는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 권투를 배우게 되고 나중에 전국체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서철에 관한 것이었고, 두편의 다큐에서 태식과 상환의 모델을 얻었다.

-서로 모르는 두 인물이 후반부에 단 한번 만나 싸운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누군가는 volume 1, 2로 나눠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웃음) 뒤틀린 직업으로 주먹을 써야 하는 태식과 인생의 탈출구로서 복싱을 택한 상환의 만남을 교차로 끌어가는 건 드라마 안에서의 충돌 효과를 의도하기 위해서다. 거리를 떠돌던 젊은 친구는 어느 날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고, 또 거리를 등지고서 자기 세계를 꾸려가던 남자는 갑자기 다가온 불행 때문에 거리로 나오게 되고. 인물뿐 아니라 상황이나 공간 등도 끊임없이 대비되고 충돌하고 마지막에 폭발한다.

-최민식을 캐스팅하는 게 촬영 시작의 관건이었을 것 같다.

=처음 보자마자 다른 영화에 출연하는 분량의 50%만 출연해도 된다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했다. (웃음) 시나리오 작업하는 동안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캐릭터 구축하는 데 상투적인 부분들을 많이 잡아주었다. 이번엔 배우들을 전적으로 믿고 간다. 내 시나리오 보면 잡다한 감정표현 지문이 많은데 이번엔 그런 게 없다. 디테일한 행동에 대한 지시 또한 촬영하면서 많이 지워질 것 같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타일이나 테크닉보다 인물이 보여야 한다.

-밝고 유쾌한 악동 같은 이미지의 류승범은 이번 영화에선 없다.

=승범이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어두운 상실의 정서나 두려움 같은 게 있다. 게다가 본인이 워낙 이런 캐릭터를 하고 싶어했던 터라 현장에서 별다른 이야기 없어도 술술 잘 나가는 편이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류승범의 저음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두 사람이 만나 싸우게 되는 링은 어떻게 비주얼화할 것인가.

=아직 콘티도 없다. 그걸 계산하면 내가 봤던 이미지들을 염두에 둘 것 같아 미리 생각 안 하고 있다. 다만 정두홍 무술감독의 프로권투 테스트 경기를 본 적 있는데 아주 가까이에서 보니까 피와 침이 섞여 흐르고 글러브에도 땀이 맺혀 뚝뚝 떨어지더라. 권투나 액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링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정서가 가장 중요하다. 테크닉 안 부리고, 잔재주 안 부리고 그런 정서와 인물에 솔직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렇다면 카메라 앵글이나 구도 또한 전작들과 다를 것 같다.

=거의 핸드헬드다. 트라이포드를 세워놓고 구도를 잡기보다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따라가야 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패싸움>과 <현대인>을 찍었던 조용규 촬영감독과 다시 손발을 맞추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피사체를 찍는 게 아니라 정서를 잡아낼 줄 안다.

배우들의 몸만들기 프로젝트

운동은 기본, 식이요법은 필수

-류승완 감독은 권투장면이 아니라 인물들의 정서에 집중하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링 위에 올라야 할 배우들이 몸만들기를 소홀히 할 순 없다. <주먹이 운다>의 태식과 상환은 모두 웰터급. 실제 웰터급 선수들의 몸무게는 68kg 이하다. 특히 웰터급은 여타 체급에 비해 힘과 스피드를 겸한 역동적인 경기가 많기로 유명하다. 권투장면 촬영은 내년 1월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전력질주해야 하는 상황. 최민식의 경우 지난 9월부터 하루에 4시간씩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올림픽공원 주위 5km를 완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섀도 복싱, 미트 치기, 벤치 프레스 등 순발력, 근력 훈련 등을 병행하고 있다. 배우들의 복싱 연습을 돕고 있는 김지훈 코치에 따르면, 연습 시작 전에 다소 뱃살이 불어난 75kg이었는데 워낙 열심을 부리는데다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몸이 빨리 만들어지는 편이라고 한다. 예전에 권투를 한 적 있어 10월 초부터 들어간 스파링 연습에선 코치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풋워크의 경쾌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침착하게 주먹을 날리는 건 일품이라는 평가.

=류승범의 경우 체중 감소에 대한 부담은 적긴 한데 근력 불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체형은 괜찮은데 몸에 볼륨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던 류승범은 아예 김지훈 코치와 같이 서울체육고등학교에서 합숙을 할 정도다. 특히 각종 타이틀 경기는 빠지지 않고 직접 관람할 정도로 운동에 빠져들었다. 운동 신경이 좋아 끊어치는 기술 등을 습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폼은 좀더 다듬어야 한다고.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배우들은 먹고 싶은 것 맘껏 먹어선 안 된다. 짠 음식과 돼지고기는 절대 금물. 그리고 달걀 흰자 다섯개, 푸석한 닭가슴살을 매일 먹어야 한다. 또 포만감을 느낄 정도의 식사는 곤란하다. 매일 옆에서 두 배우의 수행을 봐야 하는 김지훈 코치는 안쓰럽긴 하지만 “훈련시엔 어떤 불만도 받아줘선 안 된다”는 정두홍 무술 감독의 말을 묵묵히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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