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8] - <낮은 목소리2> 제작노트
2000-04-04
글 :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낮은 목소리2> 제작노트

‘다큐멘터리는 영화의 심장이다’ 라는 말이 있다. 영화사는 다큐멘터리로부터 시작되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에도 진실을 찾는 카메라의 역할을 다큐멘터리는 훌륭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동안 다큐멘터리 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획일화된 이른바 문화영화나 TV다큐멘터리만을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아예 그 전통이 부재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문화의 부재는 한국영화문화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아주 전형적인 예이다.

그런데, 90년대부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는(길을 찾는 것이 아닌) 제작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푸른영상이나 보임이 바로 그러한 집단으로, 그들은 사막에 싹을 틔우는 것과도 같은 무모한 그러나 의미있는 작업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최근에 변영주 감독은 만 7년여에 걸친 기나긴 하나의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지난 93년부터 시작된 정신대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3부작’이 완성된 것이다. 이 7년간의 걸친 대장정에서 그녀와 보임이 겪었을 어려움의 일단을 보임에서 펴낸 <낮은 목소리2 제작노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머리말에 나와 있는 것처럼 ‘독립영화인인 그들이 무엇에 의존하고, 무엇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 문화 자체가 부재하는 이 땅에서 그들은 ‘낮은 목소리’의 제작과정에서 제작비조달과 배급망의 구축, 검열로부터의 자유 등과 같은 모든 분야에 새롭게 도전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나름대로의 전망을 이 책에서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받게 되는 감동은 독자로 하여금 열악한 한국의 다큐멘터리 문화의 현주소를 단순히 머리로만 인식하고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그들의 열정과 눈물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데 있다. 특히 변영주 감독이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하여 나름대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 할머니들과의 관계를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야 할 필요성, 아우러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깨달아가는 과정이 특히 새겨 읽을 만한 대목이다. 이를테면 강덕경 할머니가 임종하고 난 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찍을 때 스탭들이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말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케 한다. “나중에 러시필름봤을 때 눈물 때문에 화면이 흔들리고, 우는 소리 들리면 안 되는 거 알지….”

이 책의 후반부에는 아마도 변영주 감독의 이러한 다큐멘터리관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두명의 다큐멘터리 감독 요리스 이벤스(네덜란드)와 오가와 신스케(일본)에 관한 짧은 글들이 실려 있다. 영화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화인들인 이들의 삶과 작품이 한국에 꼭 한번은 소개돼야 한다는 생각을 필자 개인적으로도 평소에 가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를 통해 그들의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그들이 평생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마침내 ‘도인(道人)이 된 사람’으로 믿고 있다. 평안한 삶을 내팽개치고, 고통받는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그들을 카메라로 껴안았던 이들의 삶은 언제나 무한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유작 <바람의 이야기>(1988)의 마지막 장면에 나와 자신의 삶을 바람과 함께 마무리하는 요리스 이벤스의 모습은 영화사상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평소에도 나는 이 땅에도 저런 다큐멘터리 감독 한명쯤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변영주 감독이 이들에 관한 짧은 글을 실은 이유는 자신이 존경하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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