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1]
2000-03-21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게릴라 테크놀로지, 충무로 침공전야

서울 이문동 영상원 스튜디오에 마련된 <빤스 벗고 덤벼라> 촬영장엔 촬영감독이 둘이다. 한 사람은 충무로 출신 이병호 기사, 다른 한 사람은 영상원 졸업생 김병서(23)씨다. 이병호씨가 35mm 카메라로 영화 속 영화 <보일러>를 찍고 있고, 이병호씨가 <빤스 벗고 덤벼라>의 촬영감독이다. 이병호씨는 말하자면 촬영감독이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인 셈이다. 말하다보니 좀 헷갈린다. 자세히 설명하면, <빤스 벗고 덤벼라>는 예술 영화 <보일러>에 출연한 에로물 출신 여배우 이야기다. 예술 영화에 출연했으니, 점잖고 지적인 연기만 할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벗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고민이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도 감독 말대로 빤스 벗고 덤벼야 하나.

6mm다윗과 35mm 골리앗의 한판?

<빤스…>는 전주영화제가 기획한 삼인삼색 디지털 영화 <N>의 첫 번째 영화. <N1>이 주제이며 <빤스…>는 부제. 박광수 감독은 여배우의 고민을 찍는 척하면서 테크놀로지의 고민을 슬쩍 얹어놓았다. 디지털의 ‘마’를 기자에게 말한 사람은 영화 속에서 전통적인 필름 영화 <보일러>를 찍고 있는 이병호 기사다. 그의 처지는 묘하다. 디지털 카메라에 포위된 채 35mm 영화를 찍고 있는데, 그가 찍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몸통이 아니라 그 속의 이미지일 뿐이다. 충무로가 아닌 영화학교 스튜디오에서 이루지고 있는 디지털과 35mm의 역할 전도가 썩 편치 않은 모양이다. “저렇게 작으니까 집중력이 없지 않아요?”

그가 보기에 작고 볼품없는 6mm 디지털 카메라에는 권위가 없다. 필름으로 습작이라도 찍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자, 슛”이라는 감독의 말과 함께 작동하는 35mm 카메라의 육중한 카리스마를, 차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필름 소리의 마력을. 필름은 명료하다. 이 셀룰로이드의 표면에 저 살아 있는 공간의 빛과 사물들이 투명한 렌즈를 통과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비칠 것이다. 그게 영화 아니던가. 디지털 카메라는 믿을 수가 없다. 8mm보다 16mm가, 16mm보다 35mm가 더 위대한 법인데, 6mm밖에 안 되는 카메라가, 그것도 필름도 없이 이상한 기호화 과정(그게 디지털라이제이션이라던가)을 거쳐 살아움직이는 세상을 담아낸다니…. 더구나 앞으로 저 물건이 영화동네에서도 행세하는 세상이 온다니….

디지털 카메라를 든 박광수

30분짜리 디지털 영화가 주어진 프로젝트였다 해도, ‘디지털 카메라를 든 박광수’는 의미심장하다. 겉으로 보이는 정직함과는 달리, 필름의 권위를 자랑하는 주류 영화는 대개 매끈한 환상과 세련된 조작을 추구했다. 그 반대편에서 ‘진실의 영화’를 주창하는 가난한 독립영화인들이 날렵하고 저렴한 디지털 카메라를 그들의 무기로 사용해왔다. 디지털 카메라는 적어도 지금까진 게릴라의 총포였다. 누가 봐도 충무로 중견인 박광수 감독이 충무로에서 새 테크놀로지와 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속을 보면 박 감독도 게릴라다. “나는 충무로 감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박 감독은 말했다. 충무로 시스템의 허용치를 매번 위반하며 역사적 진실에 매달렸던 박 감독은 그와 동시에 새로운 매체,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베를린 리포트>에선 스테디캠을,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선 컴퓨터그래픽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선 뷰파인더의 권위를 무너뜨린 모니터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박광수 감독이다. <이재수의 난>의 오프닝과 라스트신에서는 6mm와 베타캠을 섞어 사용했다. 이 시도들은 새 테크놀로지의 미학적 잠재력 실험이면서, 동시에 탈충무로 시스템에 대한 은근한 탐색이었다(박 감독이 촬영장에서 모니터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촬영감독협회가 한동안 모니터 사용 금지령이 내린 적도 있다).

'마'가 낀 디지털, 현실과 영호의 경계를 허문다.

<빤스 벗고 덤벼라>는 충무로와의 이별을 늘 염두에 둔 박 감독에겐 적시의 프로젝트인 셈이다. 예산 5천만원에, 러닝타임 30분이 그에게 주어진 한계. 7년 묵은 단편의 아이디어를 되살리면서 박 감독은 35mm 영화 찍기를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건 디지털의 장점을 100% 활용하는 길은 아니다. 35mm 촬영현장을 꾸미기 위해선 많은 스탭들, 정확히 말하면 스탭 역의 배우들을 동원해야 하고, 35mm용 조명 및 음향 장비도 갖춰야 하며, 공간도 실내로 영화 속 영화 <보일러>가 찍히고 있는 실내 촬영장으로 한정돼 있다. 대신, 다섯대의 디지털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면서 박 감독은 시점의 뒤섞기가 발휘하는 효과를 시험하고 있다. 우리가 상영장에서 보게 될 영화는, 일반 관객 눈에 잘 드러나지 않게 될진 몰라도, 디지털 화면과 35mm 화면이 번갈아 나타나게 된다. 박 감독의 디지털 영화 <빤스 벗고 덤벼라>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면서 은밀하게는 디지털 자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디지털의 ‘마’가 어떤 위험과 위력이 있는지에 대한….

<빤스 벗고 덤벼라>의 촬영장은 얼핏 보기엔 보통 촬영장과 똑같다. 35mm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영화를 찍고 있으며, 붐 마이크맨이 땀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묘한 건 감독이 ‘컷’을 외쳐도 스탭들의 몸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박 감독의 입에서 다시 ‘컷’이 터진다. 두 번째가 진짜다. 그 빈 시간에 디지털 카메라 네대는 곳곳에서 촬영장의 다양한 모습을 훑고 다닌다. 눈에 띠지 않는 곳에 은밀한 지켜보기의 시선의 제5카메라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빤스 벗고 덤벼라>의 메이킹을 찍는 디지털 카메라도 있다. 모두 7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니까 언제 어디서 자신이 찍힐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성근씨는 <보일러>의 남자배우 역으로(자기 이름 그대로) 출연해, 이날 자기 촬영분이 없지만 나와서 여배우에게 연기지도를 한다. 카메라가 그를 비추고 있어도 <보일러> 메이킹인지 <빤스 벗고 덤벼라> 메이킹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여배우에게 “정사 장면에선 말이야…”라고 말한다. <여고괴담> 프로듀서 오기민씨도 프로듀서 역을 맡아 앉아 있지만 언제 자기가 찍혔는지 모르고 있다. 옆에서 구경만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가 영화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다. 30명가량 되는 <빤스…>의 스탭들은 대부분 <보일러>의 스탭 역을 겸한다. 말하자면 그들도 모두 연기자다.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자연스럽게 헷갈린다. <보일러>의 감독이자 <빤스…>의 감독인 박광수 감독도 모르고 있다. 아니 정해놓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느 카메라에선가 가장 자연스러운 촬영 모습이 포착된다면 그걸 택할 것이다. 즉흥연출과 다큐적 생동감. 디지털 카메라의 기동성과 날렵함이 빛나는 대목들이다.

30분에 담긴 한계와 윤리와 기술의 실험

스탭들도 대부분 박광수 감독의 영상원 제자들이 맡고 있다. 영화학교 안의 촬영장, 학생이거나 갓 졸업한 스탭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다 무대 안과 밖의 경계가 무화되는 이야기, 즉흥 연출 같은 요소들이 <빤스 벗고 덤벼라>를 마치 패기있는 영화학도의 실험영화처럼 느껴지게 한다. 2월26일날 30시간가량 찍었고, 이후 몇 차례의 보충촬영으로 40시간 분량을 찍었다. 스쳐지나듯 찍은 이 테이프들을 뒤져 30분의 단편영화가 탄생할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수호자라는 다소 고답적인 칭호를 들었던 박광수 감독은 이 30분 안에서 테크놀로지의 한계, 리얼리스트적 윤리, 장편의 구속이 방해해왔던 모든 주제와 기술의 실험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빤스 벗고 덤벼라>는 이런 얘기

에로 비디오계의 스타가 충무로에 진출한다. 몰래카메라로 찍힌 그녀의 에로 비디오는 그녀와 외모가 비슷한 유명 스타 김XX양 비디오로 인터넷에 소개돼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자신임을 양심선언한 여배우는 야비한 비디오사 사장, 자기한테 반했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생활에까지 침범해오던 인터넷 꼬마를 멀리 하고 이제 예술 영화에 출연해 진짜 연기를 하려 한다. 그러나 예술 영화에서도 벗어야 한다는 게 문제. 오늘 촬영은 정사 장면인데, 그녀의 흰색 팬티가 감독과 스탭들한테 거슬리는 것이다. 감독은 계속 벗으라고 요구하고, 그녀는 다시 벗지 않겠다는 맹세와 예술적 요구 사이에서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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