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복기를 거치고 바이러스가 눈을 뜬다
죄악의 땅. 그늘과 습기로 가득 찬 이곳에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아이를 낳는 일마저 또 하나의 형벌이 될 뿐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주 가까운 어느 미래의 묵시록처럼 보이는 영화 <쎄븐>은 이 질문에 ‘정화’(淨化)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살인을 통한 정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파멸시킬 일곱 가지 죄악에 차례로 징벌을 가하는 살인자. 그가 바로 케빈 스페이시(40)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얼굴로 도시의 폐부에 은밀하게 스며들고 끝내 그 자신마저 제물로 삼아 도시를 청소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냉혹함보다 섬뜩한 것은 끝내 흔들리지 않는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모든 감정이 지워진 스페이시의 눈동자만큼 불가해한 악(惡)이 또 있었을까. 경찰청에 들어섰을 때는 누구도 그 살인의 그림자를 알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살인자라는 단 한마디 외침으로 그는 죽음의 냉기와 동일한 존재가 된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목소리, 평범한 체격의 스페이시가 뿜어내는 냉기는 진원을 짐작할 수 없다.
전통적인 필름 누아르의 시대였다면 스페이시 같은 배우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두운 조명을 안고 나타나는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들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이미 뚜렷한 악의 파장을 전한다. 그러나 스페이시는 바이러스처럼 잠복해 있다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배우다. 그는 미친 듯한 살인의 질주에 몸을 내맡기는 <내추럴 본 킬러>의 우디 해럴슨이나 처음 본 순간부터 독기어린 시선으로 위압하는 <양들의 침묵>의 앤서니 홉킨스와 다르다. <쎄븐>에서 스페이시는 분명한 목적과 치밀한 순서에 따라 살인을 하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살인을 밝힌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는 한층 더 냉정하다. 발을 끌며 걷던 초라한 절름발이 버벌 킨트의 다리가 조금씩 펴지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악마’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범죄자 카이저 소제가 되어가는 순간, 사악하도록 차가워지던 그의 표정은 영화에 어떤 반전보다도 명쾌한 마침표를 찍는다.
<LA 컨피덴셜> 역시 사람들의 선입견을 뒤집는다. 스페이시가 연기하는 형사 잭은 돈과 화려한 명예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타락한 경찰과 마약상 사이의 커넥션에 파고들어 희생자가 되는 인물도 경찰로서의 의무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듯 하던 잭이다. 그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핵심을 드러낸다. 이처럼 스페이시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스크린에 나타나 차츰 그 존재감을 확장해 간다. 처음부터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그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은 더욱 치명적이다.
무난한 외모 뒤에 숨은 스페이시의 본성은 누아르가 아닌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주위 사람들을 상하게 한다. <가디언>은 할당받은 부동산을 모두 팔지 못하면 해고해버리겠다고 나이든 부하 세일즈맨들을 위협하는 <글렌게리 글렌로스>의 스페이시에 대해 “이렇게 잔인한 상사 밑에서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평했다.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에서도 그는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린 부하 직원을 농락한다.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광기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을 수 있는 이성으로 무장한 악한 케빈 스페이시. 언제든 자신을 은폐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는 케빈 스페이시는 투명인간과 같다. 그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