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4] - 독립 다큐멘터리와 디지털 영화
2000-03-21
글 : 이영진

더욱 쉽게, 값싸게, 신실에 가까이

<명성, 그 6일의 기록>

뜨거운 거리의 함성, 유폐된 창살 아래 깔린 침묵, 후미진 구석의 외로운 투쟁. 80년대 후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독립영화 단체들에는 아무도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들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홈 비디오를 들고 나섰다. 16mm 필름 작업에 비해 가격이 싸고 복제가 쉽고 조작이 용이하며 현장에서의 기동성이 중요했던 이들에게 성능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저 카메라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로부터 10여년. 사무실은 새로운 디지털 주인들이 차지했고 예전에 현장을 누볐던 기기들은 유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독립 다큐멘터리의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96년부터. 당시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우수한 디지털 카메라는 소니의 VX1000였는데, 97년 푸른영상의 <명성, 그 6일의 기록>, 서울영상집단의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이 카메라를 썼다. 하지만 생방송 수준의 고화질을 보장한다는 디지털 카메라만으로 디지털 시스템의 위력을 제대로 평가하기란 어렵다. 디지털 편집 시스템이 따라붙어야 되기 때문이다. 물론 푸른영상이 95년부터 사용한 비디오머신은 8mm로 작업한 다음 곧바로 방송용 베타로 전환할 수 있는 기기로, 편집 때 이어놓은 컷들을 입력해서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기능이 있었지만 100% 디지털 편집기기는 아니었다. 가편집 작업은 전보다 수월했지만, 편집을 다시 해야 할 경우 촬영테이프를 복사해야 할 경우가 발생했고, 이 경우 아날로그 비디오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한 화질저하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비선형 편집기와 디지털 비디오 신호를 처리할 수 있는 저가형 컴퓨터 보드인 DV랩처가 결합된 '완전한' 디지털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사실 비선형 편집 시스템은 이전에도 사용되어 왔지만 그땐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화시킨 다음 디스크를 사용해서 비선형 편집을 하고 출력시에는 다시 아날로그 과정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디지털 비디오 신호를 처리할 수 있는 저렴한 컴퓨터 보드들이 파이어와이어(Firewire)라고 하는 디지털 전송방식을 구현하면서 저예산 디지털 작업들의 전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을 시작으로, 현재는 푸른영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단체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노뉴단의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희망으로 1998 전진>이라든지 푸른영상의 <보이지 않는 창살>(1999)은 디지털 시스템이 낳은 첫 번째 옥동자.

푸른영상의 김태일 감독은 후반작업시 다른 프로덕션을 찾아가 많게는 100만원씩 들였던 때와 달리 70만∼80만원을 주고 산 컴퓨터 보드를 이용한 비선형 편집시 작업 기간이나 비용의 효율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김명준 노뉴단 대표 역시 편집 장비까지 합쳐 200만∼300만원 수준의 DV전문캡처 보드를 쓴다고 해서 아비드와 같은 1억원에 달하는 하이 엔드(고가포맷)보다 못할 게 없으며, 로 엔드(저가포맷)의 국내 도입 속도나 활용 능력이 다른 지역보다 앞선다고 지적한다. 특히 기본 화질을 유지하는 데 고비용이 드는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 시스템은 포맷에 큰 차이없이 고화질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예산 다큐멘터리의 실험은 여러 가지 옵션과 네트워크가 보강되면서 다양하게 전개될 듯싶다.

이렇게 디지털 시스템을 통한 작업들은 기존의 제작방식을 변형시켰지만, 독립 다큐멘터리의 배급이나 유통구조의 난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노뉴단에서 지속적으로 꾸려왔던 디지털 교육 프로그램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올해 4월부터는 방송법 69조와 70조에 명시된 조항 즉 “시청자가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을 공중파를 비롯한 위선, 종합유선방송이 일정부분 편성, 방영해야 한다”는 시행령이 발효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루트가 뚫리는 것이다. 노뉴단의 태준식 감독은 “대안적인 미디어운동의 제도적인 공간 확보와 보장된 권리를 사문화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계속 진보적 영상물을 제공할 수 있는 풀(pool)에 대한 꾸준한 교육과 함께 편집 시스템 등을 공유할 수 있는 지역 미디어센터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