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4]
2004-12-1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한 남자의 파멸 그린 김지운 감독의 필름 누아르 <달콤한 인생> 현장

“촌스럽지 않게, 아주 진정성 있게 안 들리게”

11월27일 저녁, 분당 미금역 앞에 위치한 오피스텔 8층에서는 <달콤한 인생>을 촬영하고 있다. 아직 마감이 덜 끝난 듯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좁은 오피스텔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해 복도에 서 있는 촬영팀이 보인다. 호수를 찾을 필요도 없다. 좁은 현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가니 리허설을 하는 액션스쿨 배우들이 보인다. 오늘 촬영분은 선우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필리핀 갱에게 습격을 당하는 장면이다. 보스에게 인정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던 선우는, 이 장면을 기점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보스에게 버림받고, 업신여기던 동료에게 반대로 모멸을 당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선우의 달콤한 인생은, 이 장면을 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급작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은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악몽으로 들어가버린다. 시나리오 앞뒤의 톤이 바뀌는 것은, 그것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깨어보니 지옥이다. 그 해답을 얻어낼 겨를도 없이 연이어 사건들이 터진다. 정리할 시간도 없고, 허락되지도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일들이 벌어진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선우 “어느 날 깨어보니 지옥이다”

무언가를 예감한 것처럼, 피곤에 전 몸으로 방에 돌아온 선우는 스탠드를 켰다 껐다를 반복하고 있다. 빛과 어둠이 교차되다가 어둠이 깔린 순간, 이상한 기척을 느낀 선우가 불을 켜자, 소파에 누운 선우의 머리 위로 필리핀 갱 3명이 곤봉을 들고 서 있다. 날쌔게 일어선 선우에게 필리핀 갱이 공격을 가하고 격투가 벌어진다. 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소파에 누운 선우의 모습을 잡고, 위에서 얼굴을 잡고, 다리쪽에서 몸 전체를 잡는다.

머리카락의 위치, 다리가 세워진 각도 하나까지 세심하게 맞춰나간다. 자세나 동작은 물론, 빛의 감도까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림자가 어디로 떨어지는지까지 세심하게. 선우를 습격하는 필리핀 갱을 연기하는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다. 정두홍 무술감독이 세세하게 지도를 하지만, 여간해서 액션의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두려워서 세게 곤봉을 내려치지 못하고, 하나가 공격하는 동안 하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고, 어딘가가 어색하다. 당연히 액션스쿨의 전문 배우들이 하는 것과는 다르다. 카메라 위치를 바꾸고, 액션을 조금씩 바꾸고, 아주 작은 부분을 고치기 위해서 테이크를 반복한다.

영화가 반복과 인내의 예술이라는 것을, <달콤한 인생>의 현장에 가보면 알 수 있다. 선우 역의 이병헌은, <달콤한 인생>의 촬영이 그전 찍었던 영화 10편을 합친 것보다도 힘들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장면에 선우가 나올 정도로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순식간에 지옥을 경험하면서 바뀌는 모든 것을 연기로 표현해야 한다. 하필이면 야외 촬영이 있을 때마다 한파가 몰아닥치면서 이병헌에게는 더욱 가혹한 촬영 일정이었다.

필름누아르 “감독 주도의 절대적 통제가 즐겁다”

<달콤한 인생>은 당당하게 필름누아르임을 밝힌다. 필름누아르는 형식미가 대단히 중요한 장르다. 그 암울하고 비극적인 정서는 단지 빛과 어둠의 조화만으로도 전달이 가능하다. 한 공간에서, 여성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추적했던 <장화, 홍련>과는 또 다르게, <달콤한 인생>은 엄청난 세공이 필요한 영화다. “필름누아르는 감독의 즐거움이 있는 장르다. 나는 리얼리티 재현에는 별 매력이 없고, 리얼리티 창조에 매력을 느낀다. 필름누아르의 공간, 캐릭터, 빛과 어둠 등을 감독이 주도적으로 즐겁게 만들 수 있다.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세계를 만드는 즐거움이 있다. 절대적인 통제라는 것.”

필름누아르는 김지운 감독의 특기라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모든 영화에는 누아르의 인물과 상황이 존재한다. 인간의 의지로 뒤바꿀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은, 심지어 코미디인 <반칙왕>에도 내재해 있었다. 인간은 결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는 비관주의가 필름누아르에는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성이, 필름누아르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존재 조건일 수 있기에. 김지운 감독이 일찌감치 필름누아르에 매력을 느낀 것은, 표정 때문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어느 순간 그 표정에 감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운명적인, 불가사의한 표정들. 그걸 보고 있으면, 그 내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영화의 스틸을 보고 판타지가 생긴다. 나는 필름누아르가 인간이 어떤 운명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은 표정을 담아내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직관적인 느낌과 함께, <달콤한 인생>에는 여러 가지가 함께 섞여 있다. 김지운 감독이 어렸을 때 좋아한 배우는 스티브 매퀸과 알랭 들롱이었다. 그들이 출연했던 ‘남자’영화 같은 것을 찍고 싶었는데, ‘매퀸이 터프하고 밑바닥 인생을 보여준다면 알랭 들롱은 날카롭고 냉혹하고 감성적이다. <달콤한 인생>은 알랭 들롱을 떠올리면서 생각한 영화다. 이병헌도 그런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 한국의 남자배우라면 판타지를 가질 만한 총 쏘는 영화와 마카로니 웨스턴 같은 서부극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사무라이 영화의 순각적인 액션과 폭력, 그리고 희열 같은 것들을 담아내는 것 역시. 그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운명의 파고를 가르는 남자의 이야기가 <달콤한 인생>에서 그려진다. “감독은 전편과 반대되는 것, 못해봤던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조용한 가족>에서는 상황이 중심이 되고 드라마가 약한 듯해서, <반칙왕>을 했고 다시 너무 남자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쓰리>와 <장화, 홍련>을 하고는 다시 다양한 공간과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 <달콤한 인생>은 많은 공간과 캐릭터를 넘나들면서, 한 방향으로 자석이 나아가면 다양한 것들이 거기에 끌려가는 모양이 될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