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테크닉이 아니라 감정에 집중한다”
11월24일 오후 3시, 분당 서현역 앞 옥외주차장 5층.오늘 촬영분이라며 받은, 달랑 3쪽짜리 <주먹이 운다>의 시나리오에는, 시간배경이 분명 밤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다.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해 터벅터벅 5층까지 걸어 올라가니,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30여명의 촬영진이 한참 열을 올리고 있다. 가죽점퍼를 입은 최민식이 누군가를 때리고 있다. 두대의 헨드헬드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이며, 그 모습을 찍고 있다. 태식(최민식)의 후배이며 한때 같은 체급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용대. 43살의 태식은 거리에서 매를 맞아가며 돈을 벌고, 마지막 승부라 생각하며 뒤늦게 프로 신인왕전에 뛰어들었다. 반면 용대는 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건달이다. 졸개들을 거느리고 건들거리던 용대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태식의 주먹에 맞고 쓰러진다. 그런데 이미 받은 시나리오에서는, 이 장면이 용대가 태식을 때리는 것이었다. 이미 바뀌어버린 시나리오. 잘못 받은 걸까 아니면 현장에서 모든 것을 바꾸어버리는 연출 스타일로 바뀌어버린 것일까.
“거리의 영화지만, 편안하게 찍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현장을 찾은 것은 <주먹이 운다>가 처음이다. 류승완 감독의 현장은 꽤 소란스럽다고 들었다. 감독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소문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지독하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끝을 보는 성격.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찾아간 <주먹이 운다>의 현장은 그러나,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한컷을 찍기 위해 배우, 스탭들과 이야기를 나눈 류승완 감독은 느긋하게 모니터 앞으로 돌아온다. 두대의 핸드헬드가 잡아낸 장면들을 함께 보고는 다시 이야기를 하고, 많아야 3, 4테이크로 끝난다. 배우와 스탭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서, 자신들이 가야 할 위치를 잡고 있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면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던, 천하의 임권택 감독과도 맞설 수 있었던 배우 최민식은 정말 태식이 되어버린 듯, 인생을 달관한 듯한 여유로움으로 현장에 서 있었다. 류승완과 최민식은 웃으면서 ‘편하게’ 영화를 찍고 있었다.
류승완 감독은 ‘힘든 건 하지 않는다’가 <주먹이 운다>의 촬영 원칙이라고 말한다. 자칭 ‘거리의 영화’라고 말하는 <주먹이 운다>의 촬영이 ‘힘들지 않다’는 것이 가능할까? 거리에서 영화를 찍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을지로의 지하도로 촬영을 나갔을 때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의 노숙자들이 병을 깨면서, 너희들이 우리 심정을 알아, 라며 시비를 걸기도 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거리의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체력’이 필요하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주먹이 운다>를 찍기 위해서도 용기와 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힘듦 말고는 모든 것이 편해졌다. 촬영 일정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잘하면 예정보다도 적은 회차로 촬영을 끝낼지도 모른다고 한다.
“배우에게 맡긴다. 그들이 가장 잘 안다”
거리의 영화란 ‘멋부리지 않기, 진짜의 느낌’을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은 작품들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장면이 있었고, 그 장면들을 찍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발악을 하며 만들어왔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많은 부분을 배우에게 맡긴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배우들에게 뽑아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렉션을 일일이 주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거기에서 퍼져나가는 식으로 연출을 한다. 과거에는 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 먼저 콘티를 그리고, 프레임 안의 어디에 어떻게 배우를 세우고 움직이는지를 완벽하게 맞춰야만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다르다. “나는 몰입에서 빠져나오고, 연기자와 스탭은 몰입한다. 테이크가 세번 정도 넘으면 좋은 감정이 안 나온다. 그전에 몰입 상태에서, 빠르게 찍는다.”
두 배우의 인생과 충돌이 관건인 <주먹이 운다>에서는, 배우들이 몰입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민식과 류승범은 그런 몰입이 가능한 배우다. “그들은 영화를 찍기 위해, 진짜로 그 인물이 되어 살아간다. 그러니까 일관성 따위는 생각하지 말자. 상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태식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란 생각은 집어치우자. 그의 성격을 생각하고, 그걸 상황에 대입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늘 다르다. 친구를 만날 때 달라지고, 라이벌을 만날 때 또 달라진다. 그러니까 배우에게 맡긴다. 그들이 극중인물로 살아가는 거니까,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용대가 태식에게 맞고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이 장면에서 태식과 용대는 과거 전성기의 시합을 연상시키는 멋진 스파링을 벌이고 있었다. 태식이 신인왕전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그걸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용대.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나이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민식도, 정두홍 무술감독도 그건 어색하다고 말했다. 용대의 주먹을 태식이 피하는 것으로 해볼까, 용대에게 흠씬 두들겨맞는 것으로 해볼까. 그러면서 두어번 설정이 바뀌었다. 마침내 최민식이 말했다. “내가 때리고 싶어.” 용대 그 인간이 정말 기분나빠서, 자신이 못 참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정답이 되었다. 이 장면은 태식이 용대를 두들겨패는 것으로, 주먹으로 쥐어박는 것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실제의 삶으로 느껴지고, 연기자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이 <주먹이 운다>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