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1]
2004-12-1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김봉석, 류승완의 <주먹이 운다>와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 현장을 가다

4번째 선택, 그것이 궁금하다

술자리에서 제안을 받았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의 촬영현장을 찾아보고, 인터뷰를 한 뒤에 기사를 쓰지 않겠냐고. 아마도 이유는, 개인적으로 두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장르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김지운과 류승완의 영화는 언제나 환영이다. 게으른 탓에 현장에 잘 다니지는 않지만,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중에 영화를 보며 ‘목적’과 비교하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현장에 갔다.

사실 어떤 영화의 현장을 찾아 그 느낌을 표현하려면, 한번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적어도 5, 6번 아니 10번 정도는 현장을 찾아 분위기를 살피고, 이야기를 듣고, 꼼꼼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은 절대로 현장취재가 아니다. 그저 현장을 찾아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한 장면의 인상을 얻고,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에 대한 인상기(印象記)일 뿐이다. 내가 잠깐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 2005년 봄에 나올 두편의 영화의 윤곽을 어슴푸레 짐작해보는 것뿐이다.

생전처음으로 분당을 두번이나 가면서, 이 글을 써야 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봤다.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에 이어 4번째로 <달콤한 인생>을 만들고 있다. 류승완 감독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포함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이어 4번째다. 일반적으로 3, 4편 이상의 필모그래피가 쌓이면, 중견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자신의 영화세계가 정착되어가는 안정적인 형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지운과 류승완은 데뷔작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꾸준하게 성장해온 중견감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장화, 홍련>과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평단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불만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태’가 뭔가 차기작 연출에 영향을 끼쳤을까? 그들은 지금 어떤 영화를, 어떤 심정으로 만들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류승완의 <주먹이 운다>는 막바지에 몰린 두 남자, 20대의 상환과 40대의 태식의 맞대결을 그린 영화다. 두 남자의 인생을 교차편집으로 쭉 훑어가다가, 마지막 프로 권투 신인왕전 결승에서 클라이맥스에 돌입한다. 기존 류승완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게, 뭔가 눈을 확 잡아끄는 장면이나 단어 대신 땀과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스스로 ‘장르 바깥으로 나갔다’고 말할 정도로, <주먹이 운다>는 기존의 류승완 영화와는 조금 다른 영화다. 뭔가 ‘류승완의 대표작이 나올 것 같다’며 덕담을 한 김지운 감독에게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테크닉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두 남자의 삶과 감정에 깊숙이 파고들어 단지 따라가는 것. 그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주먹이 운다>는 만족스럽고 너그러워진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은 한 남자의 파멸을 그린 필름누아르다. 필름누아르는, 김지운 감독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고 말해온 장르다. 고독한 남자. 중절모를 쓰지 않았어도, 시가를 물지 않았어도, 남자의 세계는 언제 어디에서나 변함이 없다. 남자는 진정으로 강한 게 아니라 강한 척하는 것이고, 그들은 세계의 부조리함에 부딪혀 발가벗긴 채 내동댕이쳐진다. 필름누아르는 그런 남자들의 추태를, 빛과 그림자로 각인시킨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하나로, 세계의 불완전성을 말할 수 있는 게 필름누아르다. 그래서 가장 치밀하고 정교한 세공이 필요한 장르다. 지금 김지운 감독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고통과 즐거움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중이다.

류승완이 보폭을 넓히면서 새로운 무공에 정진하고 있다면, 김지운은 자신의 세계를 더욱 강고하게 건설하는 중이라고나 할까. 그건 건축 중인 건물의 뼈대만을 보고, 그것도 아주 일부분만을 보고 얻은 인상이다. 그들이 어떤 세계를 창조했는지는, 그들의 영화가 완성된 뒤에 귀가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이란 건 불완전하지만, 영화에서 시각은, 여전히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준다. 김지운과 류승완은, 그 시각의 위대함과 즐거움을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들의 영화를 하루빨리 보고 싶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그들의 말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질 것인지. 내년 봄에, 이 영화들을 어떤 생각으로 보고 있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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