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5] - 가브리엘 번
2000-04-1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우아한 사탄의 치명적 유혹

악마가 탐내는 남자의 몸이 그리스 조각상 같은 완벽한 신체는 아니다. 뭇 여성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나 싱그러운 향기 물씬 피어나는 젊음은 사탄의 노리갯감으론 적당해도 어둠의 마력을 보여주기엔 부족하다. <이스트윅의 악녀들>의 잭 니콜슨, <데블스 에드버킷>의 알 파치노를 떠올린다면 <엔드 오브 데이즈>의 사탄으로 가브리엘 번을 택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귀족다운 우아한 옷차림과 당당함에 험한 과거가 새겨 있는 이마의 주름,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에 연옥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날뛰지 않고도 분노와 격정을 보여주는 드문 배우다. 미국에서 찍은 첫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이후 그가 보여줄 연기의 스펙트럼을 하나의 프리즘처럼 보여준다. 갱스터와 필름누아르의 시공간에서 가브리엘 번은 보스의 정부와 치명적 관계를 맺는다.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긴 그는 보스와 상대방 조직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하지만 쉽사리 흥분이나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는다. 갱이지만 필름누아르의 탐정처럼 조직간의 전쟁에서 자신을 구할 방도를 구하느라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는 가브리엘 번은 <대부>의 숨은 실력자 로버트 듀발처럼 지적인 인물이며 험프리 보가트를 닮은 냉소와 고독을 긴 코트 자락에 휘감은 남자다. 비슷한 이미지를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건달 스타일인 나머지 인물들과 달리 ‘유주얼 서스펙트’ 5인 가운데 그는 가장 신사적이고 주도면밀하다. 가브리엘 번이 경찰에 체포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도입부를 보자. 고급 레스트랑에서 식사하는 도중 불청객으로 끼어든 경찰 앞에서 그는 태연하게 합석한 손님들에게 실례를 범해 죄송하다며 깍듯한 매너를 보여준다. 여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서 극중에서 로맨스라 불릴 유일한 행동이 가브리엘 번에게 일어난다는 게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범죄자일지라도 그에겐 동정심을 자극할 우아한 기품과 사려깊은 태도가 있는 것이다. 케빈 스페이시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가브리엘 번이 아니라면 카이저 소제의 위압감도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가브리엘 번이 카이저 소제의 총에 맞을 때 느껴지는 두려움은 그가 극중에서 보여준 거물다운 면모에 정확히 비례한다. 결코 당하리라 예상치 못한 인물이 쓰러질 때, 보이지 않는 인물 카이저 소제의 정체는 더욱 궁금해진다.

<유주얼 서스펙트>

가브리엘 번을 ‘지적인 여성의 섹스심벌’이라 부른 미국 언론의 반응은 호들갑스럽긴 하지만 그릇된 것은 아니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한 교사 출신이며 수시로 제임스 조이스와 조지 오웰을 인용할 만큼 교양이 풍부하다는 점은 곧잘 그 근거로 제시된다. 게다가 아일랜드에서 온 남자라는 영화 외적 조건은 얼굴에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다. 그는 말론 브랜도 같은 육중한 카리스마나 로버트 드 니로의 폭발적인 에너지 없이도 명암이 분명한 밤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왔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예술가란 무의식을 퍼올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말대로, 가브리엘 번은 갱스터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로부터 고립된 자에 대한 연민과 질서를 파괴하는 순간의 매혹을 동시에 전달하는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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