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과 막스 오필스의 동명영화로 익숙한 이야기다. 생일마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하얀 장미를 선물받아온 남자가 어느 해 장미 대신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엔, 18년 동안 그를 사랑했고,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옆집에 이사온 남자를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사랑을 시작해서 언제나 그의 곁을 맴돌았고 하룻밤 사랑 끝에 그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끝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주연과 감독을 겸한 쉬징레이는 1900년대 비엔나를 1930, 40년대 베이징으로 옮겨 귀부인의 밀실처럼 우아한 향기를 불어넣었다. 남자가 건넨 흰장미, 전후 베이징의 퇴폐적인 댄스홀, 응고된 사랑이 새겨진 여인의 표정은 단순한 스토리를 애틋하고 섬세한 손길로 매만진 흔적. <귀신이 온다>의 장원이 무심한 플레이보이를 연기했다.
퀼
옆구리에 새 날개 모양의 얼룩이 있어 ‘퀼’이라고 불리게 된 리트리버는 맹인안내견 훈련센터의 다른 개들에 비해 반응이 늦어 열등생으로 남지만, ‘기다려’ 같은 지시는 철석같이 따르는 비상한 면모가 있었다. 그런 퀼의 첫 번째 파트너는 “개에게 끌려다니느니 차라리 누워 있겠다”고 우기는 고집불통의 중년 맹인 미츠루. 어렵사리 호흡을 맞춰가던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이별이 찾아온다. 국내에도 <내 사랑 토람이>라는 특집극으로 익숙해진 맹인 안내견의 이야기가 일본에서는 지난해 한 차례 선풍을 일으켰다. <막스의 산> <개달리다> 등 무표정한 하드보일드로 잘 알려진 최양일 감독의 <퀼>이 바로 그 작품. ‘최양일판 디즈니영화’라고 불린 <퀼>은 사실상 “능동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을 들어보면, 의외의 선택인 것만 같지는 않다. 지난해 일본 극장가에서 30억엔의 수익을 올렸고, 현재 미국에서 리메이크가 제작되고 있다.
모래요정과 아이들
카피카피룸룸 카피카피룸룸 이루어져라. <모래요정과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왠지 낯익은 이유는 이 영국산 판타지영화가 추억의 만화 <모래요정 바람돌이>와 같은 원작(<The Railway Children>)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된 다섯 남매는 바닷가의 친척집에서 여름을 보내야만 한다. 부모를 그리워하며 무료한 날들을 보내던 그들은 저택에서 바닷가로 이어져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8천년 동안 고독하게 살아온 모래요정을 만난다. 비록 ‘카피카피룸룸’을 외치지는 않지만, 모래요정은 하루에 하나씩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이제 아이들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분신을 만들어 청소를 시키기도 하면서 기억할 만한 여름을 보낸다. 소박한 영국의 풍광 속에 동화 같은 판타지를 덧입힌 미술과 특수효과가 인상적인 작품.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아역배우 프레디 하이모어는 이번에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소년을 맡아 작은 두눈을 눈물에 담아낸다.
레드 라이트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작가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보험회사에 다니는 중년 남자 앙트완은 아름답고 능력있는 아내 엘렌과 함께 캠프에 간 아이들을 데리러 보르도에 가야 한다. 그는 약속시간에 늦은 엘렌을 기다리다가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고 운전을 하면서도 도를 넘게 술을 마신다. 화가 난 엘렌은 기차를 타고 가겠다는 메모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종착역에 도착한 기차엔 그녀가 없다. 엘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앙트완은 필름이 끊긴 사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평범한 서스펜스를 깔고 있는 <레드 라이트>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보다는 걷잡을 수 없는 앙트완의 하룻밤에 집중력을 쏟아붓는 영화다. 아내에게 기대면서도 그 사실에 화를 내고, 숱없는 머리카락만큼이나 별볼일도 없고, 불안과 분노를 구분 못하는 중년 남자. 세드릭 칸은 짜증이 일어날 정도로 집요하게 그 남자의 자아를 파고든다. 각색을 “작가의 등 뒤에 숨지 않고, 그가 말하고자 한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일”이라고 정의하는 칸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각색한 <권태>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언더토우
미국의 남부는 시간이 정지한 듯한 세계다. 상처한 아버지 아래서 병약한 동생과 살아가는 크리스에게 그토록 단조로운 세계는 감옥과도 같다. 어느 날 한번도 본 적 없던 삼촌이 그들 가족을 찾아오자 모노톤의 세계는 서서히 금이 간다. 돈을 노린 삼촌은 크리스의 아버지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크리스와 동생은 남부의 평원에서 쫓기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추격전의 긴박함을 군데군데 생략해버리고 형제의 발길이 닿은 남부의 삽화들을 느긋하게 담아내는 데 열중한다. 크리스 형제가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풍경들은 때때로 그림엽서처럼 멈추어서고, 마크 트웨인의 우화처럼 남부적이고 시적인 순간으로 화할 때가 있다. <언더토우>는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쓰고는 있지만, 한 소년의 성장을 사려깊은 방식으로 다루는 로드무비에 가깝다. 지난해 해외평론가들의 연말 베스트를 홀연히 채웠던 이 인상적인 작품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제이미 벨이라는 배우다. <빌리 엘리어트>의 꼬마는 어느새 듬직한 성인배우로 자라 강한 존재감을 번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