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함이 그들 정의로 몰아넣었다
<LA컨피덴셜>은 흐트러진 미궁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다. 하나의 죽음은 또다른 죽음과 맞물리고, 조각난 사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타락을 각기 다른 형태로 반사한다. 길을 찾으려 애써 보아야 소용없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환한 햇살이 어떤 어둠의 흔적도 지워 버리는, 이곳은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어둠만이 존재하는 고담시의 지배자 잭 니콜슨(<배트맨>)도 이 눈부신 도시에서는 질척거리는 욕정과 끈끈한 먹이사슬의 고리 속에 통로를 놓치고 만다(<차이나타운>). 알 수 없는 LA의 마력은 야수 같은 니콜슨의 본능조차 흡수해 버린다.
형사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가 음모에 휘말린 곳은 하필이면 이런 도시다. 모든 퍼즐에는 해답이 있고 모든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지만, LA에서는 그런 원칙이 통하질 않는다. 그저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여배우 베로니카 레이크를 닮은 금발의 창녀와 마약에 취한 환각의 밤이 기다리는 이 도시는 키높은 나무 대신 끝모를 욕망이 그늘을 드리우는 정글이다. 이 미로를 더듬기에 러셀 크로(35)의 눈빛은 너무도 무력하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버린 것 같은 이 남자가 모든 음모의 매듭을 한번에 끊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둘 곳 없던 마음을 의지한 창녀 린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동료의 죽음에 부딪쳤을 때, 그리고 자신이 지켜왔던 삶의 행로를 무언가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순간적으로만 폭발하던 크로의 난폭함은 음모의 중심에 파고드는 공격으로 변한다. 평범한 남자의 분노가 터져나올 땐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이다.
더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고 목사로 살아가려 했던 <퀵 앤 데드>의 코트도 그랬다. 자신없이 흔들리며 정면을 쳐다보지 못하는 눈동자, 모호하고 흐릿한 윤곽의 그가 누구보다 빨리 총을 쏘는 최고의 총잡이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크로는 먼지섞인 바람을 뒤로 하고 떠난 <하이눈>의 게리 쿠퍼처럼 여운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쿠퍼와 마찬가지로 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을 전한다. 환영받지 못하는 구원자가 크로의 모습이다. 린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LA컨피덴셜>에서처럼 <퀵 앤 데드>에서도 크로는 그늘 속에 머문다. 혹은 <인사이더>의 제프리 와이갠드는 어떠한가. 소심한 과학자 와이갠드는 담배회사가 은폐한 진실을 공개하려던 결심을 포기하려 하지만, 회사가 직접적인 협박을 가해 오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법정에 나선다. 더듬거리던 그의 말투까지도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되어 거짓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떠들썩한 환영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는 당위만이 남은 채 크로는 변함없이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무게로 삶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일을 누군가는 차마 떼어내지 못한 채 그대로 짊어지고 간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버릴 수 없는 것뿐이다. 때로는 크로를 짓누르고 때로는 그를 계산없는 정의감에 몰아넣는 것은 바로 그 삶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