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 설 특별 프로그램 [5] - 만화
2005-02-04
한국 순정만화 되돌아보기 - 탄생에서 하나의 사이클을 완결하기까지 그 20년의 역사

1979년 소개된 <캔디캔디>와 그 애니메이션의 열풍에 힘입어 한국 순정만화의 독자층과 그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리고 뒤이어 <베르사이유의 장미> <유리가면> 등의 해적판이 소녀들의 손아귀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맛을 본 소녀들은 더 많이 읽기를 원했고, 그 틈을 타고 해적판 및 일본소녀만화의 번안물이 그녀들의 손에 쥐어졌다. 80년대 ‘순정만화’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최초로 전유한 자신들만의 욕망을 위한 매체이자 장르, 혹은 욕망의 구조물이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순정만화는 어디쯤 있을까?

(Caution: 여기에서 제공하는 순정만화의 다이제스트는 몇몇 대형 히트작들을 완전 무시하는 등 편향된 시각과 무례한 요약, 일방적인 오독으로 가득 차 있음)

80년대 - 최초의 순정세대, 그리고 최초의 ‘여성’ 세대

80년대 중반, ‘온전한 자신의 창작 이야기’로 데뷔한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창작순정물의 시대가 본격화된다. 이 작가들의 이름은 김혜린, 김진, 신일숙, 강경옥 등이다. 그렇게 일본 소녀만화와 독립된 한국 순정만화가 본궤도에 오르는 것이다.

이때 순정만화 소비자들이었던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80년대 초·중반에 이런 만화들을 읽고 자란 소녀들이 지금의 30대 초·중반이다. 당시의 소녀들은 한국에서 ‘대량으로 직장여성이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 동시에 이들은 ‘엄마로서 소비하기’, ‘주부로서 소비하기’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가지고 떳떳하게 소비하고 행동하기를 막 처음 시작한 세대였다. 그녀들이 대학에 들어갔던 시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 세대들은 ‘엄마와는 다르게 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이 새로운 여성들을 만족시켜줄 문화상품은 당연하게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소녀만화가 그들의 욕망의 대리물이 되었다. 이 작품들의 도래는 잠재된 수요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빅뱅.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순정만화’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최초로 전유한 자신들만의 욕망을 위한 매체이자 장르, 혹은 욕망의 구조물이 되었다. ‘순정만화’는 사회진출을 시작하는 여성들과 기대와 불안, 그리고 욕망의 행보와 함께 맥동하고 있었다. 진취적인 소녀들은 선행자 없는 자신의 불안한 욕망을 어떤 식으로든 자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나이가 들고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 순정만화라는 장르도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에서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그야말로 신이 독자와 함께 성장해나가면서 ‘여성만화’로서의 역할까지 포용해나가는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보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나서 순정만화는 다시 ‘소녀만화’로서의 속성으로 회귀하게 되지만. 좌우간 그 대목 중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내 맘대로).

혁명순정물 대가 김혜린, 천재 김진의 대가족 잔혹사

김혜린은 83년 <북해의 별>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으로 순정물 고유의 로맨스와 현실 사회변혁의 열정이 뒤섞인 경계에서 양쪽 다를 잡아내며 자신만의 사회파 순정물을 이끌어냈다. <북해의 별>을 당시의 운동권 학생들이 돌려 읽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한참 정국이 시끌시끌하던 88년에 ‘르네상스’에 연재한 <테르미도르>와 그 차기작인 <비천무>는 김혜린 미학의 완성이었다. <비천무>의 작화와 시가(詩歌)의 인용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인물들이 관통하는 사회적 현실과 비참함은 한국의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미리 말해두지만 영화와는 내용이 크게 다르다). 80년대 후반, 그 시기에 못사는 사람들의 혁명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었다.

김혜린이 대가라면 김진은 천재였을 것이다. 대하판타지이든 소박한 가족물에서든 김진은 한국형 대가족 내부에 존재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균열과 파멸을 노래했다. 그의 만화에서 아버지는 폭력적인 가부장이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와 반목하고 가족들은 그 사이에서 공포와 증오, 자폐적인 심리를 담은 눈으로 이를 목격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살육과 몰락이 펼쳐지고 절대로 그 폭력을 멈추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광증이다. 게임화가 되기도 한 <바람의 나라>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신들의 황혼>)나 이탈리아 갱단(<밀라노… 11월>)에서부터 고구려 상고사(<바람의 나라>)까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러한 주제의식을 변주하고 펼쳐내었다. 최근 <밀라노… 11월>이 재간되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절판이 되기 전에 구할 것.

대화하는 강경옥, 한국 야오이의 선구자 이정애

강경옥이 86년 <이 카드입니까>으로 데뷔한다. 강경옥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넌 왜 나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또 나를 싫어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그리고 납득하는 것이다. 강경옥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90년에 완결된 SF판타지인 <별빛 속에>이다.

강경옥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강경옥의 어두운 점과 밝은 점을 모두 아우른다. 어두운 점이라면 영화화가 거론되기도 한 <두 사람이다>와 같은 최근의 공포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항상 독백하고 생각하며 ‘내면의 필터‘를 거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강경옥의 인물들은 90년대의 순정만화의 경향을 미리 예시한 셈이었다.

86년에 데뷔한 이정애의 작품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학과 신학 등 현학을 내세우며 신과 인간이 반반씩 결합된 반신반인이다. 그들의 정념은 종교적 순수와 지식욕과 동일시된 플라토닉 러브의 변종이다. 지금과 같은 의미에서의 본격 야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정애를 한국 야오이물의 선구자라고 평하는 것은 무리없는 일일 터이다.

94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이정애의 대표작 <열왕대전기>로부터 이러한 면모를 본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물로 시작해서 구세주와 적 그리스도의 대결을 그린 이 종말론적인 작품은 명실공히 컬트의 반열에 오르며 확고한 지지층을 결집하게 되었다. 이정애의 또 다른 걸작인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경우 심의의 제재에 의해 몇 장면이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 순정만화가 예술적으로 커나가는 방향에서 기존 만화에 대한 인식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쉽지 않은 소재를 자신만의 개성과 주제의식으로 완성도 있게 풀어나간 뛰어난 작가였다.

90년대 -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작가들의 등장


드디어 90년대가 되면 순정만화는 이미 확고8한 자리를 잡게 된다. 순정만화의 독자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통신공간을 통해 순정만화의 작가론 등 담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서 가장 큰 변화는 대하서사물의 맥이 끊긴 것이다. 물론 김혜린 등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많은 작품들이 90년대에 새로 출발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 새로 데뷔한 작가들 중에 대하서사를 그리는 작가는 없었다.

이때 데뷔한 70년대생 작가들의 특성은 강경옥이 예시했던 경향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문화적 트렌드나 쿨한 감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의 작품들이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운명적으로 지배당하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면 이젠 일상의 사건에 대한 내면의 독백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나예리, 박희정, 이강주, 이진경, 한혜연, 문흥미 등의 데뷔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90년대 후반에 잡지 <나인>(Nine)이 등장하며 ‘여성만화’를 표방했다. 이 잡지에는 작품성 위주의 수준 높은 선별이 이루어졌고 굵직한 신인들이 비평적으로도 뛰어난 수작을 내어놓으며 ‘제2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졌지만 결국 2000년으로 넘어가서는 버티지 못하고 만다. 비평적 성취는 높았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서 순정만화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연결된 하나의 사이클을 종결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경향을 예로 들어보자.

페미니즘과 지적 경향성의 공유

90년대의 대학의 지적 경향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경향성이다. 80년대 작가들의 작업에 현학적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정애- 차이가 있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의 문화적 코드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한 여성 세대이며 강한 페미니즘적 경향성과 지적 경향성, 그리고 문화적 차별성을 지녔다. 달리 말하면 여성으로서의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논리적이고 성찰적이며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교육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으며 오히려 무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의 작가로서 90년대 초반과 중반, 후반에 걸쳐 순차적으로 데뷔한 이진경, 유시진, 권교정을 들 수 있다. 가장 처음 데뷔한 이진경인데 잡지 <나인>에 <사춘기>를 연재하자마자 걸작의 칭호를 얻는다. 아직 학생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90년대 초 대학의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한 <사춘기>는 페미닌하면서 고급했고, 퀴어적인 성향, 미술학도로서의 아트한 성향, 지식인적 성향을 고루 가지고 있었다. 1권에서 “남자 선배의 탈을 쓴 마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거리하는 장면은 인구에 회자되던 명장면이었다.

뒤이어 유시진이 90년대 중반 <마니>로 자신의 지분을 선언하고 <쿨핫>으로 그것을 굳건히 한 뒤 <폐쇄자>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유시진은 폐쇄적인 자아의 심상판타지를 추구한다는 면과 가부장제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진의 후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김진이 아들의 캐릭터를 통해서 가부장제를 관철한다면 유시진은 그 딸의 시각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집착과 속박을 표현한다. 이 경우 가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아버지와 그 저주받은 가부장적 후계로서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이 있다. 적어도 <쿨핫>의 살부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주인공 김동경의 눈동자는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이 경향의 마지막 주자 권교정이 90년대 후반 <헬무트> 등을 위시해서 자신만의 울림을 가진 장르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권교정의 특징은 능숙하게 “장르의 핵심요소”를 분해-재결합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된 장르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셋 중 가장 유희적인 성격이 짙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러한 ‘각색‘을 통해서 장르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좀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좀더 생각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권교정의 가치다. 예를 들어 <헬무트>의 유명한 대목 중 하나- 영주의 딸이 지나가는데 하인 소녀가 피부가 곱다고 감탄하자, “너도 나처럼 밭일 한번 안 하고 실내에만 있고 가꿀 시간이 있으면 네 피부도 나만큼은 곱겠지”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현대적인 시각으로 중세물 장르를 바라본 것이다).

일상성과 환상성을 결합하는 흐름

이와는 다른 축으로 잡지 <나인>을 통해 데뷔한 몇몇 작가들을 더 언급할 수 있다. 이것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순정만화의 고급화의 흐름 중 일부로서 일상성과 환상성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전에도 활약하던 이강주가 <캥거루를 위하여>로 자신의 작품 활동에 한획을 그었다. 이 작품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내 얼굴이 캥거루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카프카와 하루키가 뒤범벅된 발상으로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잡지에서 이향우가 1권짜리 <우주인>으로 여성 백수의 이야기를 큐티한 캐릭터와 세련된 에피소드로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우주인이다, 이곳에서는 나를 일컬어 백수라고 한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우주인>은 이강주와 함께 잡지 <나인>에서 일상성과 그 일상에 대한 이질감에서 출발한 환상성의 결합을 추구하는 흐름을 이루었다. 2도 채색으로 인쇄되었던 이 만화는 선물용으로 적합하리만큼 충분한 팬시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반 만화와 다른 마케팅과 홍보가 뒷받침되었다면 다른 지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상성과 환상성, 그리고 그로테스크함을 추구했던 이애림의 <Short Story>가 준 충격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이애림의 체모에 대한 강박적인 묘사와 일그러진 우화의 전개는 강한 인상으로 다가갔다. 이러한 인디적인 흐름은 최인선 등의 ‘예쁘지 않은 스타일’과 결합하여 하나의 작은 흐름을 형성하였고 실제 인디만화의 흐름과 결합하기도 했다.

2000년대 - 하나의 사이클을 종결한 ‘순정만화’

2000년대의 흐름은 어떨까? 순정만화가 ‘사회 진출을 시작한 여성’들이 가지는 일단의 정체성과 결별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현재의 순정만화는 좀더 당연하게 유희적이며, 야심보다는 소녀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한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이전의 순정만화가 ‘여성만화’로서의 진지한 흐름과 ‘순정만화’로서의 장식성과 유희적인 흐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면 이 두 가지는 사실 분화되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흐름이 더욱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사실 80년대의 몇몇 작품은 그 내용의 진지함과 무거움이 도저히 소녀가 볼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의 구체상황이 연표와 함께 낱낱이 등장하며 그것이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테르미도르>와 같은 것이 그렇다. 역할모델로서의 성인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이들 세대의 특성상 이때부터 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순정만화’는 ‘여성만화’로서의 속성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내용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진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성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즐길 수 있는 문화상품은 만화만이 아니며 지금 소녀들이 이러한 절박함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리하여 순정만화는 10대들의 만화로 자신의 역할을 다시 확실히 한 셈이다.

20, 30대를 위한 ‘여성만화’는 이와 따로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20대 여성들의 직장생활과 섹스, 삶을 만화장르로서 수용하는 일본의 레이디스 코믹스(Lady’s Comics)와 같은 흐름이 한국에도 등장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결국 ‘순정만화’라는 이름은 이제 ‘여성들이 보는 만화’를 총칭하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여성만화’를 표방한 잡지 <나인>의 폐간 이후 성인 여성잡지를 표방한 <오후>(Owho)의 창간(2003), 그리고 25∼30살 여성을 타깃으로 했음을 천명한 <허브>(Herb)의 창간(2004)이 이러한 변화한 지형도를 대변하고 있다. 창간 1년 뒤 폐간된 <오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경직, 축소된 만화시장이 그걸 녹록하지 않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더구나 30대에 만화를 읽는다는 게 어디 한국에서 평범한 일이겠는가? 선보는데 다음과 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어디 많을까?

남자: 취미가 뭔가요?

여자: 만화 보는 거요.

깜악귀/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