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이 드디어 영화 속으로 들어왔다. 다양한 10대 영화들이 쏟아져나온 2004년은 ‘소녀영화’라고 일컬을 만한 핑크빛 기운이 감지되는 한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새로운 소녀 관객층이 터져나왔다. 소녀들이 직접 자기 세대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며, 왕자님 판타지는 더이상 예전 같을 수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조연으로 등장해 주인공을 괴롭히는 데나 골몰했을 잔인하고 나쁜 소녀들이 주역으로 올라서서 어여쁜 손바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뭔가 데자뷰가 느껴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보자면, 알리샤 실버스톤을 90년대 중반 최고의 소녀스타로 만들었던 <클루리스>(1995)는 가히 (남녀를 모두 교집하는 ‘청춘영화’와는 분리되는 의미에서) ‘소녀영화’의 태동을 알린 작품이라 할 만하다. 제인 오스틴의 고전 <엠마>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90년대 중반을 살아가는 미국 여고생들의 코드를 제대로 담고 시대와 소통하고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테다. 지금까지도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헤더스>(1989)는 10대 영화의 새로운 감수성을 낳았다. ‘헤더스’로 불리는 거만한 공주병 여자애들의 모임에서 왕따당하는 여고생 베로니카(위노나 라이더)는 자기파괴적인 소년 JD(크리스천 슬레이터)를 만난다. 소년이 소녀를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지사겠지만, 얘네들은 사랑에 빠지면서 함께 학교친구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지금 보아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전복적인 작품이다.
그렇다면 올해 등장한 소녀영화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할리우드 스타와의 데이트 기회가 주어진 평범한 소녀 이야기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는 생생한 캐릭터가 시대착오적 이야기를 상쇄하는 상큼함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소녀의 로마 여행을 다룬 <리지 맥과이어>는 솜털처럼 가벼운 MTV 세대를 위한 선언문이다. <프린세스 다이어리2>는 전형적인 ‘미운 오리 백조 되기’ 우화지만 좀더 긍정적인 공주상을 펼쳐낸다. 줄리아 스타일스 주연의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적극적인 성격의 여대생이, 신분을 감추고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철없는 덴마크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신데델라 이야기. 신분상승에 몸을 내던지지 않는 자주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에서 ‘쿨’한 소녀클럽에 들고 싶은 13살짜리 소녀는 마법의 힘으로 갑자기 30살의 커리어우먼(제니퍼 가너)이 된다. 소녀의 성장욕망을 드러내는 영화의 소재는 여성판 <빅>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비평적으로나 박스오피스의 선전으로나 올해 최고의 소녀영화 명패를 달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아프리카에서 자란 케이디는 미국 고등학교라는 장소가 사실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쩔 수 없이 잔인해져야만 하는 케이디. 그러나 그는 여왕벌을 자리에서 끌어내면서 점점 자신도 여왕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리하게 만들어진 플롯 속에서 비틀린 유머감각을 발산하는 이 작품은 가히 ‘할리우드 10대 소녀 잔혹기’의 절정이라 할 만큼 알싸하기 그지없다.
자. 올해를 소녀영화의 혁명이 일어난 시기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상업영화는 원래 진화하면서 그만큼 약삭빠르게 변모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2004년은 여전히 소녀영화의 진화과정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준 한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04년은 “협소하기 그지없는 10대 영화에 거대한 변화(Titanic Change)가 온 해”였고,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자면 “그동안 갇혀 있던 소녀영화가 일순간 폭발하듯 ‘범람’(Spate)하기 시작한 해”였다. 물론 그 변화는 아직까지 완성을 보지 못한 단계일 테지만, 그 기운을 감지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이쯤에서 한번 가볍게 뒤를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예전의 소녀영화 히로인들을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 가상 담화를 가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