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4] - 영페미니스트 추천작
2005-04-07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흔들리는 섹슈얼리티, 10대 소녀들의 상처와 희망
<아찔한 십대>

파티와 남자친구에 둘러싸인 할리우드의 명랑한 십대 소녀들, 획일적인 교복 문화 속에서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한국영화 속의 소녀들 대부분은 부유한 이성애자들이었다. 20대의 문턱에 선 그녀들의 언어와 행동은 어른의 세계가 정해준 동일한 틀 안에서 잠시 흔들리다 결국 안정적인 깨달음과 함께 기성세대에 들어서곤 했다. 현실 속 소녀들은 순정만화와 첫사랑에 열병을 앓기보다는 사랑을 하고, 성을 말하고, 임신을 하고, 독립을 말함에도 영화 속 소녀들은 겉모습만 화려해질 뿐,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녀들은 점점 비대해지는 외연과 점점 비어가는 내면의 불균형 속에서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제7회 여성영화제 영 페미니스트 포럼 섹션에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기를 들고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각국의 영화들 11편을 선보인다. 기존의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를 사고하는 우울한 소녀들, 가난하고 여자를 사랑하고 소통을 갈망하고 끝나지 않는 고민을 짊어진 현실의 소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고정되지 않은 성적 정체성과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두근거림, 불안, 슬픔이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도발적으로 묻어나고 있다. 케이트 숏랜드의 장편 데뷔작인 <아찔한 십대>는 성숙한 욕망을 지닌 소녀가 그 욕망을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방황의 여정을 그린 영화이다. 집을 떠난 소녀가 푸른빛의 낯선 세계에 다가서는 과정은 세련되고 시적인 영상으로 전해진다. 뿌리없이 방랑하는 가난한 소녀와 그녀가 새로운 공간, 관계들과 소통해가는 과정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호주영화협회 영화제의 전 부문을 휩쓴 바 있는 이 영화는 소녀의 독립과 생존의 문제를 성적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너를 사랑해?>

리사 고닉의 <너를 사랑해?>는 “나는 왜 레즈비언일까?”, “레즈비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사랑과 성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흥미롭게 펼치는 영화이다. 감독이 연기한 주인공 로미는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질문하고 분석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고,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관계들 안에서 사랑을 사고하는 젊은 여성들. 영화는 급진적인 성 정치학에 관계와 소통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깔아놓으며 지극히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지극히 사사로운 일상의 이야기들과 만나게 한다. 자신의 몸과 내면의 소리에 촉각을 세우고 관계에 안착하지 않는 이 여성들의 멈추지 않는 고민에는 생명력이 있다.

한편, 줄리 애커렛과 크리스티안 맥이원의 <톰보이: 쾌걸유혼>은 역사 속 말괄량이들의 존재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이 다큐는 정치 활동가부터 권투선수까지 고정된 여성성을 벗어나 몸을 움직이는 데서 생의 활력을 맛보는 이 시대 톰보이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이들은 더이상 섹스와 사랑과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다. 영화 중간중간에 여신 같은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하며 ‘톰보이’를 ‘저항가’로 고쳐 부르는 여성학자, 캐롤 길리건은 말한다.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몸의 소리를 들어라. 홀로 고립되지 말라.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라.” 그녀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영화 속 여성들의 단단한 육체만으로도 <톰보이: 쾌걸유혼>은 훌륭한 여성학 교재가 된다.

<소녀블루스>

이외에도 레즈비언 소녀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편견에 휩싸인 외적 세계와 소통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담은 다큐, 세실리아 낭트-포크의 <걱정마, 잘 될거야>나 소심한 사춘기 소녀가 사랑에 빠져 어른의 세계와 충돌하면서 세상을 향해 발언을 시작하는 드라마, 안나 뤼프의 <소녀블루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11편의 영화들은 스스로 10대의 아픔을 통과한 감독들 자신의 과거이자, 현재 진행형인 상처와 희망의 이야기들이다.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서 이야기들 각각은 뚜렷한 수준차를 보이지만, 기존의 영화 속 십대 소녀들의 닳아빠진 언어들에 싫증난 관객에게 이번 기획은 분명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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