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본 애니메이션 DVD 특집 (2) - 애니메이션 마니아에게 들어본다
2005-03-22
글 : 한청남
왜 애니메이션 팬들이 DVD를 외면하고 있는지, 전 나우누리 애니메이션 동호회 앙끄(ANC)의 운영진이었던 박창선 씨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는 현재 DVD 업계에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애니메이션 DVD 관련글을 기고하고 있다.

나우누리 앙끄의 전 운영진으로서 과거 PC 통신 동호회의 상황에 대해 얘기해 달라.

PC 통신 동호회들이 한창 잘 나갈 무렵엔 오프라인 모임이 활발했다. 주로 상영회가 중심이었는데, 당시엔 자막이 들어있는 영상을 보려면 상영회에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당시 활동하던 운영진들이 대부분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자막 작업이 어렵진 않았다. 그렇게 준비한 작품으로 상영회를 열면 회원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곤 했다. 초기에는 나우누리 사랑방이라는 오프라인 모임 전용 공간에서 소규모로 상영회를 하다가 나중에 명동에 애니메이션 센터가 생기면서 그쪽을 주로 이용했다. 대관료는 나우누리에서도 앙끄가 규모가 큰 동호회에 속했기 때문에 지원금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극장식 설비를 갖춘 그곳의 수용인원은 200명 정도였는데, 당시 화제작이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상영 시에는 좌석뿐만 아니라 복도까지 꽉 차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상영회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뒤풀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정말 백미였다. 저녁 식사 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는 그야말로 난상토론이 벌어지는데, 알찬 내용이 많이 오고 갔다. 나중에 그런 내용들이 게시판에 차곡차곡 올라왔는데 그것 역시 동호회의 재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집에서 마음대로 좋아하는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게다가 블로그 등 사용하기 편리한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 파란 화면에 하얀 글자가 나오는 VT모드 PC 통신 동호회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모든 기능을 쓸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달리 PC 통신은 명령어를 하나하나 입력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오프라인 모임이나 상영회를 하면 수백 명이 모이던 멋진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당시 애니메이션을 접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했나?

우선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던 매체는 당연히 불법 복제 비디오 테이프였다. 보통 집집마다 VTR이 한 대씩은 있었으니까. 흔히들 알고 있는 용산이나 청계천보다는 남대문 지하상가 쪽에서 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몇몇 가게에서 아주 전문적으로 LD 영상을 카피한 비디오테이프를 팔았다. 가격이 테이프 당 8,000원 정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가급적 상영시간이 긴 극장판이나 OVA 시리즈를 한 번에 복사하곤 했다. 불법이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가장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소프트를 접할 수 있는 최상의 루트였다. 문제는 자막이 전혀 없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초창기 애니메이션 팬들은 스스로 일본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웃음). 그러던 것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LD 구입에 욕심이 생겼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거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지금의 DVD보다 LD가 훨씬 무거웠기 때문에 운송료를 많이 물어야했지만, 구입했을 때의 뿌듯함은 예전이 더 나았던 것 같다.

과거의 PC 통신 동호회 대신 지금은 자료 공유를 위주로 하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많아졌다.

마침 그렇게 넘어가는 시기에 군대를 갔는데, 제대하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있더라. 초고속 인터넷이 집집마다 보급이 되는 바람에 옛날엔 상상도 못했던 속도로 자료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자료 공유 위주로 커뮤니티가 활성화 된 것 같다. 공짜의 매력은 누구도 무시 못 하니까. 한달에 일정 요금만 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인터넷 앞에서 모두들 굴복한 셈이다. 결국 오프라인 모임과 상영회 위주로 돌아가던 동호회들이 서서히 자료실로 먹고 사는 암울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양질의 글이 많이 올라오던 감상 게시판이 서서히 잡담으로 파묻히고 모두들 자료실에만 매달려 있는 상황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료실 용량과 회원수가 비례할 정도였다. 아마도 사람들의 욕구가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한꺼번에 폭발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열성적인 아마추어 번역가들에 의해 자막까지 척척 올라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작품에 빠져서 일본어 공부까지 하던 시절은 이제는 옛날 일 같다.

박창선 씨의 소장품 중에서

Q 한 때, 각 동호회들에서는 공구 등의 방식을 통해 정품 DVD를 상당수 구매해주곤 했다. 요즘 그것이 줄어든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일단 업체들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다. 초기 애니메이션 DVD가 잘 팔렸던 이유는 타이틀 수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팬들은 가끔씩 발매되는 타이틀에 돈을 쓸 여유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여러 업체에서 한꺼번에 많은 작품들을 DVD로 쏟아내면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업체들은 이 시장을 너무 크게 봤다. 보통 인터넷 동호회를 보면 회원수가 6~7만 명 정도 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정품 DVD를 착실히 구매해서 보는 사람은 1,000명 정도나 될까 싶다. 그 이유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연령이 대체로 낮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1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이 이제 겨우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이기 때문에, 국내 발매되는 타이틀들을 다 구매할 만큼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상황이 더 악화된 셈이다. 취미삼아 한두 장씩 사던 사람들이 DVD에서 손을 뗀 거다. 당장 용돈이 줄어들고 차비도 아껴야 하는 마당에 DVD 구입은 사치로 여겨질 테니까.

관련 캐릭터 상품이 잘 팔려나가고 코스프레 문화도 활성화 되는 마당에 정작 DVD는 너무 안 팔리는 것 같다.

사실 캐릭터 상품이나 코스프레 문화는 DVD와 별로 관계가 없다. 그만큼 즐기는 사람들이 다르다. 캐릭터 상품 판매나 코스프레의 경우는 여성이 주도하고 있는데, 그들은 DVD라는 매체에 별로 친숙하지 못하다. 대체로 연령층이 어리기 때문에 다운받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또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팬들은 일본과 달리 각 분야 별로 나뉘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한쪽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지 관련된 다른 분야에까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DVD는 즐겨보지만 코스프레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는 편이다.

자료 공유는 활발한데 비해 애니메이션 문화 자체는 과거 PC 통신 시절보다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팬들이 지향해야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진정한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돈 주고 사서 보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두가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입장이 아니니까 강요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인기작들 위주로 편중된 장르의 작품만 발매하는 제작사들한테도 일부 책임이 있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정말로 만화를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을 사랑한다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우선 빌려서라도 보고 진짜 괜찮다 싶으면 사서 보도록 하자. 자기 돈을 주고 사서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기분 차이는 상당하니까. 특히 애니메이션 DVD는 불법 동영상과 비교해서 화질, 음질은 물론이거니와 깔끔한 패키지에 감탄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이나마 사서 보는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는 필요하다고 본다. 일본 역시 제작사의 노력과 함께 그러한 팬들의 사랑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팬들이 시장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