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먹이 운다>·<달콤한 인생> 현장 방문기 [3]
2004-12-1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40대 태식과 20대 상환의 모든 것을 건 맞대결

<주먹이 운다>에는 핸드헬드가 많이 나온다. 현장에서는 두대의 카메라가 계속해서 연기자를 쫓아간다. 핸드헬드는 연기자의 동선을 쫓거나, 감정을 좇아간다. 동선을 쫓다가 배우가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금기이지만, <주먹이 운다>에서는 설사 그런 일이 벌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 프레임 안에 그들이 없어도, 여전히 그들의 감정은 남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그렇듯이, 우리의 시선과 동선이 그렇듯이, 잠시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버려도, 가끔은 인생의 큰길에서 어긋나버려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진짜라면, 진심이라면. <주먹이 운다>에는 류승완 감독 개인의 경험도 약간 녹아 있고, 실제 인물이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최민식과 류승범의 마음을 따라가며 보여줄 생각이다. “예전과는 다르게,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를테면 내 복제품의 인생이 될 텐데.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삶, 어떤 세상을 보여줄까,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평전을 많이 읽는다. 드라마틱하고, 실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 된다.”

신주쿠 광장에서 매맞고 돈버는 남자 하레루야 아키라와 소년 교도소 출신의 헤비급 복서였던 서철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된 <주먹이 운다>는 20대의 상환과 40대의 태식, 두 사람의 인생 이야기다. 90년대 한국 복싱의 유망주였던 태식.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에 그치고, 은퇴 뒤 사업을 하지만 빚만 지고 패퇴한다. 이혼까지 당하고, 거리의 행인에게 돈을 받고 주먹을 맞아주는 일을 하던 태식은, 마지막 도전을 시작한다. 15년 만에 프로복싱에 도전하는 것이다. 상환은 폭행치사혐의로 들어간 소년원에서 권투를 배운다.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언제나 상환을 보살펴주었던 할머니가 쓰러진 뒤 상환은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첫걸음이 신인왕전이다. <주먹이 운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편집으로, 라운드처럼 나누어 보여주다가 마지막 결승전에서 만난 상환과 태식의 대결로 막을 내린다. 더이상 물러서고 말고 할 것도 없는, 20대와 40대의 마지막 한판승부로.

태식과 상환은 교차편집으로, 클라이맥스까지 단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 그들의 인연보다도 그들의 인생이 더욱 중요하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주먹이 운다>의 핵심이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거리에서, 핸드헬드로, 그들의 감정을 잡아낸다. <주먹이 운다>가 자신의 이전 영화들과는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류승완 감독은,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가 대화하는 장면을 예로 든다. 별다른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장면도 아니다. 하지만 거장의 아무것도 아닌 숏에서는 뭔가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히치콕의 영화들도 그렇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테크닉을 먼저 쓰고 감정을 채운 게 아닌가’란 반성을 했다.

“그동안 내 영화들에는, 전체적인 정서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있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악몽장면이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 쫓아가는 장면 같은 것들은, 호러영화처럼 찍었다. 그때는 그런 장면들을, 정말 찍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가 요구하는 방향과 자신의 취향이 어긋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감정이란 게 따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숏이 요구하는 감정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먹이 운다>는 인물, 아니 사람에게 집중한다. 20대인 상환에게는 류승완 감독 자신의 경험들이 녹아 있다. 하지만 40대인 태식은, 아직 그가 살아보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최민식에게 자유롭게 연기하라고 부탁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가 느끼는 대로 태식이란 인물로 살아가라고. 그러면 류승완 감독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편하게’.

“나는 미완성의 감독, 계속 탐색할 것이다”

사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류승완 감독에게 약간 상처를 입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 만든 영화였지만, 평단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근거있는 불만도 있다. “왜 <와호장룡>하고 비교를 하나. 내가 <와호장룡>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으면, 굳이 뒤에 장풍대작전이란 말을 붙였겠나.” “내가 아닌 다른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만들었다면, 그런 말을 들었을까.” 그건 선입견 혹은 편견에 대한 불만이다. 어느덧 고정화된 ‘류승완 스타일’이란 말에 반발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우연찮은 발견 그리고 성공은 ‘류승완’을 하나의 브랜드처럼 각인시켰다. 장르의 인용, 조합, 놀이로서의 영화 같은 것들. “나에게는 과잉의 정서가 있다. 영화에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그의 영화를 보고 받아들일 때 과잉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류승완 감독은 “나는 완성형 연출가가 아니다. 지금도 탐색 중”이라고 말한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결투장면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말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을, 내가 만든다.” 그게 영화광 감독의 한 가지 특징이다. 그런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방향 선회의 계기는 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이후에 장르가 있는 것 아닌가. 선후가 바뀌었던 것은 아닌가. 흉내내고 싶었던 건 아닌가, 란 생각을 많이 했다.” 너무 한쪽 방향으로만 갔다고 느꼈고, 진지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장르 바깥으로 나가 <주먹이 운다>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감정을 따라가고, 사람을 따라가고, 그들의 작은 흔들림과 부대낌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 그래서 <주먹이 운다>는 아마도 ‘데뷔작과 가장 가까운 영화가 될 것 같다’. 한참 촬영 중인 영화를 미리 평가할 수는 없지만, <주먹이 운다>는 지금까지의 류승완 영화와는 조금 다른 색깔을 보일 것 같다. 감각적 즐거움 이전에, 가슴이 먼저 느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류승완의 영화는, 이제 하나의 이정표를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통칭되는 ‘류승완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대략의 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공술로 빌딩 위를 날아다니듯이, 미래의 류승완이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는 일관성이 없게 갈 거다. 가짜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찍고 싶다.” 류승완은 즐거운 영화를 좋아한다. “사실 지금까지 영화의 예술적인 어떤 것에 약간 시큰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분명히 예술적인 측면이 있다. 다만 그게 유럽 작가들, 허우샤오시엔, 왕가위 같은 감독만이 아니다. 주성치의 <소림축구>도 예술적인 면이 있다… 위대한 상업영화는, 관객이 요구하게 만들고,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나 돈 시겔의 <알카트라즈 탈출>이 <쇼생크 탈출>보다 훌륭하다. 단적으로 몰입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주커 형제, 주성치,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가 존 포드에게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나 역시 일관된 패턴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주먹이 운다>에서는 약간 다른 지점에 찍혀 있다. 전자가 테크닉이라면, 이번에는 마음 혹은 감정이다. 찍는 마음가짐도 조금 다르다. 힘들게 하지 않고, 친구의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편하게 찍고 카메라에 담는다. 어쩐지 광고에서 노래를 부르던 최민식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래를 부르는 최민식이, 고개를 숙인 우리의 어깨를 잡고 있다. 그렇게 마음이 전해지는 것처럼, <주먹이 운다>는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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