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작가를 만나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
히치콕(1899∼1980)은 이제 신화다. 살찐 이중턱 위로 삐죽 나온 아랫입술과 불룩 나온 배가 그려내는 특유의 실루엣으로 한눈에 그임을 알아보게 하는 이 감독이 영화사에서 거의 신격화된 존재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바로 지난해 전세계 영화계가 이 거장의 탄생 100주년을 ‘경건하게’ 기념한 ‘사건’이다. 세계의 영화인들은 20세기, 즉 영화의 세기를 히치콕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함으로써 보낸 것이다. 영화탄생 100주년과 맞먹을 정도로 자신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인이 도대체 또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히치콕은 중고등학생 시절 텔레비전의 흑백 브라운관을 통해 다가왔다. 당시 나는 앨프리드 히치콕이란 이름을 ‘서스펜스의 거장’ 정도로 알고 있었다. 여기에 그가 자기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한번씩 얼굴을 내미는 독특한 감독이며, 한 장면 한 장면 손수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완벽주의자고, 형식상의 실험과 카메라테크닉 구사에 특출하다는 것 등이 나의 ‘상식’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좀더 지나면서 나는 히치콕이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라 ‘작가’로 간주된다는 것을 알았고, 조금 더 지나자 그가 만든 영화들이 아예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됨을 알게 되었다.
히치콕을 바로 ‘작가’로서 재발견한 사람들이 <카이에 뒤 시네마>에 포진하고 있던 프랑스의 젊은 비평가·감독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으로 프랑수아 트뤼포가 있었다. 그 자신이 누벨바그를 주도하는 중요한 감독의 한 사람이었던 트뤼포는 이 선배감독에 대한 한없는 흠모의 마음을 안고 히치콕을 찾아가 장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 결과가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이며, 1968년에 영어본이 간행된 이 책 자체가 ‘히치콕=작가’라는 인식을 영미권 전체로 확산시킨 주요 공신이기도 하다.
히치콕을 만나러 가던 도중 트뤼포가 연못에 빠진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에서, 우리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핵심을 짚어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직접 보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예컨대 히치콕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하게 되었는가(이 방면에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이다), 또는 <의혹>에서 케리 그랜트가 들고 가는 우유잔이 어떻게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히치콕의 작품세계 전모와 그것을 형성하는 그의 세계관 자체를 살펴볼 수 있다. 히치콕을 보고 읽어야 할 이유는 많다. 좀더 큰 문화적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은 그의 영화들에서 무의식과 욕망의 논리를 다시 읽어내고, 페미니즘은 그것이 성차화되는 메커니즘을 재발견하며, 어떤 철학자는 인물들간의 관계 그 자체가 이미지화하는 방식을 본다. 이 모든 성찰들은 다음과 같은 지점으로 귀착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감독과 카메라와 관객이 서로 연루되는 방식을 드러내 준다. 즉, 그의 영화들은 우리가 영화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게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치는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이 공히 가진,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흔치 않은 책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히치콕은 순수한 영화적 방식 그 자체의 구현에 가장 근접한 작가다. 그는 인물의 감정 및 그가 처한 상황과 관계를 순전히 시각적으로만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런 점에서 배우란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그레이스 켈리 또는 티피 헤드런의 아름다움(이른바 쿨 뷰티)을 그보다 더 잘 포착해낸 감독이 누가 있는가?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애정 덕분이 아닐까? 바로 그런 그가 영화사랑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트뤼포와 만난다. 히치콕이 영화사상 역시 손꼽을 시네필 트뤼포와 만난 것은 그로서는 또한 행운이었다 할 것이며, 이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우리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인 것이다.
저자 소개/
프랑수아 트뤼포는 누벨바그를 이끈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195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을 비판하고 ‘작가 정책’을 천명하였으며, 1959년 <400번의 구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감독 활동에 들어섰다. 그는 사실상 누벨바그 작가들 가운데 가장 따뜻한 감성의 영화들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