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다룬 최고의 영화
<박하사탕>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파리 외곽의 양계장 분쇄기에 머리부터 넣어져서 닭모이가 되었다고 한다. 진실의 한 자락을 들추었을 뿐인데 엽기적인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실제 상황으로 다가온다. 2005년에도 우리의 현대사는 여전히 직면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무서운 시대를 다룬 <박하사탕>을 5년 만에 다시 보았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시대순으로 나열하면, <역도산> <효자동 이발사> <실미도> <그때 그 사람들> <살인의 추억>)을 보고 나서 다시 본 영화는 어떤 울림을 자아냈다. 1999년에서 1979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박하사탕>은 <살인의 추억>을 지나 <그때 그 사람들>의 시간에서 멈춘다.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처럼, 1980년대에 형사였다. 그들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일삼거나 방조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나 진범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자백이다. 그러다 1990년대에 그들은 사장이 된다. 너무나 역겹게도 문민정권과 함께 그들은 평범한 가장이자 사회인이 되어 우리 곁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김영호는 직접 고문을 가했던 피해자와 마주쳐도 자신의 행위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박두만의 죄가 연쇄살인이라는 절대악 뒤에 감추어지듯이, 김영호의 죄는 역순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시간 속에서 신문(訊問)을 피해간다. <박하사탕>이 우리 모두 작은 악들과 함께 살아온 거 아니냐고 할 때, <살인의 추억>은 동의를 한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서 1980년 5월 광주에 도착한다. 그곳에 군인으로 파견된 김영호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는 다만 다리에 총을 맞은 게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무고한 여학생을 죽이고 만다. 그러고나서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에 시달린다. 김영호는 살인의 기억 때문에 형사가 되고, 박두만은 살인마 때문에 형사를 그만둔다. 다시 말해서 김영호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고문을 일삼는 형사가 되었다고 변명하고, 박두만은 살인마가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고문을 동원해서라도 범인을 잡으려 했다고 변명한다. 변명 속에서 살인마의 정체는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김영호의 삶을 망가뜨린 진짜 원인에 대한 대답은 영화 속에서 끝까지 연기된다. <효자동 이발사>와 <그때 그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철딱서니 없는’ 인물들을 설정함으로써 <박하사탕>을 반복한다.
마침내 김영호의 시간 여행은 1979년 가을에서 멈춘다. 노동자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에게 사진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한다. 전태일이 아닌 그는 순수하고 행복하다. 만일 1979년의 10·26이 없었고 그래서 1980년의 5·18도 없었다면, 김영호는 그로부터 20년 뒤에 자살하는 대신 옛날 동료들과 어울려 흥겨운 야유회를 즐길 수 있었을까? 한국 현대사가 좌절의 연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어떡해든 희망의 순간을 보려고 한다(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역도산>과 동일한데, 설경구가 연기하는 역도산의 순수했던 시절의 사진으로 끝난다).
끝없이 망가져가던 김영호는 결국 경제파탄 속에서 자살한다. 김영호가 광주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렇게 살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할 때,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자포자기의 태도가 있다. 또한 그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능동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때, 우리는 역사의 죄의식으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진짜 가해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러한 입장이 역사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은연중에 수동적으로 가해자의 처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떡해 할까?
<박하사탕>이 지난 10년 동안 만들어진 한국영화 가운데 현대사를 다룬 최고의 영화로 손꼽힐 만하다면, 이 영화 자체가 과거 시간을 다루는 한국영화의 가능성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하여튼 기억을 다루려고 한다(혹은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무능력하다.
한국영화의 진정한 원류!
<춘향뎐>
얼마 전 어느 봄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새벽 3시 반에 이리저리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춘향뎐>의 거의 마지막 부분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물론 이미 나는 이 영화를 외울 만큼 보았고,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DVD가 안방에 꽂혀 있다. 그런데 불현듯 나는 우연히 마주친 그 우연의 순간의 그 장면에서 거의 멈춘 듯이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은 이몽룡 어사또가 출두하고, 만인의 피로 빚은 술상이 엎어지면서 남원 변학도 사또의 잔칫상을 들이치는 대목이다. 거기서 나는 그렇게 여러 번을 보았을 때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러나 그 대목부터 보았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장면을 보았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기생들이 프레임 좌하(左下)에서 우상(右上)으로, 그리고 우하에서 좌상으로 서로 가로질러 뛰어가는데 그때 그 기생들이 입은 형형색색 치마의 색채들 사이의 운동이 그 자체로 하나의 조화를 이루면서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색의 짝짓기가 이루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제야 보았다. 그러니까 이 숏은 거기서 그렇게 달릴 수밖에 없는 가옥의 구조 안에서 옷을 입은 육체가 만들어내는 운동과 그 운동을 감싼 한복 치마의 선이 일으키는 움직임 안에서 치마의 색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프레임의 와이프 효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건 착시효과이다. 그러나 그 착시를 만들어내는 감각의 물적 재현은 한국 안에서의 삶의 질료성이다. 물론 거기에 1976년판 청랑 조상현의 판소리가, 그 치마 사이를, 그 운동 사이를, 그 색채와 색채의 부딪침에 소리와 북의 장단을 더해, 숏과 숏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면서 이리 쿵, 저리 쿵 부딪쳐가며, 소란스럽고도 통쾌한 절정을 끌어낸다. 그런 다음 이몽룡 어사또 춘향을 끌어내어 짓궂게도 못된 그 어느 시러배 어사또 시늉을 하며 능청스럽게 다시 한번 춘향의 마음을 떠본다. 이런 못된 놈 같으니라고! 이제 심신이 절망에 이른 춘향,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하고 혼절할 때 어찌 감정이 복받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춘향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미국영화는 결국 존 포드의 <역마차>이며, 프랑스영화는 결국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며, 일본영화는 결국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영화는 결국 <춘향뎐>이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거기에 소리가 더해져서 조선시대 이래 수많은 명창들의 소리에 의해 가다듬어지고, 북 장단과 피를 토해내면서 가까스로 얻어낸 그 청랑 선생의 목소리로 살아나서, 마당에서 무대에서, 이 땅을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의 웃음과 눈물, 탄식과 박수장단으로 하나가 되어온 그 이야기를 위대한 장인 임권택이 그 자신의 진심을 담아 할 수 있는 최선의 솜씨를 기울여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 숏과 숏들이 부딪치고 흐르면서 그 안에서 멋과 흥이 절로 흐르고, 화면 안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정취와 동작이 병풍처럼 차곡차곡 열린다. 이 영화의 원칙은 (내 생각에) 단 한 가지이다. 그건 소리를 다치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온 땅의 숨결, 그 숨결을 담아낸 (그 자신이 지긋지긋하게도 싫어서 열여덟의 나이에 집에서 도망치듯이 떠나왔던 호남 땅 고향의) 소리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귀기울이는 이 일흔의 나이에 이른 대가의 손길은 허허실실, 참으로 대담하고도 간결하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이룬 이 영화. 이것은 저 지난하기도 했던 20세기 한국을 온몸으로 견뎌온 그 자신의 분노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한 마당 큰 웃음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몇번이고 이사를 다닌 임권택 감독님의 집에 가면 그의 방에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그 액자에는 단 한 글자, ‘無’가 쓰여 있다. 사실상 이 글자는 이 대가의 예술적 야심이다. 나는 그것을 <춘향뎐>에서 보았다. 그것이 내가 배운 것이다. 혹은 나의 늦봄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박찬욱 최고의 걸작
<복수는 나의 것>
2002년에 <복수는 나의 것>이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가장 오해된 영화에 속했다. 당시에는 장차 칸을 정복할 운명에 놓인 <올드보이>의 전작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영화의 표지에 찍히기 전의 일이었고, 지금은 심심치 않게 떠도는 복수 삼부작이라는 말도 그때는 없었다. 그보다 <복수는 나의 것>은 2000년에 개봉되어 공전의 히트를 쳤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이 또다시 돈 안 되는 ‘한예술’을 한 것은 아니냐는 의구심과 염려의 공기가 팽배한 가운데, 비평계는 딱 반반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흥행에서는 참패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두해가 되지 않아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의 최고작이라는 서명으로 다시 만개한다. 박찬욱 감독은 칸의 영광으로 자신을 미덥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단의 인간들에게 단단히 복수(!)를 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심으로, 이 영화는 박찬욱의 최고 걸작이 되었다.
친절한 복수씨,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 어떤 때보다도 미니멀리즘한 세공력과 난공불락의 이미지로 영화를 잊을 수 없는 잔상의 뭉치로 만들어나간다. 배스킨라빈스 통엔 아이스크림 대신 신장이 담겨져 있고, 류의 신장을 떼어갈 여자 의사는 오히려 바늘자국이 숭숭한 자신의 팔을 류에게 내민다. 영화는 짓다만 빌딩, 귀신같이 버티고 서 있는 마약쟁이 의사, 하체를 드러낸 노인, 꼬질꼬질 때낀 소파 속의 꽃들, ‘가시오’가 아닌 ‘멈추시오’로써의 불길한 녹색들, 방 안에 장식된 교통경찰 인형 등으로 스스로를 장식한 채 그 즐비한 부정교합의 기괴한 이미지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그 가운데 감독은 툭툭 목구멍에 깊숙이 박혀 있던 잔인한 웃음과 농담조의 진심을 태연히 내뱉는 것이다. 신장의 고통으로 방바닥을 뒹구는 누나를 등 뒤에 두고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는 무심히 라면을 먹고, 그 신음소리를 착각한 옆방의 총각들은 자위를 한다. 이 장면은 피가 흘러서 잔인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태연히 팬하는 카메라가 지독히도 잔인하다. 팽기사의 자해로 시작하여, 그의 흰 러닝셔츠 위에서 서서히 스며들던 붉은 피는 부검한 유선과 누나의 시체 위의 메스가 전해주는 차가운 금속성의 검정 물로 바뀌고 이윽고 동진의 두손은 류의 발목에 자상을 내면서 생을 마감케 하는 액체로 전이된다. 그것은 이 사회의 단단해 보이는 외관에 메스를 가하는 차가운 금속성으로써의 비정함, 그리고 오줌으로 변화한 체액, 노폐물로서의 버려진 순정적 휴머니즘에 대한 지독한 냉소에 다름 아니다. 무심하게 흐르는 오줌과 피, 그 속에 흐르는 것은 누구의 신장도 거부하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냉기가 뿜어내는 독한 기운이며 그리하여 <복수는 나의 것>의 계급성은 사실적이라기보다 풍자적으로 영화의 뒷면을 지배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미니멀하지만 청각적인 이미지의 풍부함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도시의 소음이나 공장의 굉음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수준으로 관객의 귀를 두드리고, 그러나 주인공 류는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죽는지 모르며,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이해하려 하다 고개를 빼어물며 죽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마지막은 시체를 싼 쓰레기 봉투의 클로즈업. 인간의 가장 관념적인 감각인 소리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물화된 쓸모없는 살, 시쳇덩어리로 끝이 난다. 이로써 박찬욱 감독은 명백히 선언한다. 이 죽음에 구원은 없다고. 클로즈업된 쓰레기더미로서의 육신, 정말 신장은 신장이라고. 박찬욱은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구원도 순정도 깡그리 없애고 유유히 사라진다. 잔인한 신처럼. 인생은 싸구려고 신장은 비싸다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신과 복수라는 관념을 유물론의 메스로 해부해버린 <복수는 나의 것>은 그래서 그 자체 안에 너무 건조해서 순수와 통하는 사막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지는 말자. 박찬욱의 사구에서 여름이란 ‘시체가 빨리 썩는 계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하니까.
사족. <3인조>에서 류승완 감독은 소품 담당으로 일했다. 당시 그는 여기서 자장면을 먹는 직원 역을 카메오 출연하더니 이번에는 자장면 배달원으로 잠시 출연한다. 물론 <올드보이>의 군만두도 빠질 수는 없다. 류승완과 박찬욱 그리고 자장면 집의 역사는, 이토록 유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