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할리우드 소녀영화 유행 분석 [2]
2004-11-19
글 : 김도훈
<클루리스>에서 <퀸카로 살아남는 법>까지, 소녀영화 주역들의 가상대화

어린 신부, 베버리힐스의 소녀들을 만나다

lll 등장인물

보은 l 대한민국 서울에 거주하는 귀염둥이 어린 신부. 할아버지의 강요로 24살 상민과 결혼, 수많은 난관을 거치고 지금은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있다.

셰어 l 20대 후반의 베벌리힐스 아가씨. 그의 자전적 영화 <클루리스>(1995)가 개봉한 이후, 패션 감각을 인정받아 지금은 뉴욕의 한 패션지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베로니카 l 30대 초반의 하드코어 밴드 ‘가위손이 너덜너덜 헤져쓰’의 베이시스트. 고교 시절 JD라는 인물과 학교 도서관을 폭파시키는 테러를 감행했다가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악명을 떨쳤다. 그 사건을 영화화한 <헤더스>(1989)로 매스컴 스타가 되었으나, 최근 베벌리힐스의 옷가게에서 옷을 훔치다가 적발되어 잠적 중이다.

케이디 l 17살의 여고생. 아프리카에서 하이에나패의 퀸카로 살아가다 LA로 돌아와 서부 여고생 폭력조직을 일거에 무릎 꿇린 신화적인 인물.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올해 1억달러를 넘어서는 슬리퍼 히트작이 되었다.

특별출연 l 티나 페이 SNL 코미디언 출신.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각본가.

(주-그녀의 대사들은 실제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들임을 밝힙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

그들을 만난 장소는 햇살이 밝은 일요일 오후의 베벌리힐스였다. 아직까지 시차적응을 하지 못한 보은은 눈을 채 뜨지 못한 상태다. “꼬마가 잠을 덜 잤구나. 웨이터. 얘한테 걸쭉한 에스프레소 더블 한잔 줘.” 허스키한 목소리의 베로니카가 커피를 청하자 온통 디자이너 레벨의 옷으로 감싼 셰어가 면박을 준다. “언니, 아직 애라고요. 에스프레소 더블로 줬다가는 하루 종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귀찮게 조잘거릴걸.” 그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운명이었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인터넷 채팅방의 방제 ‘애들은 가라’. 그곳에 홀린 듯 끌려들어가자마자 세명의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사실 두 사람은 방제인 ‘애들은 가라’에 걸맞게 보은을 강퇴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으르렁거리던 참이었다). 어쨌든 “최근 개봉한 소녀영화들은 어떻게 보셨나요?”라고 묻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스크롤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할말이 많다면 언제 커피라도 빨면서 난담을 진행해보자 제의했던 것이다.

학교는 정글이다. 약육강식의 계급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리지 맥과이어>

“글쎄, 기자양반. 당신도 알다시피.” 베로니카가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빌어먹을 학교를 뛰쳐나온 지도 어언 15년이 흘렀다고. 요즘 애들에 대해서 내가 뭘 알겠어. 다들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입고 다니는 요물들인데.” 바로 그 15년의 연륜 때문에 더욱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하자 슬쩍 기분 은 웃음을 보인다. “뭐. 그럴지도. 사실. 요즘 애들도 사는 꼴은 마찬가지더라고. <퀸카로 살아남는 법> 봤나? 그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전학온 주인공 케이디를 위해 친구들이 학교식당의 지형도를 그려주는 장면이야. 여기는 아시안 공부벌레들이 앉는 자리, 그 옆에는 쿨한 아시안, 그리고 성깔있고 섹시한 흑인애들, 스타 추종자들, 마약 폐인들, 거식증 걸린 여자애들, 플라스틱(Plastic: 인공적인 외모를 지닌 돈많은 여자애들 무리를 뜻하는 속어) 등등. 걔들이 자유롭게 점심을 먹는 것처럼 보이지? 하지만 학교식당의 좌석들은 다 임자들이 있다고. 이처럼 십대영화 속에는 언제나 계급주의가 숨어 있지. 안 그래 플라스틱?” 셰어가 기분나쁘다는 듯, 그러나 도도한 자세로 대꾸한다. “언니, 진정성을 가진 플라스틱은 너드(nerd: 촌스런 공부벌레를 의미하는 말)나 기크(Geek: 인기없고 촌스러운 학급의 주변인들을 지칭하는 속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존재들이라고요.” “쟤 말에 신경쓰지 말고. 학교식당 계급주의에 기반을 둔 ‘못난 오리 공주되기’ 신화를 한번 보자.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대표적이지. 안경쓴 못난이가 알고봤더니 공주였다는 이야기잖아. 계급상승의 환상이라고. <완벽한 그녀에게 단 한 가지 없는 것>은 치아교정기 달고 있는 13살짜리가 자기도 ‘쿨’해지고 싶어서 소원을 빌었더니 갑자기 30살의 뉴욕 패션지 에디터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고. 누구나 할리우드 소녀영화의 클리셰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미국 소녀 아무나 불러놓고 한번 물어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학교에도 그런 후진 애들 있어요!’라고 빽 소리지를걸.” 베로니카가 길게 한숨을 쉬며 덧붙인다. “애들이 사는 곳은 하루하루가 정글이야.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정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에서 왜 하필 식당이 등장하겠어. 식당을 장악하는 자 학교를 장악하리라. 원래 밥그릇 싸움이 무서운 법이거든.”

왕자님이 소녀들을 구원한다? 아니! 소녀들이 왕자님을 구원한다!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무섭다아.” 보은양이 낮은 신음을 내뱉았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말끔히 비운 상태다. “그런데요 언니들. 한국 드라마들에는 왕자님들이 잔뜩 등장하지만, 한국영화에는 그런 훌륭한 왕자님이 별로 없거든요. 왕자병 환자만 있지. 아니면 꼭 마지막에 불치병으로 망가지던가. 근데 어쨌든. 미운 오리를 구원해주는 왕자님이라는 게 좀 구리지 않나요?” 셰어가 보은을 노려보며 말했다. “왕자라는 족속들이 원래 구리지. 하지만 판타지라는 건 원래 구린 법이야. 그래도 올해 소녀영화들에 등장한 왕자님들은 더이상 구원자 따위는 아니었다고. 오히려 소녀들이 왕자들을 구원하잖아. 그렇지 않아요 기자오빠?” 셰어의 말은 길어졌다.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을 보면 더 확실해지죠. 물론 신분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구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주인공 페이지는 왕자나 기다리는 한심한 학생이 아니라고. 생활력도 강하고 지적이고 뚝심있는 소녀가장 스타일이지. 그에 비해 그 덴마크 왕자라는 인간은 완전 재수없는 왕자병 환자야. 그런 ‘애’를 새로운 시대의 지적인 신데렐라가 바른 ‘인간’으로 교화시킨다는 게 이 영화의 숨겨진 교훈이거든. 게다가 그녀는 북유럽 개딱지만 나라의 궁전 속에서 자손생산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헛된 결정을 내리지도 않아. 물론 신데렐라 스토리는 신데렐라 스토리인 만큼 결국 그녀는 둘 다 가지게 되긴 하지만. 똑똑하고 멋진 여자가 왕자도 낚아챈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멍청하게 구원해줄 백마의 기사나 기다리던 그 옛날의 신데렐라와는 또 다르다고. 그 정도 판타지까지 걸고넘어진다면, 그건 걸고넘어지는 사람의 인생이 워낙 팍팍해서야.”

일러스트레이션 신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