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 애니메이션 DVD 특집 (1) - 국내 시장 점검
2005-03-22
글 : 한청남
지난 2002년, <카우보이 비밥>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사이버 포뮬러> 등 인기작들이 대거 출시되면서 DVD 시장의 한 축을 이루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DVD. 초기 시장에서 보였던 폭발적인 수요로 인해 여러 제작사들이 참여하면서 다양한 작품들이 선을 보였고, 마니아들을 사로잡기 위한 품질 경쟁도 치열했다. 하지만 경기불황과 제작사들의 무분별한 할인으로 인해 팬들의 관심도가 낮아지면서, 2003년 하반기부터 침체되기 시작했다. 제작사나 소비자나 모두 힘들었던 2004년을 지나 올해 역시 전망은 불투명하지만, 다행히도 시장에 활력소가 될 여러 화제작들이 출시를 앞두고 있다. 그들의 선전을 응원해주기에 앞서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DVD 시장의 문제점을 짚어 보고, 애니메이션 마니아와 제작사 측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2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대부분의 일본 문화가 개방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일본산 애니메이션이다. 과거에 비해 여러 가지 제약들이 사라졌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작품의 흥행 성공으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경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현재 아동용을 제외한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성인 취향의 작품들은 개방에서 제외된 상태다. 지금의 독도 문제처럼 일본과의 정치적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면 국민정서로 인해 당분간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또한 공중파 TV에서는 국산 애니메이션 육성을 목적으로 한 애니메이션 쿼터제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케이블 TV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기는 하나 최신 화제작들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 가운데 80년대 말부터 불법적인 유통 경로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 팬 층은 2000년대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급속도로 늘어나, 현재는 관련 인터넷 관련 커뮤니티마다 수만에 달하는 회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시장 규모로 여겨지지만 그들 대부분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즐긴다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점이다. 일본이나 미국이 TV 방영으로 얻은 인기를 기반으로 DVD 판매가 이루어진다면, 국내에서는 불법 영상물로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작품을 팔아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극영화들도 불법 복제물에 의해 손해를 입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경제력이 풍부하지 않은 청소년들이 주 팬 층이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상적인 유통을 방해하는 정부의 규제 탓에 불법 동영상을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시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원인 것은 분명하다.

동호회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이 좋지 않았던 <후르츠 바스켓>
물론 정품을 선호하는 팬들도 존재하지만 초기에 2~3천 세트 이상씩 구매를 해주었던 그들이 경기 불황 속에 지갑을 닫으면서, 현재는 TV 시리즈의 경우 보통 천 세트 정도를 최대 판매량으로 생각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이다. 천 세트 정도의 판매량이면 타이틀의 순 제작비를 회수하는 정도에 불과한데, 초기 시장의 판매치를 보고 투자를 했던 제작사들로서는 자금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특히 국내에서 인기를 끌 만한 작품은 한정된 가운데 여러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판권 확보에 열을 올리다 보니 판권료는 올라갈 대로 올라간 상황. 제작사들로서는 일본에 지불할 판권료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자금력을 갖춘 일부 제작사를 제외하고는 타이틀을 헐값에 할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미 시장에서 외면 받은 타이틀을 다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할인율로는 어림없다. 처음 몇몇 타이틀에 한해 소폭으로 할인했던 것이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반값 할인, 80% 할인 등으로 풀리면서 소비자들을 경악케 했다. 게다가 소량 한정으로 생산했던 한정판 타이틀조차 덤핑으로 풀리자, 프리오더에 맞춰 꾸준히 구매해오던 마니아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지금은 웬만큼 저가로 출시되지 않는 한 할인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다. 당장 할인이라도 해서 적자를 만회해 보겠다는 제작사들과 할인을 기다리는 소비자들 간의 악순환으로 인해, 결국 애니메이션 DVD 사업을 접는 곳들이 늘어났다.

또한 DVD 유저들 중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들이 바로 애니메이션 DVD 마니아들이다. 소장성을 중시해 사소한 흠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본판 DVD에 비해 국내판 DVD의 마무리가 소홀한 점을 지적하는데, 시장이 큰 만큼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일본판에 비해 수작업으로 마무리하는 국내판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때그때 일정에 맞춰 서둘러 제작하는 국내 관행 상 오류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출시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인쇄 미스에서부터 자막 오타 등의 문제는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무결점의 타이틀을 원하는 팬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게다가 지난해 한 프레싱 업체의 실수로 발생한 디스크 재생 이상 문제는 국내 타이틀의 신뢰도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소비자들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제작사들의 노력도 인정해줘야겠지만,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해 팬들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향상된 화질과 음질로 화제를 모았던 <에반게리온 리뉴얼>
제작사 측에서는 기껏해야 천 세트 가량이 판매되는 것이 현실인 국내 시장에서 더 이상 낼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카우보이 비밥> <공각기동대> 등 이미 히트작들이 쏟아져 나온 가운데 팔릴만한 타이틀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남아있는 것들 가운데서도 저작권 문제로 인해 국내 업체가 손을 댈 수 없다거나, 혹은 판권료가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에 출시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게다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인기를 끌었던 최신작일수록 국내에 출시되었을 때 오히려 안 팔리는 예가 많다. 그만큼 해당 불법 동영상이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초기에 소비자들이 반길만한 화제작들로 인해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되었지만, 후속타가 꾸준히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DVD 시장을 보면 과거의 PC 게임 시장을 연상케 한다. 많게는 10만장 씩로 팔릴 정도로 활성화 되었던 PC 게임 시장이었지만 불법복제로 돌아선 게임팬들로 인해 제작사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실시한 잡지 번들 제공과 할인 정책은 마니아들의 원성을 샀고, 결국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철수한 지금은 정식 출시되는 게임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DVD 시장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불법 영상물에 대한 정부의 단속 의지가 희박한 한 가운데 팬들의 인식 개선이 없다면 국내 애니메이션 DVD 시장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제작사들 역시 좀 더 장기적인 안목과 투자로 시장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지지해주던 소비자들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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