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무엇을 하는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영화 책은 별로 기억이 없다. 대학 초년생 시절, 그 당시로는 영화 책이 가장 많았던 서강대 도서관에 여름방학 동안에 죽치고 앉아서 잉마르 베리만의 비평서나 피터 울른의 <영화의 기호와 의미>를 뜻도 모르면서 붙잡고 있기도 했지만 결국 다 읽는 데는 실패했다. 그보다는 옛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월간지 <영화>의 번역 글을 읽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행간에 새마을운동 구호가 적혀 있고 박정희 대통령 어록도 심심치 않게 실려 있던 70년대 유신시대의 그 월간지는 영화가 한국에서 얼마나 구박받던 매체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지만 매 호마다 꼭 실리는 번역 글은 재미있었다. 하길종 감독이 번역했던 ‘영화는 메타포가 아니다’라는 잉마르 베리만의 에세이, 배창호 감독이 번역한, ‘70년대 미국영화의 자식들 세대’ 감독의 스타일에 관한 리처드 제임슨의 ‘스타일 대 스타일’과 같은 글이 기억난다. 교열이 엉망이어서 책을 읽으며 맞춤법이 틀린 부분을 군데군데 빨간 사인펜으로 그어가며 읽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80년대까지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대부분의 영화 책 수준이 그랬다. 아서 나이트의 <영화 예술로서의 성장> 같은 책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영화이론에 관한 독서량이라는 것도 미미했다. 물론 진흥공사에 발간한 책들 가운데도 읽을 만한 것들은 많았다. 카렐 라이츠의 <영화 편집의 기법>이나 <5C 영화술> 같은 책은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래도 정신은 치졸했을 망정 의지는 충천했던 영화학도가 읽을 만한 한글로 된 마땅한 책은 그리 많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원서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중반에는 대학가 영화 동아리에서 그때까지 번역서가 없었던 루이스 지아네티의 <영화의 이해>를 원서로 학습하는 것이 유행이자 일반적인 대세였다. 달리 마땅한 개론서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사실 <영화의 이해>는 개론서로 유익하기 그지없는 책이었다. 내가 속해 있던 영화 동아리에서는 신입 회원을 받으면 늘 이 책으로 공부했고 어느새 선배가 된 나는 후배들만 들어오면 이 책으로 공부를 시켰던 기억이 난다. 명색이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배라 하는 수 없이 책을 되풀이해 읽었는데 나중에는 <영화의 이해>도 달달 외울 정도가 됐다. 지금도 평이한 개론서로는 이 책 이상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앙드레 바쟁을 만났다. 40년대부터 50년대 말까지 활동했으며 마흔의 나이에 타계한 바쟁은 개개의 영화에 대해 꾸준히 평을 썼던, 이론가가 아니라 비평가였다. 그런데도 그의 비평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어서 사후 출간된 그의 비평 모음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영어권에서도 1, 2권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붙여놓았지만 사실 바쟁은 늘 영화로 무엇을 하는가라고 물었던 비평가였다. 바쟁의 그 유명한 존재론적 리얼리즘의 테제는 어떤 대상에도 유연하게 적용되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 보존 관습에서부터 조형예술의 심리적 기원을 따진 ‘사진 영상의 존재론’과 같은 글에서 바쟁은 현실의 시공간을 물리적으로 보존하려는 인류의 욕망이 마침내 구현된 매체가 영화라고 말했다. 바쟁은 이 존재론적 리얼리즘을 ‘스타일 없는 스타일’의 이상을 구현했던 네오 리얼리즘 영화에서부터 자연 과학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두루 고찰하면서 관철시켰다.
바쟁은 도그마에 얽매여 비평 대상인 영화를 축소시키는 그런 쩨쩨한 비평가가 아니었다. 바쟁은 편안한 에세이 문체로 조금씩 조금씩 영화의 내부로 들어가서는 마침내 그 영화의 의미와 느낌을 풍부하면서도 정확하게 집어내는 신중하고 사려깊은 비평가였다.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가 각색없는 영화의 이상을 실현한다고 그가 썼을 때 그런 그의 표현은 브레송 영화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이 주는 감동을 거의 완벽하게 글로 옮겨내는 것이었다. 60년대 이후 영화비평이 과학을 주장하면서 바쟁은 후배 영화이론가들의 주된 공격대상이 됐지만 이성과 감정을 동시에 일깨우는 비평은 바쟁이 죽고 나서 이미 끝났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세상에는 바쟁만큼 훌륭한 비평가가 얼마든지 있다고 내가 만난 어떤 감독은 주장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허세없는 지성으로 표현하는 비평가는 고금을 통틀어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도 나는 가끔 글쓰기가 힘들어지면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꺼내든다.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와 더불어 바쟁의 책은 유연하고 세심하고 정확한 비평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아마 나는 평생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저자소개/ 앙드레 바쟁 (1918∼1958)
프랑스 비평가. 앙제에서 태어났으며 30년대 말부터 비평가로 활동했다. 40년대에는 앙리 랑글르와아와 함께 시네마테크 운동을 주도했으며 이때 시네마테크를 드나들던 영화청년들과 함께 50년대 초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창간해 프랑스 비평문화를 이끌었다. 훗날 누벨 바그 감독으로 데뷔한 이 <카이에 뒤 시네마>의 동인들에게 바쟁은 정신적 지주였으며 이들과 함께 바쟁은 할리우드영화와 프랑스영화를 재평가했으며 프랑스 영화산업에 누벨 바그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쟁은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결국 대학 강단에 서지 못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집필 활동에 몰두했다. 개개의 영화를 꾸준히 비평했고 사후에 그의 평론을 모은 선집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