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를 찾아서
피델 카스트로에 관한 첫 번째 다큐멘터리 <지휘관>(Comandante, 2002)에 이은 올리버 스톤의 두 번째 쿠바 잠입기. 2003년, 일단의 쿠바인들이 선박과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으로의 불법적인 이민을 시도하려다 실패한다. 쿠바 정부는 이들에게 전례없이 가혹한 처벌을 내렸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세계는 쿠바의 인권문제를 또다시 도마 위에 올렸다. 올리버 스톤은 다시 한번 쿠바로 날아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그와 처벌당한 수감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짚어낸다. 논쟁적인 감독은 공격적이고 객관적인 질문을 수시로 퍼붓고, 여기에 고집스레 대항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거만한 제스처는 금방이라도 관객의 눈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63분의 짧은 시간 동안 올리버 스톤은 과거의 다큐멘터리들로부터 가져온 자료화면과 현재의 쿠바, 피델 카스트로의 노쇠한 카리스마를 기가 막힌 편집으로 섞어서 흔든다.
세계
현대 중국의 모든 것은 가짜다. 중국 6세대의 대표주자인 지아장커(<플랫폼> <소무>)는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세계>는 “우리에게 하루를 주면,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공허한 글귀가 붙어 있는 베이징 근교의 ‘세계공원’이 무대다. 에펠탑, 타워 브리지와 피사의 사탑 등 명승지의 복제품이 모두 모여 있는 세계공원은 키치적인 악취미를 모조리 모아놓은 듯한 인공적인 장소. 시골에서 상경한 타오와 남자친구 타이쉥은 쇼걸과 경비원으로 일하며 미래를 꿈꾸지만,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두 사람의 감정 역시 서서히 진심으로부터 돌아선다. 결국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란 세계공원과도 같은 껍질만 남기고 사라져가는 것이다. 지아장커는 ‘가짜’ 그 자체인 세계공원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급변해가는 중국의 젊은이들을 제3자처럼 서늘하게 지켜본다. 플래시애니메이션과 분절된 내러티브의 실험 속에서도 지아장커의 진중하고 끈질긴 시선은 여전하다.
시네바르다포토
‘누벨바그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나이가 들어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는 그의 <이삭 줍는 사람들>에 이은 다큐 에세이로, 이번 주제는 ‘사진’이다. 첫 번째 ‘이데사, 곰, 그리고 기타 등등’은 테디베어 사진 수천장을 모은 아티스트 이데사의 이야기다. 바르다는 그녀의 전시회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트라우마를 지닌 이데사의 개인사는 물론 20세기의 시간들을 함께 돌아본다. 두 번째 이야기 ‘율리시즈’에서는 1954년 자신이 찍었던 사진의 모델들을 찾아가 기억과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마지막, ‘안녕하세요, 쿠바’는 시가와 사회주의, 룸바와 차차차 등 쿠바의 풍경을 경쾌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 쿠바를 일깨우기 35년 전에 찍은 사진들로 구성한 이 작품은 스틸 사진으로 애니메이션 효과를 내는 등 녹슬지 않은 재기와 활력으로 넘쳐난다.
걸 프롬 먼데이
오랫동안 뉴욕 인디영화계의 기대주로 불렸던 할 하틀리의 신작. 트리플M이라는 조직이 주도한 소비자 혁명을 통해 인간의 상품화가 극대화된 미래사회. 모든 물건이 소비자의 구매력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이 괴상한 근미래의 세상에서는 섹스조차 마음먹은 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섹스를 하고 싶다면 성에 대한 구매력을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트리플M의 고위층에서 일하는 잭은 이런 극단적 소비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도시 곳곳에서는 불평분자들의 테러가 기승을 부린다. 우울한 미래의 삽화가 계속되던 어느 날, 먼데이 행성에서 불시착한 미모의 여인이 계시처럼 잭 앞에 나타난다. 할 하틀리는 <걸 프롬 먼데이>에서도 <인생전서>와 <심플맨> 같은 전작들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라는 문제를 재기 넘치는 위트로 풀어나간다. 초저예산의 악전고투가 느껴지지만 할 하틀리의 시니컬한 로맨티시즘은 날이 아직 닳지 않았다.
살바도르 아옌데
<살바도르 아옌데>는 다큐멘터리 대가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또 다른 칠레 현대사 회고담이다. 1970년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 최초로 평화적 정권이양에 의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했던 살바도르 아옌데. CIA가 사주한 군부세력은 1973년 9월에 반동 쿠데타를 일으켰고, 살바도르 아옌데는 기관단총을 들고 대통령궁에서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은 그의 지난 걸작 <칠레전투>와 <칠레, 끈질긴 기억>으로도 현대사의 망령들을 다 쫓아버리지 못했다고 믿는 듯하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통해 지난 사회주의의 무너진 꿈을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식들의 저녁상을 준비하는 노인들의 입을 빌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민중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되새김질한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심심할 정도로 보편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졌지만, 칠레의 드라마틱한 패배의 순간들은 여전히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라방드
잉마르 베리만의 1973년작 <결혼에 관한 몇가지 장면>의 후일담. 그 시절 헤어진 부부였던 요한과 마리안은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하지만 재결합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마리안이 사진 속의 추억을 더듬다 요한을 찾아가는 것에서 <사라방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요한은 아들 헨릭과 사이가 무척 나쁘고, 헨릭은 딸 카렌에게 집착한다. 마리안은 헨릭의 아내 안나의 죽음으로 이들 가족관계가 더욱 깊은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4명의 인물, 10개의 장으로 이뤄진 <사라방드>는 베리만의 표현대로 “4명의 솔로이스트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다. 부모와 자식의 불화, 인간 본원의 고독,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노대가의 깊은 눈과 여문 손끝에서 담담하고 서글프고 우아하게 펼쳐진다. 베리만의 동반자인 리브 울만의 원숙한 아름다움, HD 촬영으로 잡아낸 유려한 영상도 일품이다.
영화사-선택된 순간들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영화사란 얼마나 고통스러울 만큼 난해할까. 이 거창한 제목의 영화를 앞에 두고 지레 겁먹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사-선택된 순간들>은 86년에 시작되어 98년에 완성된 5시간14분짜리 <영화의 역사(들)>를 80여분 길이로 재편집한 작품이다. 일단은 길이가 짧아졌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을 ‘재편집본’이라고 한다면 고다르에게는 모욕적인 언사가 될 것이다. 고다르에게 이미지의 재편집이란 완벽하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라 이미지와 소리와 타이포그래피가 현란하게 지나가는 고다르의 영화사는 쉽게 머리로 이해하기 난감한 경험일 수도 있다. <영화사-선택된 순간들>을 가장 즐기는 방법은 눈과 귀를 그냥 열어두고 그저 발현하는 이미지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영화는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말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장 뤽 고다르
에바 가드너와 험프리 보가트를 만난다
지금까지 ‘영화궁전’은 주로 아이가 있는 가족을 위한 영화로 채워졌다. 그러나 올해 처음 생긴 ‘추억의 궁전’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세대가 겹칠 만한 50·60년대 영화 세편으로, 나이든 관객의 기억과 젊은 청년들의 호기심을 배려해줄 것이다. 에바 가드너와 험프리 보가트, 존 웨인, 라나 터너, 샌드라 디가 로맨틱한 명패를 달고 있는 이 섹션의 스타들. <맨발의 백작부인>은 조셉 맨케비츠가 리타 헤이워스를 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영화다. 곤경에 처한 영화감독 해리는 제작자 커크와 함께 스페인에 가서 맨발로 춤추는 관능적인 댄서 마리아를 캐스팅하고, 로마에서 영화를 완성한다. 마리아는 금세 할리우드 스타가 되지만, 공적으로 사적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쏟는 해리 대신 느닷없이 나타난 빈센조 백작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에바 가드너는 “여배우로서 내 인생에 정점이 되었던 영화”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존 웨인의 도노반>은 존 포드와 존 웨인, 악역으로 유명한 리 마빈의 이름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인상과 달리 유쾌한 코미디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퇴역해군 도노반은 남태평양 섬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섬에 사는 닥터 데드햄의 딸 아멜리아가 보스턴에서 찾아오면서 평화로운 나날은 끝난다. 데드햄은 도노반에게 자신이 폴리네시아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이의 아버지인 척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지막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는 멜로영화의 거장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여인들의 유대, 완고한 50년대의 흑백 갈등, 어긋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