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메리칸필름마켓(AFM) 탐방기 [2]
2004-11-2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국 자본의 할리우드 진출 상황은? <샘의 호수> 공동투자 제작

LA 베벌리힐스에 자리한 독립프로덕션 매버릭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제작사와 <샘의 호수>를 공동투자 제작한다. <샘의 호수>의 프로듀서 중 에릭 톰슨, 송유진(캐시 유), 줄리안 창 졸킨.(사진 왼쪽부터)

11월4일 AFM 시작 이틀째 되던 날, LA 베벌리힐스에 자리한 매버릭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았다. 거기에서 <샘의 호수> 프로듀서 중 에릭 톰슨, 송유진(캐시 유), 줄리안 창 졸킨을 만났다. <샘의 호수>는 한국 제작사가 할리우드의 독립영화사와 공동투자 제작하는 영화이다. 외국영화의 수입 및 국내영화의 해외 배급, 판권 세일즈를 주로 하던 미로비젼이 할리우드 소규모 영화사 닉낵과 함께 각각 40%씩 80%의 자본을 출자 제작하고, 한편으론 미로비젼의 국제부 이사인 송유진씨가 현지 LA에 별도 법인으로 설립한 영화사 40 CALIBER와 할리우드 독립프로덕션 회사 매버릭엔터테인먼트가 현지 업무를 공동 진행하고 있다.

“여기 와서 미로비젼 업무도 보고, 또 40 CALIBER 회사 창업도 하면서 해외쪽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됐다. 올 2월에 열렸던 AFM에서 <큐브> 감독과 같이 일했던 에이미 그린을 만났다. 그때 그 친구는 독립해서 지금 <샘의 호수> 감독과 프로덕션을 차리고 물밑 단계중에 있었다. 처음 우리를 찾았을 때는 한국 배급을 맡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리 배급을 하는 건 힘들 거라 판단했다. 그뒤, LA에 계속 있다보니 개인적으로도 보게 됐고, 시나리오도 읽게 됐다. 만들어볼 만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매버릭과 닉낵을 끌어들이게 됐다”고 송유진 프로듀서는 말한다.

<샘의 호수>의 한 장면.

감독 앤드루 크리스토퍼 에린의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는 “심리호러물이다. 영화적 공포감을 주면서도 관객에게는 충분히 영화 바깥에서 같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주게 되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샘의 호수>는 감독이 어릴 때부터 매년 놀러가던 캐나다의 호수를 배경으로, 아버지가 들려주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한 영화이다. “미국 독립영화의 프로듀싱 과정상 배급 미확정 상태라도 우선 프로덕션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개봉일이 아직 잡히지는 않았지만, “미로비젼이 해외 세일즈를, 매버릭엔터테인먼트가 미주 배급을 맡아서 내년 할로윈쯤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의 퀄리티 문제는 극장에 걸려봐야 알 수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제작 성사 과정에 있다. “영화 한편 들어가는 데 적어도 2∼3년 걸리는 할리우드에서 지난해 11월 설립한 40 CALIBER 같은 회사가 1년 만에 할리우드 프로덕션 회사와 공동으로 제작단계까지 들어갔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미로비젼의 채희승 대표는 “만약 현지에 있는 40 CALIBER의 활동이 없었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40 CALIBER가 매버릭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사무실을 따로 하나 두면서, 긴밀한 ‘퍼스트 룩’ 관계- 영화의 어떤 프로젝트가 개발단계에 있을 때 먼저 그것을 볼 수 있는 권한을 맺는 계약. 예컨대 상대적으로 작은 할리우드 독립프로덕션 영화사 매버릭은 스튜디오 영화사 폭스와 퍼스트 룩 관계를 맺고 있다-를 맺은 것이 이번 프로젝트에 보탬이 됐다는 것이다. <샘의 호수>의 제작은 할리우드와 끈을 이어주는 거점을 현지에 둠으로써 한국쪽 자본이 진출하게 된 예인 셈이다. 더 넓은 시장이 필요한 영화 비즈니스맨들에게 할리우드는 여전히 꿈의 공장인 모양이었다.

할리우드 아시아영화 리메이크 붐 아이디어 고갈인가, 아시아영화의 기습인가

<주온>

AFM 개막 초기인 11월 첫주까지, 그러니까 <인크레더블>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2주간 차지한 영화는 다름 아닌 일본영화 <주온>의 미국 리메이크 버전 <그러지>였다. <그러지>의 성공 사례는 한국에서의 단신 뉴스로만 흥미를 끈 것이 아니라, AFM을 찾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신화로 술렁이며 회자되었다. 그것은 예상치 않은 대성공이었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사실 할리우드가 아시아영화의 리메이크에 열을 올리는 것은 <링> 이후 이제 우리에게도 더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한국영화들이 여러 해에 걸쳐 리메이크 판권을 팔았고, 올해 역시 미라맥스가 <인형사>를 가져감으로써 당분간 그 열기가 지속될 것임을 증명했다. <폰> 리메이크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AFM을 찾았다는 안병기 감독은 <그러지>의 시미즈 다카시처럼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품에서도 연출을 맡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사석에서의 질문에 “사실 그런 걸 다 포함해서 의논하러 왔다”면서 시사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폰>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보통 이곳에서의 리메이크 작업은 “프로듀서들이 판권을 두고 브로커나 에이전트처럼 발표를 한 뒤, 원하는 스튜디오와 판권을 갖고 있는 쪽을 연결시켜주고, 성사되면 다시 그 제작에 참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러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좀더 구체적인 내부자와의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그러지>의 공동 프로듀서 신타로 시모사와와의 인터뷰가 ‘어렵게’ 성사되었고, 그는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그러지>의 또 한명의 프로듀서이자 아시아영화 리메이크 붐의 ‘대부’인 로이 리의 연락처를 가르쳐주었다. 지금 진행 중인 거의 모든 아시아영화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그의 지휘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취재 마지막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서면으로 인터뷰를 한 내용이지만(사실 며칠 더 머물렀어도 만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중 한 가지 장문의 답변은 전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할리우드가 이제 아이디어의 고갈로 아시아영화의 리메이크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로이 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아이디어란 언제나 전세계의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아시아영화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낸 것이 할리우드 사람들로부터 더이상 뽑아낼 아이디어가 없다는 말하고 같은 의미라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도 무식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프로듀서가 프랑스 소설이 원작인 <위험한 관계>의 리메이크작,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만들었다고 해서 한국영화의 아이디어 고갈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에는 미국인들이 즐겨쓰는 엉터리 비유법의 용도가 있다. 결코 한국영화가 할리우드만큼 리메이크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짚어도 로이 리의 지적은 어불성설이다. 어쨌거나 로이 리는 리메이크 프로젝트들을 단연코 “트렌드가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하지만, AFM에서 만난 프로듀서들은 다른 의견을 낸다. “할리우드가 아시아영화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아시아영화가 할리우드를 찾아온 것”(송유진)이라고 표현했고, “이 현상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아시아영화가 전면적으로 할리우드로 들어올 전이단계에 불과하다”(재닛 양)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디어의 고갈이든 아시아영화의 기습이든 지금 할리우드의 중심에 아시아영화의 원작들이 즐비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실제로 그 숫자를 한국영화가 채워가고 있다. 아마도 할리우드는 점점 더 한국영화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에필로그

<폰>

이쯤에 이르러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탐방기의 처음 의도는 순진하면서도 거창했다. AFM을 돌아다니며 한국영화의 실적도 좀 전하고, 까짓거 이왕 가는 김에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부탁하여 미라맥스의 하비 웨인스타인이나, 뉴라인 시네마의 사장이나, 스콧 루딘 정도 인터뷰하면 되지 않겠냐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인터뷰 하나를 위해서도 거쳐야 할 창구가 여러 개며, 서류와 이메일로 단계에 단계를 거쳐 몇주 전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곳에서 그건 백악관 앞에서 부시 이름을 부르며 만나고 싶다고 무작정 버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AFM 데일리를 펴내는 <버라이어티>조차 변변한 인터뷰 하나 따내지 못하고, “AFM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하비 웨인스타인이 오늘 로비를 어슬렁거렸다”는 구차한 일면식을 실을 정도인 걸 보면 어려운 건 한국에서 온 기자만의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메멘토> <도니 다코>의 프로듀서 애런 라이더와의 만남은 3일간 미루고 미룬 끝에 결국 무산됐고, 네댓번 약속시간을 바꿔가면서 애를 태우던 신타로 시모사와는 사라 미셸 겔러와 저녁을 먹는 중이니 몇 시간 뒤에 전화하라는 말을 남겨주어 겨우 만날 수 있었고, 그 복잡한 로비에서 헤매다 만난 재닛 양은 얼마나 바빴는지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그들과의 약속이 지연되면 될수록, 이곳 정글의 시스템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간접체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한국영화와 영화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이번 AFM을 다녀오면서 받은 또 하나의 개인적인 잔상이다.

추신: 미니 메이저 프로듀서들의 목소리를 싣지는 못했지만, AFM에서 만나 진솔하게 이야기하게 된 두명의 인디펜던트 프로듀서 신타로 시모사와 제닛 양의 인터뷰로 그 일면을 전한다.

취재협조: 매버릭엔터테인먼트 에릭 톰슨, 강제규&명필름 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