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 10주년 기념 영화제 [5] - 한국영화 베스트 ③
2005-04-20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글 : 유운성 (영화평론가)
<송환>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빈 집>

역사를 향한 조용하고 격렬한 관찰

<송환>

망각이 꼭 역사의 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즈음에는 많은 영화들이 너무 빨리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그만큼 빠르게 잊혀진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심지어 어떤 이들은 빠르게 잊혀지기 위한 영화들을 만들기까지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서두르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뒤에 남겨진 흔적들을 꼼꼼히 다시 더듬으면서, 현실의 변화의 추이를 세심하게 뒤쫓으면서, 시종일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작업하는 김동원 감독 같은 이가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오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다림의 결실인 <송환>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논의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인물 다큐멘터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담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얼굴들이 모여 스스로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세상의 형상을 만들어내게끔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송환>은 무엇보다 감독 자신과 장기수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형성에 힘입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친밀함이 곧바로 진실의 고백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드러낸다. 영화 속의 장기수들은 종종 과거를 털어놓길 주저하고, 의중을 감추며, 단단한 ‘사상’의 외피의 채 여며지지 않은 틈으로만 슬쩍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송환>은 그런 그들 앞에서 감독 자신이 느꼈을 긴장까지도 담아내며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진실이 우회적으로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들의 얼굴을 통해서이다. 그럼으로써 <송환>이 상영되는 스크린은 고집, 확신, 분노, 열패감, 기쁨, 좌절, 그리움, 후회 등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벌이며 다투고 있는 격전장이 된다. 한마디로 이곳은 감정들의 ‘조용한’ 격전장이다. 이때 감정은 곧 역사이다. 문학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역사란 사실로서의 의미를 잃게 된다고 지적하며 “역사란 인류의 거대한 원한”과 비슷한 것이라는 통찰력 있는 견해를 내놓은 바 있는데, 그러고보면 우리가 <송환>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감정의 격전장을 ‘조용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김동원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은 참으로 담백하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이 내레이션에는 별다른 수사적 치장도, 철학적인 통찰도, 감정의 가장(假裝)도, 정치적 선동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무 평범해서 놀라움을 안겨줄 정도다. 그럼에도 이것은 허장성세로 가득한 마이클 무어식의 내레이션보다 더 깊은 곳까지 와닿는다. <송환>의 내레이션이 지닌 힘의 비밀은 그 정확성에 있다. 김동원은 그토록 담백하고 정확한 태도로 감정의 격전장 한복판에서 감정들의 무게를 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은밀한 방식으로 장기수들의 감정에 조응하면서 말이다. 예컨대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가 마침내 풀려나 90살 넘은 노모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선생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라는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이것은 그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그 누구도 아닌)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이 비전향 장기수 노인이 평생토록 꺾지 않았던 고집을 암시하며 또 거기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다.

한편으로 <송환>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다가오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장기수 노인들을 만나고 마침내 <송환>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부화뇌동하며 장기수 문제에 접근했던 언론들의 태도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각의 장기수들의 삶을 끝내 엇갈린 방향으로 향하게 한 전향과 비전향 사이에서의 ‘선택’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떠오르는 말 하나. “우리가 바라는 자유나 우연이 깨어졌을 때, 깨진 만큼 우리는 역사의 필연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항하니까 역사의 필연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저항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필연인 것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고바야시 히데오, <역사와 문학> 중에서)


살벌한 리얼리즘의 잔혹동화

<살인의 추억>

푸른 하늘, 바람이 부는 황금빛 벌판, 그 한가운데 처절하게 죽어간 여인들의 시체가 있다. 평화로운 마을에 불어닥친 죽음의 바람. 어눌한 수사와 고문과 구타, 죄없는 용의자들, 그리고 죽음, 죽음, 죽음. 그 누구도, 그 어디서도 범인을 찾을 수 없으니 우리 모두가 범인이 되었다. 침묵하는 시체를 앞에 두고, 이제 마을은 오직 소문과 발없는 말들만 무성한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살아남은 여인들은 두려움으로 입을 닫고, 죽어가는 여인들은 목소리를 잃고, 마을에는 수컷들의 속이 텅 빈 언어들, 광기어린 자존심만 남았다.

감독은 언젠가 기억은 응징의 시작이라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모두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그 시절을 이제야 기억하는 살아남은 자들, 기억을 응징으로 믿고 죄의식을 떨치려는 그 시절 공모자들의 뒤늦은 몸부림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미세한 감정선이 얽힌 얼굴로 마치 비극을 홀로 대면하듯, 줄곧 카메라를 정면 응시한다. 그래서 영화는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여전히 ‘살아남은’ 자의 중얼거림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기억 속에는 폭력과 억압으로 지탱되던 허울뿐인 사회는 있어도 죽은 여인들의 언어, 그녀들의 삶은 없다. 영화는 여인들의 죽음을 한 마을에 불어닥친 저주, 혹은 해묵은 전설로부터 꺼내었으나 그 죽음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잃었다. 그녀들의 죽음은 당대 사회의 알레고리가 되어, 고깃덩어리처럼 잘려나갔다. 여인들의 시체는 마을의 벌판에만 나뒹굴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도 껍질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80년대 화성을 향한 진혼곡이지만, 그 애도의 노래 속에는 죽은 여인들 각각에 대한 슬픈 추억이 없다. 그녀들은 다만 손발이 꽁꽁 묶인 죽은 물질로 존재할 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것이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시대의 거대한 비극을 뭉뚱그려 ‘머리로’ 기억하는 수컷들, 스스로를 가해자에 한발 담근 시대의 피해자로 여기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패배적인 슬픔에서 보는 것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온몸에 새겨진 상처로 기억하는, 여인들의 여전히 살아 있는 고통이다. 음침한 밤길을 걷는 겁에 질린 여인의 눈동자, 밤새 내린 비에 젖어 부풀어오른 푸른 살덩이, 그리고 죽어서도 감지 못한 그녀들의 멍한 시선. 생명력을 잃고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 정지된 이미지는 수컷들의 소란한 움직임과 말을 균열한다. 형사들과 범인 사이의 경계를, 말하자면, 착한 남자와 나쁜 남자 사이의 경계를 지운다. 강간범과 피해자의 오빠 사이에 세워진 종이 한장의 차이를 되묻는다. 시대의 아픔을 말하면서도 죽은 여인들 개인의 역사는 잊는 살아남은 자들을 비웃는다. 카메라는, 그리고 형사들은 여인들의 시체를 대상화했지만 대상화된 그녀들의 시선이 스크린을 채우는 순간, 아무도 그 시선에 담긴 원한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용의자가 비틀거리며 터널 속으로 종적을 감추고, 영화는 이 실체없는 사건에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무언의 힘을 드리우지만, 영화 전반을 가득 채웠던 여인들의 죽은 육신을 보라. 자신이 당한 폭력의 기억을 또렷이 말하던 여인의 그 눈빛을 보라. 그녀들은 이 비극적 사건을 관념화하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끝나지 않을 생생한 역사, 더러운 현실을 되새긴다.

만약, 영화를 보는 당신이 이 여인들의 죽음을 시대의 알레고리 없이, 형사들의 고독한 활약상 없이, 그 자체로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다면, <살인의 추억>은 다만 잘 만든 영화 한편, 과거를 기억하는 영화 한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징과 배경을 뒤로하고 두려움 가득한 그녀들의 떨리는 시선, 육체 그 자체에서 마치 유리로 손목을 긋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면, 이 영화는 살벌한 리얼리즘을 담은 슬프고 날선, 죄의식으로 가득 찬 한편의 동화가 되어 당신의 꿈에 자꾸만 나타날 것이다.


유례없이 괴상한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

데뷔작은, 장차 영화계의 흐름을 예고하는 수원지다. 가끔은 터무니없는 데뷔작을 만든 감독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데뷔작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좋은 데뷔작을 만든 감독 중에서 거장이 나온다. 그 확률도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도 분명한 것은, 좋은 데뷔작을 만들 기회는 단 한번뿐이라는 점이다. 데뷔작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대한, 뛰어난 혹은 단지 기발한 데뷔작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유려하고 세련된 스타일이나 깊은 향취 같은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논쟁적이고 열정적인 영화를 노년에 만들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데뷔작의 치기어린 불꽃과는 또 다르다. 진정 멋진 데뷔작에는, 기존의 논리와 감각으로는 쉽게 포획되지 않는 패기와 발랄함 그리고 도전정신이 있다. 조금의 어설픔과 혼란 때로는 이율배반도 허용될 수 있다. 조잡함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breakthrough’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기존의 상식과 한계를 돌파하는 무언가가 데뷔작에는 있어야 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웰 메이드 열풍이 한창이던 2003년에 등장한, 가장 기괴한 데뷔작이었다. SF, 스릴러, 블랙코미디. <지구를 지켜라!>는 그 모든 장르를 관통하면서, 그 모든 장르를 벗어난다. 장르영화의 공식과 클리셰를 빨아들이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다시 비틀어 내던져버린다. 그렇다고 비틀기에 대한 자의식이 명확한 것도 아니다. 그건 자의식이 아니라, 혼돈과 광기다. <지구를 지켜라!>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괴상한 영화다.

병구라는 남자가 있다. 외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죽여버린다. 고문 방법도 웃긴다. 때밀이와 물파스를 이용한 고문은, 병구를 조롱거리로 삼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병구는 심약하고, 분명히 싸움도 못할 것 같다. 사악한 연쇄살인범이라 하기엔 너무 희화적이고, 연민을 가지기에는 너무 공중에 뜬 인물이다. 그렇게 <지구를 지켜라!>는 시작된다. <지구를 지켜라!>는 현실과 비현실, 이성과 광기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병구는 미쳤지만, 지극히 이성적이다. 논리적이지만,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병구는 지극히 논리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을, 가장 비논리적인 이유로 살해한다.

어느 쪽이 과연 진실일까. 자본가에게 희생당한 가족과 애인을 위한 복수?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의 색출? 장준환은 그 모두를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 모두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망상과 광기 역시, 명백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그대로 노출되지는 않는다. 병구와 순이는, 우리의 망상과 판타지 안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현실의 인간인 백 사장은, 그 망상을 해체하지만 결국은 다시 비현실로 비약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무너지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우월성을 목청높여 주장하지 않는다.

<지구를 지켜라!>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넘버.3> 등 뛰어난 데뷔작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처럼 괴상한 데뷔작을 한국 영화사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지구를 지켜라!>는 단편영화의 감각적인 연출과 도발적인 상상력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충무로까지 넘어온 희한한 경우다.

<지구를 지켜라!>를 지배하는 것은, 마이너한 감성이다. 우디 앨런을 좋아하는 장준환 감독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서슴없이 차용한 <지구를 지켜라!>는 할리우드의 B급영화와는 다르다. <지구를 지켜라!>는 분명히 충무로의 일반적인 관객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유치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사악한 자본가에게 복수하는 노동자, 그리고 처절한 폭력은 그들을 외면한다. 관객의 호응 이전에, <지구를 지켜라!>는 일찌감치 주류에서 이탈하여 자기만의 우주로 날아가버렸다. <지구를 지켜라!>는 ‘적당히’라는 단어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논리만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논리? 일관성? 세련됨? 은근히 그 모든 것을 지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한다. 그 모든 잡동사니가 모여, <지구를 지켜라!>의 혼돈과 광기가 완성된다. <지구를 지켜라!>는 혼란스럽다, 황당하다. 그게 바로 <지구를 지켜라!>의 매력이고, 위대함이다. 사실 <지구를 지켜라!> 이후에 만든 뮤직비디오는 감동적이지만, 일종의 낭비였다. 하지만 또 어떤가. <지구를 지켜라!>도 일종의 낭비로 만들어진, 마이너한 감성의 주류영화였다. 이런 영화가 주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한국 영화계의 불가사의한 일이자 힘이다.


우리 안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판타지

<빈 집>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김기덕은 <빈 집>의 마지막 장면에 이렇게 써넣었다. 이 문장이 <빈 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란 건 김기덕 영화를 몇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김기덕의 세계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건 그냥 저수지에 노란 집을 띄워놓아도 좋고 절 한채를 올려놓아도 성립된다. 또는 추수가 끝난 겨울 들판에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버스 한대가 버려져 있거나 절경을 뽐내는 해안에 철조망을 둘러치면 된다. 그러니까 그에겐 비현실적이라거나 작위적이라고 말하는 기존 비평의 담론을 들이밀면 곤란한다. 김기덕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람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다. <악어>의 용패처럼 한강 다리 아래 수갑을 찬 채 죽어간 부랑자가 현실에 존재하는가? <파란 대문>의 진아와 혜미처럼 대신 몸을 파는 일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그는 당신과 닮은 인물을 그리는 데 아무 관심이 없다.

김기덕은 자기 세계 안의 질서와 운동을 만든 감독이다. 물론 그것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다. 그렇게 만든 세계가 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영화적 기적의 순간을 만들지 못한다면 말이다. 김기덕은 어떤가? 그는 완전한 허구로 현실을 아프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예기치 못한 대목에서 마술 같은 황홀경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짐작하겠지만 <빈 집>은 그런 영화다.

우선 영화적 기적부터 말해보자. <빈 집>의 결정적 장면은 영화 포스터가 보여준 것처럼 이승연이 남편에게 안겨 (남편이 아닌)재희와 키스를 하는 대목이다. 이승연은 말한다. “사랑해.” 이승연이 재희를 향해 던지는 이 말은 언뜻 진정한 사랑의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과연 남편이 재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가? 재희는 진정 도인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아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빈 집>을 이승연과 재희가 완전한 만남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딘지 미심쩍다. 질문을 던져보자. 재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여자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랑해”라는 말이 가닿는 곳은 재희가 아니라 남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 것은 남편을 안고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누군가 다른 이를 그리워하는 여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건 그냥 결혼을 유지시키는 질나쁜 접착제 같은 것이다. 이승연과 재희의 키스신은 한편으론 황홀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름이 끼친다. 그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 자신을 구해달라고 외치는 비명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는 여인의 판타지라고 말하는 건 정당한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진술도 의심스럽다. 혹시 모든 것이 남편의 환상이라면 어떤가? 남편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아내를 믿지 못한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맘에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아내에게 속죄하는 길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는 길밖에 없는 게 아닐까? 재희와 이승연의 몸무게가 0인 이유는 그들이 남편의 환상에만 존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빈 집>의 한 장면이 만들어내는 무궁한 질문에는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아찔한 해피엔딩과 판타지의 뿌리에 깃든 끔찍한 절망이 함께 녹아 있다. 이것이 스위트 홈이라는 신화를 발가벗기는 김기덕의 방법이다.

김기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현실을 깊숙이 찌르고 날카롭게 베어낸다. <빈 집>이라는 제목도 그런 의미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신들의 집도 영혼이 기거할 질량이 전혀 없는 빈 집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는 3번 아이언의 직선타로 당신의 뒤통수, 바로 당신의 거짓된 믿음을 노린다. 김기덕이 90년대 한국영화가 발견한 새로운 작가로 등재된 이유는 명확하다. 감히 입 밖에 내뱉길 두려워하는 어떤 말들, 어떤 상상들이 그의 영화를 통해 흘러나온다. 사회적 금기를 비집고 나온 억압된 현실이 그의 영화에서 피와 뼈를 얻는다. 김기덕은 사회가, 역사가, 남자와 여자라는 존재조건 자체가 지하감옥에 숨겨둔 괴물을 불러내 싸움을 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영화를 보기에 앞서 늘 이렇게 다짐한다. 구원을 바란다면 우린 정말 괴물과 맞설 용기를 내야 한다고.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