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불빛 아래 앙상하게 윤곽을 드러낸 도심의 밤, 범죄와 음모가 스멀거리는 문명의 그늘, 자신 외에는 믿을 것 없는 현실의 생존법칙 앞에 선 삐딱한 사내들.
험프리 보가트의 찌푸린 양미간과 잭 니콜슨의 음울한 표정의 시대는 갔어도 도심의 뒷골목, 누아르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만물의 법칙이 그러하듯, 누아르 세계에도 세대교체가 있다.
보가트의 후예들, 할리우드를 점령하다
한적한 L.A 교외의 폐모텔,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가르며 한대의 차가 들어온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먼저 도착해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건네고, 서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두 사람은 누군가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닫는다. 연관이 없어 뵈는 일련의 살인사건이 거액의 마약을 노린 상사의 음모 때문임을 알게 된 두 형사 버드 화이트와 에드 엑슬리. 자리를 미처 피하기 전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는 불빛이 다가오고, 총을 집어든 두 사람은 폐건물의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인다.
고독한 형사, 돌아오다
커티스 핸슨이 98년에 선보인 <L.A.컨피덴셜>은 그물처럼 얽키고 설킨 도시의 범죄와 타락을 누아르 형식으로 그린 수작.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해변, 일자리도 풍부하고 운좋으면 할리우드 스타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50년대 L.A를 무대로, 화려한 도시 이면에 감춰진 마약과 매춘, 타락한 범죄의 온상이라는 추악한 뒷모습을 담아냈다. 조직범죄와 경찰의 부패, 그릇된 욕망으로 물든 도시의 명암을 그려낸 이 영화는 고전적 누아르의 맥을 잇는 90년대적 누아르라는 평가와 함께 평단의 격찬을 받았다. <L.A.컨피덴셜>은 동시에 누아르 영웅의 귀환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음모와 혼돈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고독하고 불안한 남자의 체취, 그 점액질의 위험한 매혹이 선한 해결사의 명쾌한 영웅담 사이를 비집고, 참으로 오랫만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 어두운 뒷골목엔 케빈 코스트너와 톰 행크스, 혹은 브루스 윌리스와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명료한 표정 대신 천사와 악마의 이종교배로 태어난듯한 케빈 스페이시와 러셀 크로가 형사 잭 빈센트와 버드 화이트로 분해 음산한 눈빛으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90년대 할리우드가 발견한 최고의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두해전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또다른 수작 누아르에서 가브리엘 번과 끝을 짐작키 어려운 거대한 음모의 게임을 벌이지 않았던가.
어둠, 이상심리의 삐딱한 사내들
누아르의 어두움을 품은 주인공들은, 수려한 미모와 부드러운 이미지로 여성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할리우드의 미남 스타들이 주로 연기하는 주류 백인 영웅들과는 거리가 먼 반(反)영웅에 가깝다. 게리 쿠퍼와 로버트 테일러에서 로버트 레드퍼드와 케빈 코스트너, 그리고 톰 행크스로 이어지는 선량하고 정의로운 WASP의 전형적인 영웅들과 달리 이들은 음울한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으로 관객의 불안과 공모한다. 희미한 불빛 아래 앙상하게 윤곽을 드러낸 도시의 밤거리, 끊임없이 범죄와 음모가 생멸하는 문명의 그늘에서 살아남고자, 자신 외에는 믿을 것 없는 현실에 의혹과 냉소의 눈길을 보내는 삐딱한 사내들. 이들은 혼돈과 음모의 장르인 필름누아르를 탯줄 삼아 불안과 소외가 만연한 2차대전 직후에 대거 등장했다. 매끈한 영웅담으로는 급변하는 성정치학의 변화와 도시화의 멀미를 더이상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야수적이고 난폭하며 성적으로 혼돈된 이상 심리의 소유자”인 누아르의 주인공들이 전쟁이란 비상구마저 닫혀버린 전후 미국 도시인들의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며 스크린을 누볐다.
주류 영웅들과 차별화되는 반영웅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누아르 배우의 계보는, 30년대 갱스터영화로 명성을 얻은 에드워드 G.로빈슨과 제임스 캐그니로 거슬러올라간다. 로빈슨과 캐그니는 각각 <리틀 시저>(1930)의 리코 반델로와 <인민의 적>의 토미 파워스 등으로 갱스터의 전형을 제시한 배우들이다.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으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리코나 토미는, 사회 질서를 무시하고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갱스터의 개성으로 스크린 속에서 무정부주의적 반영웅의 이미지를 얻는다. 한편 홀어머니와 오랜 동료에게 집착에 가까운 헌신을 보이는 토미처럼, 사회의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은 소외되고 불안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로빈슨과 캐그니의 이러한 이미지는 갱스터영화와 누아르가 만난 하드보일드 탐정 장르가 주류로 떠오른 40년대에도 이어지는데, 특히 <화이트 히트>에서 캐그니가 연기한 갱스터 코디는 하나의 정점을 보여준다. 필요하면 동료도 죽이는 잔혹함과 어머니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나약함의 이중성을 지닌 코디는, 동료와 아내의 배신으로 어머니를 잃고, 가장 믿었지만 사실상 위장경찰이었던 동료에게 쫓겨 정유공장에 이른다. 정유 탱크에 총을 난사해 엄청난 폭발 속에 사라지기 직전, 경찰들에게 비웃음을 퍼부으며 “어머니 해냈어요! 세상의 꼭대기예요”라고 외치는 그의 광기는 압권이다.
캐그니·로빈슨-보가트-니콜슨-드니로
캐그니와 로빈슨을 잇는 험프리 보가트는 필름누아르가 가장 사랑한 배우. 표정과 말투, 그리고 담배 피는 모습까지 당대의 아이콘이 돼버린 보가트는 전설의 보물인 매 조각상을 차지하려는 암투를 그린 필름누아르 <말타의 매>에서부터 노련하고 비정한 사설탐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답지만 거짓투성이인 미모의 의뢰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살인사건에 휘말린 탐정 스페이드는 침착하게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중절모와 깔끔한 양복차림, 양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나 줄담배를 피우는 습관, 나직하되 당당한 목소리와 말투 등 보가트의 이미지는 사설탐정 그 자체였다. 실제 연인 사이인 로렌 바콜과 공연한 <빅 슬립>에서도 마찬가지. 대부호의 둘째딸의 도박 빚을 해결하러 나선 탐정 필립 말로우는 뜻하지 않게 복잡한 살인사건을 맞닥뜨리고, 사건과 연루된 비밀을 간직힌 큰딸과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대부분 제도적인 부패나 제약 때문에 경찰이나 검사 사무실을 떠나 자신만의 성채인 사무실로 물러난 인물들. 고립적이고 자기 의존적인 이들은 타락한 현실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이지만, 하드보일드한 외모와 달리 상처받기 쉬운 도덕주의자며 비타협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컬러시대가 시작된 이래 주춤하던 누아르의 계보는 바로 그런 하드보일드 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잭 니콜슨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살인사건을 매개로 미망인 페이 더너웨이와 사랑에 빠지는 제이크 기츠는 과거 지방검사를 돕다가 물러난 탐정. 제도에 길들여지기를 싫어하고, 더너웨이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속았다고 생각되자 폭력을 행사해 진실을 듣고 마는 그 역시 사회보다는 자기 본위의 인물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 나온 로버트 드 니로도 누아르와 반영웅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배우.
음울한 반영웅들, 할리우드의 주류로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영화에 출연한 잭 니콜슨과 로버트 드 니로를 상상하기 힘들다면, 1980년대에 반영웅의 계보도가 후계자를 찾지 못한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은 일. 캐릭터가 플롯의 속도에 밀려난 블록버스터의 시대엔 이상심리의 반영웅이란 기껏해야 약간 흥미로운 조연의 비중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영웅의 귀환은 할리우드가 드라마의 긴장을 잃고 속도와 스펙터클에 매몰된 1990년대 전반을 통과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유주얼 서스펙트> <세븐> <히트> <L.A.컨피덴셜> 같은 수일한 필름누아르의 재래, 그리고 최근 2, 3년간 드라마의 긴장과 캐릭터의 힘을 되살린 신인감독들의 맹활약이 어둠의 배우들을 스크린의 주인공으로 복권시켰다.
올해 아카데미의 남우주연상 후보 명단은 이례적이었다. 90년대판 제임스 스튜어트인 톰 행크스가 예상을 깨고 탈락한 자리를 케빈 스페이시(<아메리칸 뷰티>), 러셀 크로(<인사이더>), 숀 펜(<스윗 앤 로다운>)이 채웠다. 표정의 평균 밝기를 측정하면 아카데미 사상 최저였을 이 음울한 스타들(차라리 흑인 덴젤 워싱턴의 표정이 훨씬 화사하다)을 할리우드는 얼마나 끈기있게 사랑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이들의 건재와 할리우드 영화의 완성도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