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대한 향수
“게다가 뜬금없는 80년대 향수도 지랄맞아.” 베로니카가 냉소적으로 덧붙인다. “<헤더스>의 그 프릴달린 라라 스커트(80년대 유행했던, 아래로 갈수록 벌어지는 주름치마)는 얼마나 끔찍했냐. 그런데 말이지 <브링 잇 온>도 그렇지만, <완벽한…>과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는 완전히 80년대 리바이벌 붐이라고. <완벽한…>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춤을 추는 제니퍼 가너의 모습 좀 봐. 그 시절의 우파 가족주의에 대한 묘한 향수 같은 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러니까….” 셰어의 눈끝이 살짝 올라간다. “존 휴스 시대로 복귀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요? 그래도 사실 고등학교를 다루는 할리우드영화가 존 휴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면 그건 혁명이나 마찬가지겠죠. 선생과 부모들이 사라진 공간을 10대들이 메우고서 하우스 파티와 패션과 연애담과 청춘의 고민으로 채워넣는 게 다 존 휴스 사단의 <브렉퍼스트 클럽> <패리스의 휴일> 같은 영화들로부터 나온 거니까.” 이쯤에서 이야기들을 살짝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소녀’들에 다시 한번 초점을 맞춰봅시다. 존 휴스의 영화들에서도 소녀들은 변방의 존재들이었어요. 소녀 관객을 위한 시장 자체가 없었던 거겠죠.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로부터 보수주의의 향기를 맡아내는 것도 정치적으로 쓸모있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소녀들이 관객의 주체로 성장한 것은 지난해와 올해가 정말로 처음일지 몰라요. 그 짧은 성장의 시간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상업영화들 속에서 올해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요.” “슬슬 마무리 정리 멘트가 나오는 걸 보니 기자양반. 이만 자리를 접고 싶은 게지.” 셰어는 이미 책상에 늘어놓았던 화장도구들을 말끔히 구찌 핸드백 속에 챙겨넣었다. “그럼 저도 위노나 언니 법정에 입고갈 정장 챙기러 로데오 스트리트에 가봐야 해요.” 즐거운 환담에 감사드린다는 기자를 향해 베로니카가 슬쩍 웃음을 보인다. “어쨌든 기자양반. 오늘 대화는 여전히 오리무중(Clueless)이야. 내년, 아니 내후년 정도나 되어야 소녀영화가 진실로 진화했는지 알게 될걸. 어쨌든 배도 고프고, 나는 JD의 묘지에 꽃이나 하나 던져주러 가야겠어.”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보은은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소녀영화를 만들겠노라” 다짐하며 씩씩하게 잠들었다. 불현듯 두나와 지영이가 맡겨놓고 간 애기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 고양이는 아직도 잘 크고 있을까? 베벌리힐스의 고양이들은 서로를 할퀴며 잘들 크겠지만, 인천의 고양이 새끼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텐데. 한국이란 땅이 원래 퀸카로 살아남기에도 험한 세상 아닌가. 인천공항까지는 아직도 12시간이 남았다. 굿나잇. 베벌리힐스.
수줍어도 할말은 다 하는 할리우드의 새로운 소녀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힐러리 더프(17)(<리지 맥과이어> <신데렐라 스토리>)
“저는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는 데 두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마약에 전 미혼모 역할을 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한 시트콤 <리지의 사춘기>와 그것의 영화버전이었던 <리지 맥과이어>로 일순간에 스타덤에 오른 새로운 세대의 얼굴. 지금 미국 10대들에게 힐러리 더프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으로, 그의 얼굴을 새긴 비자카드까지 발급되고 있는 형편이다. 데뷔 앨범 <마타모포시스>가 빌보트 차트 정상에 등극하고 수백만장이 팔려나가면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잇는 새로운 팝의 얼굴로도 추앙되고 있다. 그의 걱정없이 화사한 백인 중산계급 이미지는 ‘미국 소녀를 대표하는 얼굴’로 평가받고 있다.
린제이 로한(18)
“저는 제 나이 그대로의 역할을 연기하는 게 행복해요. 왜냐하면 한번 성인 역할을 맡게 되면 그때부터는 제 나이대의 역할을 맡는 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죠.”
3살 때부터 포드 자동차 모델로 일을 시작한 그야말로 프로페셔널 연예인. 갭이나 피자 헛, 웬디스의 광고들에 출연한 빨강머리 주근깨 소녀는 소싯적부터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페어런트 트랩>(1998)에서 일인이역의 쌍둥이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으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지난해와 올해 <프리키 프라이데이>와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1억달러 이상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하면서 차기 할리우드를 이끌 새로운 얼굴로 지목받고 있다. 라이벌로 꼽히는 힐러리 더프의 표백된 중산층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인’(down to earth) 친근함으로 10대들의 지지를 얻었다.
앤 해서웨이(22)
“사실, 제 다음 영화에서 저는 마약에 전 창녀를 연기할 예정이에요. 음, 농담인데요….”
<프린세스 다이어리>로 스타덤에 오른 앤 해서웨이는 어린 시절부터 본격적인 연기수업을 받은 배우 지망생 출신. <폭스>의 TV 미니시리즈 <겟 리얼>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았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계속해서 맡겨지는 ‘공주’ 역할 때문에 표백된 이미지의 함정에 빠지고 있으나, 리안이 감독하고 제이크 질렌홀과 히스 레저가 주연하는 게이 웨스턴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 캐스팅되면서 성인 배우로서의 이미지 변신을 위한 최고의 기회를 낚았다.
맨디 무어(20)
“미니 스커트와 하이힐에 배꼽티를 입고 돌아다닐 자신이 없어요. 저는 아직도 제 성장한 몸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중이거든요.”
95년 15살의 나이로 가수 데뷔. 1집 앨범을 100만장 이상 팔아치우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조연으로 시작한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워크 투 리멤버>의 슬리퍼 히트로 절정에 오르게 되었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화장기 하나 없는 순수한 얼굴. 바로 그것이 맨디 무어를 다른 소녀배우들과 구분짓게 하는 인기의 원동력이다. 20대가 되면서 성인배우로서의 변신에 도전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테니스 스타 앤디 로딕과의 로맨스가 가장 뜨거운 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