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2] - 극영화 추천작
2005-04-07
글 : 박혜명
글 : 오정연
글 : 김혜리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나라마다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헤자르

Hejar·한단 이펙치·터키·2001년·120분·터키영화 특별전

<헤자르>는 어린 소녀와 노인 사이에서 싹트는 우정을 관찰하는 영화다. 반터키정부 활동을 벌이던 쿠르드족 게릴라 부모를 갑작스럽게 잃고 고아가 된 헤자르는, 판사직을 은퇴하고 혼자 사는 옆집 노인 리팟과 그 집 가정부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쿠르드어만 할 줄 아는 헤자르와 터키어만 아는 리팟은 서로의 언어를 고집하는 탓에 한집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헤자르>는 서로에게 장벽과 오해를 쌓은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익숙한 패턴으로 그린 영화다. 극을 받쳐주는 힘이라면 인물들에게 불어넣어진 섬세한 생명력이다. 어린 헤자르의 침묵을 이해하는 리팟의 가정부 사키네, 리팟과 솔메이트가 되기를 자청하는 이웃, 무엇보다 헤자르를 대하는 리팟의 작은 변화들로부터 크게는 유사가족, 작게는 긍정적 삶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

CQ2

CQ2·감독 캐롤 로·캐나다·2004년·100분·새로운 물결

현대무용은 발레로 대표되는 고전무용의 기교와 형식 대신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택하면서 시작됐다. 배우이자 가수였던 캐롤 로 감독은 자신의 딸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두 번째 연출작 <CQ2>(Seek you, too)에, 현대무용의 풍부한 감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지옥 같은 가족의 품을 떠나 마약에 의존하던 레이첼은 갓 출옥한 현대무용가 쟌느를 만나 삶의 목표를 얻는다. 육체의 선택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끝없는 불행의 나락에 빠져들었던 그가, 그 몸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면서 조금씩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되는 육체의 향연이 매혹적이다. 쟌느의 오랜 친구로, 마지막까지 레이첼의 곁을 지키는 장 마크 바(<그랑 블루>)의 변함없는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는 기회.

홀리 걸

The Holy Girl·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2004년·104분·뉴 커런츠

데뷔작 <늪>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두 번째 장편. 단짝 호세피나와 함께 가톨릭 종교 수업을 듣는 소녀 아말리아는, 이혼한 엄마 헬레나와 외삼촌이 경영하는 호텔을 집삼아 생활한다. “신의 계획 가운데 너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진지하게 몰두해 신의 소명을 간절히 기다리던 호세피나는, 어느 날 군중 속에서 밀착해오는 남자의 하반신을 느낀다. 그는 아말리아네 호텔에서 학회 참석 중인 유부남 의사 하노. 가련한 사내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소명이라 확신한 아말리아는 그를 끈질기게 뒤쫓는다. 한편 헬레나는 하노에게 호감을 갖고 로맨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아말리아가 그녀의 딸임을 안 의사는 가책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가족의 방문을 받는다. <홀리 걸>은 굳이 섹스나 로맨스의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삶의 밑바닥을 흐르는 성적인 에너지가 우리의 세계를 얼마나 깊이 조종하고 있는지 관찰한다. 마르텔은 상세한 서술과 결론을 피해가며 드라마의 그물코를 헐겁고 느긋하게 짠다. 인물에 바짝 다가든 카메라,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구도를 무너뜨리는 화면, 이명 현상과 진공관 악기의 사운드는 미묘한 공기를 층층이 쌓아올린다. 섹스, 구원, 자아, 우정에 관한 불길한 풍문이 속살거려지는 소녀들의 미열에 들뜬 세계는 <천상의 피조물들>을 추억하게 한다. 내적 통합을 이룬 침착하고 조숙한 연출은 감독의 짧은 이력을 믿기 어렵게 한다.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제작자로 가담했다. 그가 가톨릭교와 성적인 스트레스가 지배하는 세계의 오랜 권위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It’s Not Her Sin·감독 신상옥·한국·1959년·104분·한국영화 회고전

첫 장면. 급박하게 차 두대가 연이어 서고, 두명의 여자가 외무성으로 뛰어들어간다. 짧은 몸싸움 끝에 한 여자가 우발적으로 총을 쏜다. 총을 쏜 여자는 백 부인, 총을 맞은 여자는 영숙이다. 살인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친한 사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녀들을 비롯해 백 부인의 남편과 영숙의 애인은 차례로 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 심문받는다. 영화는 그들 사이에서 한참 동안 미궁 속에 있다가, 영숙이 사건의 발단에 대해 입을 열자 그제야 과거로 넘어간다. 그 중심에는 아이를 둘러싼 모성애가 있었다. 그녀들의 사연은 기구하고, 애절하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는 노련한 추리극처럼 시작한다. 그러다가 모성애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신상옥 감독의 1959년 작품인데, 장르적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들은 그가 만든 장르의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는 독특한 캐릭터 영숙 역을 최은희가 맡는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라는 말은 자식을 둘러싸고 모성애로 벌인 두 여자의 행동 모두를 변호하는 공평한 최후 판결처럼 들린다. 더글러스 서크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가족멜로드라마의 구조를 차용한 흔적이 진하게 엿보인다.

나만의 숲

The Forest for the Trees·마렌 아데·독일·2003년·81분·뉴 커런츠

일상이 힘겨운 연극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면, 금방이라도 그 서툰 무대가 무너져 잔해에 깔린들 아무도 구조해주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면, <나만의 숲>의 주인공 멜라니는 당신이 ‘아는 여자’다. 둔하지만 선의로 가득한 시골 교사 멜라니는 직장과 집을 도시로 옮긴다. 집에서 담근 술을 이웃에게 돌리고 교사 동료들에게 새로운 교수법을 시도할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특출난 매력도 없고 도시적 인간관계의 법칙에도 무지한 멜라니는 이내 소외당한다. 거절을 맛본 멜라니는 점점 더 줏대없고 비굴해진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그녀를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약자의 냄새를 빨리 맡는 잔인한 아이들은 교실에서 그녀를 대놓고 무시한다. 그나마 유일한 친구였던 이웃집 티나의 눈에 멜라니는 점점 추한 스토커처럼 보인다. 끔찍하게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였던 <여자, 정혜>의 정혜는 자기를 방어하며 품위를 유지했으나, 타인의 관심에 목마른 멜라니는 매순간 그릇된 판단으로 처지를 악화시킨다. 디지털비디오로 촬영된 화면의 직접성은 그녀의 난국을 생생히 강조한다. “단편이었다면”이라는 바람이 불쑥 치솟을 만큼 보고 있기 딱하다. 마렌 아데 감독의 영화학교 졸업작품으로 교사로 재직했던 양친으로부터 들은 일화가 소재를 제공했다고 한다.

Yes

Yes·샐리 포터·영국·2004년·99분·새로운 물결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며 생물학자인 그녀는 파탄 직전의 결혼 생활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다. 레바논의 의사였으나 런던으로 망명하여 요리사가 된 그는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여 생생한 삶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일터의 동료들과도 인종적·종교적 편견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그는, 1세계에 속하는 그녀와의 관계가 매순간 불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아무리 그녀가 아일랜드계요, 여성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아찔한 유혹의 순간과 사회가 강요하는 안타까운 갈등, 모든 것을 뛰어넘는 솔직함 등 예상 가능한 멜로드라마가 가질 법한 모든 요소를 지닌 이 영화의 흔한 스토리를 운반하는 것은, <올란도> <탱고 레슨> 등에서 다양한 여성적 시각과 화법을 고민했던 감독 샐리 포터의 스타일. 인물들이 운율에 맞추어 읊조리는 대사, 불안정한 앵글, 끊임없이 오버랩되는 화면, 스크린 속 인물이 관객을 응시하며 말을 거는 파격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모든 시도 및 실험이 그다지 신선하거나 효과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사실. 갖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긍정의 힘은, 그처럼 쉽게 표현되고 이해될 수 없는 법이다.

쿠난디

Kounandi·아폴린 트라오레·부르키나파소·2003년·50분·새로운 물결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어느 마을. 부인 미리엄과 남편 모우사는 싸움을 하고는 족장을 찾아 서로 하소연한다. 그 순간에 미지의 여인이 임신한 채로 마을에 들어와 아이를 낳고는 죽어버린다. 족장은 부부에게 이 아이를 키울 것을 명한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쿠난디다. 그런데 아이는 난쟁이다. 착한 부인 미리엄은 정성으로 키우지만, 못된 남편 모우사는 구박할 뿐이다. 어머니가 사고로 죽게 되자 성장한 난쟁이 쿠난디에게 관심을 쏟아주는 이는 마을에 같이 사는 카림이라는 남자뿐이다. 쿠난디는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는 아픈 아내를 두고 있는 유부남이다. 쿠난디는 이루지 못할 카림과의 사랑을 다른 헌신적인 방법으로 실현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전설 같은 슬픈 이야기.

친정어머니

Mother·김기덕·한국·1966년·105분·한국영화 회고전

<맨발의 청춘>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기덕 감독의 1966년 작품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부잣집으로 시집간 딸(엄앵란)은 시어머니 등쌀에 힘이 들지만 남편(남궁원)과 시아버지(김승호)의 사랑으로 그럭저럭 버텨낸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구박은 극에 달하고, 아들의 사업 실패를 계기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한다. 친정어머니(황정순)는 그런 불쌍한 딸을 도우려다 범죄를 저질러 법정까지 서게 된다. 부잣집 시댁과 가난한 친정. 못된 시어머니와 착한 친정어머니. 영화는 딸의 힘든 시집살이를 통해 친정어머니를 더욱 따뜻하고 애절한 숭엄의 존재로 부각시킨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 어머니의 숭고함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야 만다. 친정어머니 역의 황정순 외에도 시아버지 역의 대배우 김승호의 연기를 볼 수 있고, 그들이 하는 맛깔스런 대사들도 있다.

나비

Butterfly·얀 얀 막·홍콩·2004년·124분·새로운 물결

열정적인 레즈비언 멜로드라마. <나비>는 좋은 남편과 예쁜 딸아이, 문학교사의 직업을 두루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서른살 여자가 안정적인 외적 조건이 아닌 불안정한 내적 욕망을 좇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우연히 만난 23살의 자유분방한 소녀 입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그녀와 가까워지길 원하게 된 프라비아. <나비>는 고등학교 시절의 동성애 로맨스와 현재의 것을 교차편집으로 병렬 배치하고 각각의 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이어나간다. 설렘과 충만함, 질투와 변심으로 얼룩진 동성간의 사랑은 이성간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섹스신은 그저 예쁘게만 찍혀 소품같은 인상도 주지만 <나비>는 감정적 여백을 만드는 데 소홀하지 않으므로 제법 솔직하고 현실감 있어 보인다. 그 솔직함으로 인해 “한쪽 슬리퍼를 잃었으니, 나머지 한쪽마저 버리고 맨발이 되어버리지, 뭐”라는 대사도 철없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엄마를 위한 노래

A Song Is Not Enough·엘리사벳 크로노폴로·그리스·2003년·118분·새로운 물결

딸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던 엄마 이렌느, 엄마에게 온전히 보호받고 싶었던 딸 올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엔 턱없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아빠. <엄마를 위한 노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자 여성들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아홉살 올가의 시간과 엄마 또래의 나이가 되어 아홉살짜리 아들을 둔 올가의 시간을 각각 흑백과 컬러로 교차편집하면서 아내와 남편, 엄마와 딸, 아빠와 딸 사이의 연약한 관계를 보여준다. 가족간의 애정은 어디까지 순수하고 헌신적일 수 있을까를 회의하는 이 영화는, 이렌느와 올가 사이의 뒤늦은 화해를 알리면서도 그 순간에 끈적한 대사보다 밝은 노래가사를 집어넣어 거리를 두려는 세련된 영화다. “내 마음을 다 말하기엔 이 노래가 너무 짧네. 노래가 길어진다 해도 마음을 다 전달할 순 없네. 난 결코 당신에게 다 말하지 않겠네, 내 맘속의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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