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6] - 불면의 3일밤
2005-04-26
글 : 김도훈
잠을 잊은 그대에게 혹은 잠을 쫓는 쇼킹 쇼킹

켄 러셀의 밤

<악령들>

이단아 켄 러셀의 작품들은 정치적으로 도발적이고, 도덕적으로 부조리하며,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그는 어떠한 영화적 사조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영국 영화계가 낳은 가장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작가로 지속적인 행보를 해왔다. D. H. 로렌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사랑하는 여인들>은 켄 러셀과 여배우 글렌다 잭슨을 세계 무대에 소개한 작품. 남성의 전면 누드가 등장한 본격적인 (거의 최초의) 상업영화로 악명이 높다. <악령들>은 컨 러셀의 악마적인 비주얼 감각이 절정에 달한 작품으로, 성적으로 뒤틀린 곱사등이 수녀를 중심으로 성직자들간의 권력다툼과 마녀사냥의 피비린내나는 잔혹극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데릭 저먼이 참여한 미술과 주연배우들(올리버 리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광적인 연기는 세월이 지날수록 힘을 얻는다. <토미>는 켄 러셀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 69년에 발매된 록밴드 더 후의 음반을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자폐아 토미가 발달한 후각을 통해 핀볼 챔피언이 되면서 광신적인 청소년 전도단의 구세주로 군림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종교적 위선과 현대문화의 상업성에 대한 ‘60년대적’ 풍자가 넘쳐난다. 비록 시대를 많이 타버린 작품이기는 하지만 60, 70년대를 지배했던 청년문화의 감수성은 여전히 생생하다.

핑크 다큐의 밤

<인사이드 딥 스로트>

육체와 애액이 가득한 정염의 밤을 즐기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핑크 다큐의 밤’은 어쩐지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핑크 다큐의 밤’은 세개의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아라키멘타리>는 여성의 신체를 소재로 가학적인 사진들을 찍어 논쟁의 화두가 되어온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삶을 조망하는 작품이다. 기타노 다케시나 록가수 비욕 등 동료 예술가들이 등장해 괴이한 현대 예술가의 작품세계에 존경의 코멘터리를 늘어놓는다. <새디스틱 마조히스틱>은 일본 로망 포르노의 대가인 고누마 마사루에 대한 다큐멘터리. 일정한 수의 섹스장면만 집어넣으면 된다는 전제하에 감독의 자유로운 연출이 가능했던 일본 로망 포르노가 어떻게 전위적인 예술가들을 양산할 수 있었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말도 안 되는(혹은 연기하기에 극도로 수치스럽거나 역겨운) 장면을 진심을 다해 만들어낸 배우들과 스탭들의 회고담은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찬사로도 손색이 없다. 과거 로망 포르노 조감독 출신이자 <링> 시리즈의 감독인 나카다 히데오가 직접 감독하고 출연해 노장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포르노의 고전 <목구멍 깊숙이>에 대한 일종의 헌사로서, 포르노영화 한편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논쟁과 이후 미국사회의 변화를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세 작품 모두 노골적인 누드와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음지에서 억압받아온 싸구려 오르가슴이 어떻게 양지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어왔는지 ‘깊숙이’ 동감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은, 18살 이상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의 소지여부다.

카렐 제만의 밤

<죽음의 발명품>

체코 애니메이션의 거장 카렐 제만의 작품들은 쥘 베른과 조르주 멜리어스의 영향력을 가늠케 하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카렐 제만의 밤’은 애니메이션의 사려깊은 팬들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찬양하는 모든 관객에게 불면의 매력을 전해주는 흔치 않은 기회다. <크리스마스의 꿈> <영감> <라브라 왕>과 <술탄 모스키> 같은 단편영화들도 아름답지만, 보석 같은 세편의 장편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죽음의 발명품><익살꾼 이야기>는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다. 특히 SF작가 쥘 베른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을 기가 막히게 조합해 만든 <죽음의 발명품>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결코 낡아 보이지 않는다. 카렐 제만의 독특한 기법과 상상력은 신기하게도 테리 길리엄을 위시한 현대의 영화작가들이나 감각적인 MTV 뮤직비디오들의 현대적 감수성과 오히려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뛰어넘은 시각적 경이로움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