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할리우드 소녀영화 유행 분석 [3]
2004-11-19
글 : 김도훈

새로운 소녀관객의 등장 - 10대 영화, 자본주의 전선으로 뛰어들다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

“어머머머머!” 그때 갑자기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케이디가 테이블로 뛰어왔다. “셰어 언니! 베로니카 아줌마! 아직도 할리우드 근처를 맴도세요? 셰어 언니는 과다체중으로 만날 신문에 오르내리더니 웬 빅맥세트? 잇힝. (눈을 찡긋하며) 슈퍼사이즈 유! 꺄르륵.” 담뱃재를 통째로 들이마신 표정의 일행이 할말을 잊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랑곳하지 않는 케이디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턱하니 앉는다. “<퀸카…>가 굉장한 성공이었죠?” 기자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휴, 뭐. 약간. 영화 만들기 전에 할리우드의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말하길.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더만. 고루한 미신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요. 요즘 미국 여자애들은 단체로 영화 보러가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단 말이지요.” 셰어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 <클루리스> 때도 그랬어. 사실 그때부터 새로운 소녀영화 붐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90년대 후반에 나왔던 영화들은 어때. 문학의 고전들을 10대 소녀영화의 세계로 끌고 들어왔던 <쉬즈 올 댓>이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얼마나 깔삼했니. 요즘 소녀영화들에는 그런 ‘고전의 향기’가 남아 있질 않아. 싼값으로 만들어 돈이나 좀 우려먹겠다는 제작자들 심보만 눈에 보이지.” 케이디의 눈에 쌍심지가 켜진다. “글쎄요. 고전의 향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탱탱하던 시절의 소녀영화들이야말로 뭔가 좀 어긋난 데가 있는 것들이라고. 언니가 걸치고 다니던 값비싼 디자이너 파티복에 어떤 10대가 공감하겠어. <퀸카…>에 나오는 애들은 다르다고. 다들 할인매장 옷입고 앉아서 손톱 손질하고 남자친구 이야기 따위나 나불거릴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애들이란 말이지. 언니처럼 예쁘게 나이든 늙은이가 고등학생 역을 맡는 게 아니라. 린제이 로한이나 힐러리 더프 같은 진짜 10대들이 연기를 한단 말이에요.”

잔인한 소녀들, 베벌리힐스 잔혹사

<브링 잇 온>

“케이디! 곧 <오프라 윈프리 쇼> 녹화가 시잘될 참인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퀸카…>의 각본을 쓰고 수학선생으로 출연했던 티나 페이가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뒤따라 달려온 매니저들이 아직 말도 채 끝내지 못한 케이디를 우격다짐으로 밴에 싣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상황이 진정이 되자 조심스레 티나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는 지금 올 한해 소녀영화들에 대해 담화 중이었는데요. 이렇게 <퀸카…>의 각본가를 만나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티나가 웃어젖힌다. “호호호. 원래 할리우드란 데가 우연의 씨줄 날줄로 이어진 세계잖아. 자기. 그런데 베로니카양도 여기 있었네! 반가워. 내가 <퀸카…>를 쓰면서도 <헤더스>를 많이 참고했거든" 베로니카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래도 <퀸카…>에 나오는 애들같이 우아하지 못한 암살쾡이들은 아니었어.” 티나는 그제야 조목조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글쎄. <헤더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였지만, <퀸카…>엔 나름대로의 리얼리티가 있어. 아마 그래서 좀 덜 우아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퀸카…>의 원전은 <여왕 벌과 추종자들, 로잘린드 와이즈먼의 십대 소녀들의 행태에 대한 보고서>라는 딱딱한 논픽션이었어.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들을 많이 가져왔지. 사실 영화 개봉 뒤에 교육관계자들과 10대 소녀들은 영화가 실제 고등학교 사회와 굉장히 닮았다는 이야기들을 각종 매체들에서 토로하지 않았겠어?” “정말 요즘애들 무서워.” 셰어가 덧붙인다. “그런 패거리들의 살벌한 왕따문화는 우리 땐 본 적이 없다고. 어떤 면에서 <퀸카…>는 <캐리>나 <조브레이커>와 다를 바가 없는 호러영화야.” “정말 미국 여고생들은 그렇게 무섭나요?” 보은이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티나가 윙크를 보낸다. “꼭 소녀영화 속에서만 여자들이 그렇게 행동해온 것도 아니라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라스트 스쿨>(1993)의 파커 포시 기억나?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가 신입생들을 향해 “씨바 뭘 봐. 대가리를 확 뜯어버린다!”고 외치는 부분은 여전히 소름이 끼쳐.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 역시 호러영화에 가깝지. 린제이 로한도 10학년 때 전학간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그런 ‘플라스틱’ 그룹이 정말로 있었다더라고. <완벽한…>에서도 그런 재수없는 패거리들이 등장하잖아.” 티나는 말을 잇는다. “그래도 <퀸카…>를 <헤더스>처럼 어둡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PG-13등급을 위한 파라마운트와의 타협이었지. 그래도 중요한 건 이 영화가 10대 소녀들에게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잖아. 오호호호.” 다들 그 웃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무 말도 않는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참, 얼마 전에 만난 마크 워터스(주: <프리키 프라이데이> <퀸카…>의 감독)가 이러더라고. (그를 흉내내며) 10대 소녀들이 <퀸카…>를 마치 리얼리티 쇼처럼 관람하던데.” 티나가 또 한번 정신나간 듯이 웃는다. “깔깔깔. 그래서 내가 대꾸했지. 그애들 이 영화를 <소피의 선택> 보듯이 관람하던데요, 감독님. 꺄르르르륵.”

주체적인 소녀들, 그네들은 울고 웃고 소비한다.

<프린세스 다이어리2>

“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그녀가 떠나는 걸 지켜보는 베로니카가 혀를 찬다. “인정해. 2004년의 10대 영화가 예전과는 좀 다르다는 걸. 그러나 대부분이 소녀들 푼돈이나 한번 노려보려고 기획된 영화들인데다 값싸게 캐스팅한 텔레비전 스타로 가득하잖아. 다들 플롯은 염치없고, 캐릭터들은 바비인형처럼 딱딱해.” 거기에 조심스럽게 보은이 대꾸한다. “그래도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것 같은데요. 이젠 소녀영화들의 흥행을 보장해줄 새로운 소녀 관객층도 생겼고, 소녀스타들이 직접 자기 세대 영화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왕자님 판타지도 조금이나마 진보하는 중이고, 게다가 착하기만 한 소녀들 대신 잔인하고 나쁜 현실의 소녀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고….” 셰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은을 바라본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이런 어린애한텐 에스프레소 한잔이 각성제라니까 각성제.”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저 이래봬도 어엿한 기혼녀라고요.” 셰어가 보은을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클루리스>가 시작이었어. 닳아빠진 소녀들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흥미진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지. 예전 같으면 주변에서 들러리나 섰던 양갓집 규수들도 동세대의 살아 있는 아이들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영화잖아. 무엇보다도 어른들 마음대로 창조했던 소녀상이 점점 피와 살을 얻어갔던 것도 90년대 들어서나 가능했던 일이지. <쉬즈 올 댓> 같은 영화들이 붐을 이루고 나서 사라 미셸 겔러 같은 애들이 화면 위에서 섹스와 마약을 시작하자 슬슬 그것도 끝물을 탔지만, 그래도 <브링 잇 온> 같은 영화는 어때? 예전 같으면 치어리더 따위는 고뇌하는 여자주인공에게 물세례나 퍼붓는 들러리나 섰을 거 아냐. 걔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치열한 투쟁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잠깐만, 잠깐만요.” 보은이 말을 막는다. “바로 그런 것들이 지난해와 올해의 소녀영화들을 만들어낸 거잖아요.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와 <프린세스 다이어리2>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비록 시대착오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은 전과 달랐어요. 자기 결정은 자기가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악역으로 등장해야 할 남자 조연들에게까지 세심하게 인간미를 부여한 것도 좋았죠.” 베로니카가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훅 공중에 불어 도넛을 만든다. “착하고 엄마 말 잘 듣고, 힐러리 더프가 광고하는 건 뭐든 사모으는 시대의 충실한 소비자들. 10대 소녀들이여. 영화를 소비하라. 여기 제대로 상을 차려놓았다. 이런 거 아냐 어쨌든?”

일러스트레이션 신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