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압도하는 서정
샤트야지트 레이의 <길의 노래>
샤트야지트 레이는 첫 영화가 될 <길의 노래>의 촬영을 1952년에 시작했지만 제작비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탓에 3년 뒤에나 완성을 볼 수 있었다. 결코 바짝 죈 상태가 아니었던 그 오랜 기간 사이에는 자연히 많은 공백들이 있었는데, 때론 그런 공백이 레이에게 실망이 아닌 격려를 주기도 했다. 인도에서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열렸을 때가 그 예가 되는 경우였다. 당시 촬영에서 손을 놓고 있던 레이는 극장으로 달려가 2주일간 하루에 네편씩의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해서 그가 접했던 영화들 가운데 특히 레이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이었다. 3일 연속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는 레이는 그것에서 영화감독의 손길이 얼마만큼 황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산 증거를 보았다. 그렇지만 레이는 구로사와의 비범한 연출력 앞에서 주눅이 들기보다는 자기도 그에 필적할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영화적 야심을 더욱 불태웠다. 이제 시선을 몇년 뒤로 돌리면 후대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 벌어진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길의 노래>는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서구인들에게 또 하나의 어둠 속의 영화 대륙으로 여겨지던 곳을 지도에 올려놓게 했다. 이전에 구로사와가 자국영화에 기여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결국 레이가 재연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레이의 <길의 노래>는 서구인들로 하여금 인도의 영화도 자못 심각한 시선을 들이댈 만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의 이 인도영화는 그 나라에서 만들어지던 대부분의 영화들과는 달리 달짝지근한 노래와 춤을 제공하면서 순간의 위안을 얻어가라고 속삭이는 유의 것이 아니었다(그렇기 때문에 레이가 찾아갔던 다수의 제작자들은 레이의 제안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서 자기가 만들 영화의 이상을 발견했고 네오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 영화를 모범 삼아 화려한 가식과 불필요한 치장을 제거한 방식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레이의 영화가 데 시카 영화의 단순한 모방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벵골의 시골 마을에 사는 한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기에 언뜻 보아 이것은 인도판 네오 리얼리즘 영화로 간주하기 십상이지만 레이의 독자적인 비전은 그런 식의 이해를 단견이라고 판단하게 만들어버린다. 요컨대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푸 가족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가혹한 현실에 대한 슬픈 이야기나 그런 현실을 낳는 시스템에 대한 날선 비판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그것의 불가해한 경이에 대한 이야기쪽인 것이다.
그러니 레이가 영화 속에 세심히 축적한 리얼리티의 단편들이 시정(詩情)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예를 많은 평자들은 아푸와 누나 두르가가 처음으로 기차를 보게 되는 시퀀스에서 찾지만 그것만큼이나 인상적인 실례가 마을에 몬순이 다가오는 것을 그린 아름다운 시퀀스일 것이다. 레이는 이 시퀀스를 가벼운 떨림이 감지되는 강,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들뜬 듯한 표정으로 비를 맞는 두르가 등을 잡은 숏들을 가지고 축조해낸다. 하나하나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숏들을 레이는 우선 그런 이미지들 자체로 존재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가진 단위들이지 어떤 것(이를테면 재난의 전조 같은)을 상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시각적인 경험이 지난 뒤에야 사후적으로 부가적인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제야 그 이미지들은 상징의 기미를 띠고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성찰의 수단이 된다. 사실 <길의 노래>는 영화 전체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것은 영화적 묘사의 메커니즘을 이해한 영화라 평가할 수 있고 순수영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앞서 언급한 구로사와를 다시 인용하자면, 레이는 구로사와로 하여금 그처럼 감독의 출중한 노고가 돋보이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압도당하고 만다는 말을 내뱉게 하고야 말았다.
영화의 힘이란 이런 것!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 함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 대한 비평서를 낸 영화감독이자 비평가인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는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만 한때 이란에서 영화 만드는 이를 바라보던 시선은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프로 농구 선수를 대할 때의 것과 유사했었다고 말한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에서 우리는 그 재미난 실례 하나를 엿볼 수 있다. 그건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는 거의 부조리한 일처럼 보일 정도다. 재판 과정을 담겠다는 영화감독이란 이가 ‘감히’ 촬영 스케줄 때문에 재판 일정을 앞당겨달라고 법원에다 우리 기준으로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니 말이다. 유명 감독을 사칭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클로즈업>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처럼 영화가 행사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영화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단지 현상의 차원에서 그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느새 그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놓는다는 점이다.
키아로스타미가 <클로즈업>이란 영화의 제작에 착수한 것은 자신이 모흐센 마흐말바프라며 한 부유한 가족을 속여온 사브지안이란 남자에 대한 기사를 잡지에서 읽고 난 다음이었다. 여기에 흥미가 생긴 그는 당시 준비하던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그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사브지안과 그에게 속임을 당한 아한카 가족을 비롯한 실제 당사자들을 기용해 실제와 픽션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사실 이처럼 리얼리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의 영화가 완전히 새로운 유의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들만 열거해도 이건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뤽 고다르 등이 이미 탐사한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그 유사한 영역을 답사하는 행보의 강건한 완력이란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클로즈업>의 키아로스타미는 앞선 모험가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해도 된다.
대부분의 키아로스타미 영화가 그렇듯, <클로즈업> 역시 표층적으로는 단순한 모양새를 가진 듯하지만 그 심층에서는 꽤나 복잡한 설계도를 은밀히 드러내는 영화다. 영화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픽션과 리얼리티가 서로 엇갈리게 마주보면서 만들어내는 심연(abime)에 아찔함마저 느끼게 된다. 요컨대, 그 구조란, 실제 일어났던 일을 스크린에 옮겨낸 <싸이클리스트>라는 픽션, 그 영화를 만든 마흐말바프라는 실존 인물, 이 스타 감독처럼 되고자 하는 사브지안의 판타지, 그런 공상이 실행에 옮겨져 발생한 실제 사건, 이 사건을 카메라로 담아낸 <클로즈업>이란 영화가 긴 연쇄고리를 만들어내는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적확한 표현대로 로셀리니와 피란델로가 만나서 만들어진 듯한 이 구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가장 바깥의 층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즉 실제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짐으로써, 마흐말바프와 관련되고자 했던 사브지안의 바람은 부분적으로 이뤄지고 영화 출연의 꿈이 꺾였던 아한카 가족의 좌절은 극복된다. 다시 말해, 그 바깥쪽의 고리에서 현실은 영화라는 픽션이 행사하는 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클로즈업>은 영화라는 픽션이 현실에 개입하는 양상까지를 포괄해서 현실이 구축되는 좀더 복잡한 방식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어찌 보면 리얼리티를 보는 이런 시선은 동시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회의주의에 굴복하는 것으로 보이기가 쉽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는 고집스럽게도 그러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보듯, 영화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실제로 마흐말바프와 만난 사브지안이 용서를 받으러 아한카 가족을 찾아갈 때 그의 손에 든 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한다. 부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꽃이란 화해의 아름다운 상징일 터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이런 의심이 들 법도 하다. 사브지안과 아한카 가족이 서로 꽃을 사이에 두고 서 있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혹은 그게 좀더 용이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 앞에 그들을 또 다른 많은 이들의 시선에 노출케 하는 카메라라는 픽션의 장치가 놓여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아무래도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조작이 아니라 힘을 본 듯하다. 그런 점에서 <클로즈업>은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은 영화의 힘을 재고하라는 권유를 영화사상 가장 혁신적이면서 감동적인 방식으로 체현하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시아에 찾아온 비극의 연쇄고리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개인적으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하지만 10여년 전, 한 영화제에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연이어 2번 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개봉은 취소되었고 비디오도 DVD도 나오지 않았다. 판권 소유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불가능이란 말도 들었다. 그 난맥상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세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뒤얽혀 있고, 근원을 찾을 수 없고, 결국은 거대한 벽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절망감.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빛.
1991년작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미성년자의 살인사건을 그린 영화다. 한 소년이 소녀를 사랑하고, 결국은 그녀를 죽인 끔찍한 사건. 그 사건은 단지 한 소년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그치지 않는다. 허우샤오시엔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도대체 아시아의 근대란 무엇인지, 를 파고들어간다. ‘기꺼이 역사의 아픔을 견뎌냈던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바’친다는 말처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질곡의 현대사와 폭압적인 대만사회의 현실이 생생하게, 냉정한 시선으로 담겨 있다.
1960년대, 14살의 샤우스는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방하여 야간학교를 간다. 또래집단인 소공원파의 친구들과 사귀게 되고, 닝이란 여학생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다. 닝은 다른 조직의 두목을 죽이고 남부로 도망쳤다는 소공원파의 두목 하니의 연인이었다. 샤우스는 다른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전학 온 장성의 아들 샤우 마와도 친해진다. 어느 날, 하니가 돌아오지만 어이없게도 상대의 함정에 빠져 죽어버린다. 소공원파는 하니의 복수를 감행하고, 사건에 연루된 샤우스는 퇴학을 당한다.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샤우스는 닝이 샤우 마와 사귄다는 소문을 듣는다. 가슴에 칼을 품고 샤우 마를 찾아가고 싸움을 벌이지만 그를 죽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샤우스는 닝에게 말을 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한 소년의 일상을 그린 청춘소설이다. 그는 어쩌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에드워드 양은 끈질기게 그의 주변을 파고든다. 샤우스의 아버지는 본토에서 온 공무원이었지만, 좌익이라는 혐의를 받아 고문을 당하고 정신이상에 시달린다. 소공원파는 퇴역군인들이 사는 빈민가의 아이들이 만든 집단이다. 어울려 다니며 패싸움을 하거나, 록그룹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아니 이미 고정된 미래만이 존재한다. 아주 작은 틈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로또에 당첨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세상이란, 참으로 모호하다. 일본이 물러간 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집안에는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른다. 국민당 정권은 침입자인 동시에 지배자다. 세상은 변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막막하다. 허우샤오시엔의 초기영화가 시골 소도시의 모습을 주로 그린 것과 달리 에드워드 양은 도시의 한복판을 그린다. 둘의 시선은 언뜻 보기에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유사하다. 그들은 언제나 정면에서 바라보고, 섣불리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가면서,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릇을 본다. 콘크리트 도시의 풍경이 삭막하듯이, 에드워드 양이 보는 도시는 퍽퍽하다. 일제의 잔재와 국민당의 독재와 미국 대중문화가 이리저리 뒤섞이며 혼돈에 빠진 대만은, 14살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겪어야 했던 근대의 억압과 상처를 치열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소년의 시선이 아니라 소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샤우스는 결국, 세상이 아니라 소녀를 살해한다.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년과 달리 빈민가에서 자라난 닝은 ‘세상은 변하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녀는 힘을, 권력을 찾아 떠돌아다닌다. 야간학교에 들어간 샤우스는, 그가 만난 현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샤우스는, 살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기에, 샤우스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가장 소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죽인 것이다. 너무나도 참혹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세상 대신, 자신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세상, 아니 근대 이후 아시아에 찾아온 비극의 연쇄고리를 꿰뚫어본다. 그것만으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