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주영화제의 발견2: 디지털 장편영화 [4] - <책을 읽거나…>
2005-05-1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500만원으로 만든 초저예산 호러 <책을 읽거나 비둘기 모이주기>

산장에서 벌어진 섬뜩한 괴담

정강우 감독은 평소 막걸리를 마시면서 소일하다가 꿈에서 영화의 소재를 얻곤 한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책을 읽거나 비둘기 모이주기>도 꿈에 나온 영화였지만, 이번엔 스토리가 아니라 제목만 하나 떠올랐다. 천사가 그녀와 섹스한 진짜 이유는. 너무 직접적이고 재미없는 듯하여 제목을 바꾼 <책을 읽거나…>는 정강우 감독이 그 진짜 이유를 만들고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여 5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완성한 영화다. 소박한 발상과 규모지만 드문드문 던져진 단서와 조각난 플래시백을 조합해 단숨에 풀어헤치는 솜씨는 소박하지가 않다.

영화는 폭설 때문에 길이 끊긴 산장에서 진행된다. 고등학교 동창 영미와 지혜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떠나려고 하지만, 옆방 남자가 위험하다며 말려서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무심코 현관을 열어본 지혜는 죽은 애인과 똑같이 생긴 알몸의 남자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그를 방 안에 들인다. 자기가 천사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남자. 옆방 남자 인기 또한 이상하다. 검은 옷을 입은 무표정한 여자 오키와 함께 있는 인기는 박달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남모르게 몽둥이 잡은 손에 힘을 주곤 한다. 지혜의 방에 남아 있는 핏자국, 치사량의 수면제를 샀던 오키와 인기, 사라져버린 또 한명의 여자. 산장에 갇힌 네 사람의 비밀은 조금씩 섬뜩한 괴담이 되어간다.

지금까지 일곱편의 단편을 만든 정강우 감독은 “없는 살림을 규모있게 하다보면” 얻게 되는 알뜰한 노하우로 첫 번째 장편을 완성했다. 멜버른영화제에 초청된 단편 <돼지멱따기>가 제작비 1천만원과 스탭 20명이 투입된 성과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규모. 스탭과 배우를 더해 단 열명이 이 영화를 위해 동원된 인력 전부다. 조명도 거의 쓰지 못한 정강우 감독은 만약 제작비가 풍족했다면 <델리카트슨 사람들>처럼 미술에 공을 들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정강우 감독은 자본 대신 관습을 좇지 않겠다는 고집과 심각한 소재를 천연덕스럽게 풀어내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는 두쌍의 숙박객에게 각각 반전을 주고, 그 반전을 모아 또 한번의 반전을 만들지만, 놀라움을 강요하는 대신 싸늘한 여운과 웃음을 남긴다. 이 영화를 찍다가 자식처럼 키우던 비글 순이와 탄이를 산장 주변 국도에서 교통사고로 잃은 정강우 감독은 영화를 거의 포기할 뻔했지만 이들을 위해서라도 완성해야만 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감독의 말대로라면 이 영화는 “볼 게 거의 없는 영화”고, 쌍둥이 같은 산장의 방 두개와 인물 넷을 생각하면 동의하게 되지만, 이상하게도 보는 내내 딴생각을 할 수가 없다.

정강우 감독 인터뷰

“디지털이 아니라면 언제 이런걸 해보겠나”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나.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다. 정보통신회사에 다니다가 서른살에 그만두고 박철수 필름아카데미에서 1년을 공부했다. 그뒤 <봉자> 연출부로 일했던 게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조감독이나 감독 제의를 몇번 받기는 했지만 마음에 맞지 않는 영화로 서둘러 시작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영화를 만들고 있다. 난 영화 만드는 게 재미있다. 앞으로도 계속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제작비가 정말 적게 들었다. 처음부터 500만원으로 예산을 세웠던 건가.

=단편을 만들 때부터 예산이나 제작기간을 초과하지 않는 편이다. 이번엔 약간 차질이 생겨서 강원도 횡성에 갔더니 눈이 오지 않는 거다. 실내장면만 찍고 기다리다가 2월 중순에 충북에 폭설이 내렸다기에 산장 외부 장면을 그곳에서 찍었다. 배우들도 모두 평소 술마시면서 함께 놀던 사람들이다. 술마시다가 이사람들하고 영화 찍으면 되겠구나 싶어서 실제 인물을 모델로 시놉시스를 쓰고 몇명을 덧붙였다.

-대화하는 장면이나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장면을 찍는 방법이 독특하다.

=이 영화는 볼 게 거의 없어서(웃음) 긴장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사람들은 컷을 나누는 관습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이제 다른 사람으로 넘어갈 때가 됐는데 계속 한 사람만 찍고 있으면 뭐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긴장하게 될 것 같았다. 식탁장면은 거의 7분에 달한다. 비슷하게 찍으면 지루할 것 같아서 내가 카메라 들고 마이크를 붙이고 가운데 서서 계속 돌았다. 모험이었지만 디지털영화가 아니라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나 싶었다.

-관객 중에 반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원래는 날짜를 알려주는 자막도 없었다.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설명을 넣기는 했는데 100명 중에 한두명 정도 놓치지 않았을까 한다. 사실은 영화 만드는 사람 중에서도 예전 단편 <몽유>의 반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웃음) 하지만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반전이 드러나는 대사가 나오자 관객이 술렁이더라. 옆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사람들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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