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3] - 진행중인 디지털 프로젝트들
2000-03-21
글 : 김혜리
글 : 이영진
<눈물> <그녀 이야기>등 현재진행중인 디지털 프로젝트들

영화의 미래를 두드린다

영화의 미래를 노크하는 주문으로 우리가 새삼 그 이름을 외치기 전부터 디지털은 우리 곁에 있었다. 특수효과, 상업 영화의 제작일지를 담은 메이킹 필름, 동네 비디오숍 한쪽 벽을 메운 에로 영화들은 모두 이제껏 심상하게 마주쳐온 디지털 영화의 얼굴들이다.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전해듣는 디지털을 둘러싼 영화계의 희망찬 야단법석은 그러니까, 말하자면 ‘영화로서의 디지털 작업’에 대한 발견 그리고 발명이다. 혁신된 성능의 카메라는 디지털로 하여금 필름 발뒤꿈치 쫓아가기에 바빴던 만년 열등생 처지를 털고 독자적 영상문법까지 배태할 수 있는 당당한 매체로 끌어올리는 중이며, 인터넷과 디지털 프로젝터 극장의 대두는 바야흐로 디지털 영화가 촬영부터 상영까지 독자적인 일생을 꾸려갈 생육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제 문제의 초점은 누가 이 씨앗을 가꿔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다. 모색은 도처에서 활발하다. 가장 열띤 궁리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은 세계 영화 커뮤니티의 회합 마당인 영화제들.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칸, 에든버러, 로테르담, 선댄스, 베를린 등 각종 국제영화제는 디지털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고, 디지털 영사방식을 시연했다. 지난해 8월 일본 나고야에서는 국제디지털페스티벌이 열렸고, 3월 초 일본 내외 아마추어 작가들의 디지털 아트와 디지털 영화로 구성된 파일럿 프로그램(시험 제작물)을 방영한 <NHK> 위성방송은 4월 초부터 이 프로그램을 금요일 밤에 정규 편성할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북미의 시그라프(SIGGRAPH)페스티벌, 유럽의 이마지나페스티벌은 아예 디지털 아트/영화만을 위한 축제들이다.

국내에서는 오는 4월28일부터 5월4일까지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메인 프로그램에 디지털 영화 부문을 개설하는 한편, 아시아 3인 감독의 공동 프로젝트 <디지털 삼인삼색>과 일반인 대상의 디지털 필름 워크숍을 기획해 길잡이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지난 2월22일 디지털 상영방식 설명회에 참석한 전주국제영화제 정성일 프로그래머는, 저예산 미학에 기초한 영화부터 라스 폰 트리에의 2800만달러짜리 ‘디지털 블록버스터’ <어둠 속의 댄서>에 이르기까지, 디지털을 향한 각국 영화인들의 접근법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면 국내 영화인들의 발걸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삼인삼색-세 가지 색, 이야기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인 김윤태 감독의 <N-2>는 장편 <럭키 서울>을 위해 감독이 오랫동안 품어온 이야기를 압축 변형한 중편이다. 간밤의 기억을 잃고 스스로의 행적을 더듬어가는 택시 기사와 그를 버리고 얼굴을 성형한 아내, 채팅 상대 소녀, 그리고 그의 차를 몰고 다니며 그를 흉내내는 동료가 <N-2>의 그물망을 엮어가는 인물들. ‘네트워크’라는 키워드를 지정받은 <N-2>에서는 컴퓨터 채팅 화면과 카메라, 택시의 네비게이터(항법 장치)가 현실과 나란한 커뮤니케이션의 평면 또는 기억의 블랙박스로 등장한다. 실험적인 단편영화, 비디오 설치 등 개성 강한 작업으로 이력을 쌓아온 김윤태 감독에게 이번 디지털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중편 내러티브 영화를 짧은 시간(2월15일∼3월20일 촬영) 안에 완성하는 경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극영화의 연륜을 업고 평소 염두에 두었던 아이디어를 경쾌하게 펼치는 장으로 디지털 영화를 활용하고 있는 <N-1>의 박광수 감독, <N-3>의 장위엔 감독과는 다른 입장인 셈.

“디지털 이미지의 ‘값어치’와 깊이, 질감은 퍽 다르다. 마치 이미지의 표피를 보는 것 같다. 머릿속의 구상과 결과의 갭이 큰 것도 필름과 차이다”라고 김 감독은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영화에 어울리는 내용과 고유한 미학이 무엇이냐는 그의 고민은 <N-2>가 마무리돼가는 지금도 미결된 난제다. 디지털 프로젝터로 상영할 공간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지않아 키네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촬영하다보니 디지털의 ‘결’을 살리는 데에 집중할 수 없는 점도 아쉬움이다. 이미지의 정련에 유난히 애착하는 김 감독으로서는 필름에 필적하는 화질을 보장하는 상위 기종 디지털 카메라로 재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디지털 영화로 찍겠다면 처음부터 개념이 명확해야 할 것 같다. 왜 디지털로 찍는가의 물음에 내용, 미학과 표현양식 등이 저마다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전주영화제에서 두 한국 감독의 작품과 한 묶음으로 공개될 장위엔 감독의 <N-3>는 3월6일 베이징에서 크랭크인해 한창 촬영중이다. <N-3>는 타고난 생동감으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 위에 흔들거리는 디지털 영화의 특성을 활용한 영화가 될 듯하다. 28살에 성전환 수술을 한 중국의 실존 현대무용가 진싱의 고백과 추억을 통해 남성과 여성, 예술과 현실, 기록과 픽션의 접경지대를 탐사하게 될 <N-3>에서 장 감독은 시대의 공기와 개인의 심리를 디지털의 순발력으로 포착한다. 필름을 쓴 영화 촬영이 비싼 필름을 소모한다는 경제적 부담감말고도, 모든 현장 요소를 엄격히 통제한 다음 카메라를 돌리는 긴장에 찬 과정이라면, 디지털 카메라는 우연성 아래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잠재력을 건져올리는 눈을 지녔다. <N-3>는 디지털 카메라의 작은 ‘존재감’이 어떤 마법을 부릴 수 있는지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사고 있다.

<디지털 삼인삼색>은 세 작품의 편집이 끝나는 대로 키네코 작업을 거쳐 전주영화제에서 디지털 버전과 필름 버전 두 가지 형태로 공개되며 인터넷에서도 동시 상영돼 관객에게 비교 체험을 선사한다.

한편 전주국제영화제가 올 1월15일부터 운영해온 디지털 필름 워크숍은 좀더 많은 아마추어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디지털 영화의 민주성을 과시하는 기획이다. 17살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참가자들은 3개월 교육과정을 마치고 지난 3월11일 촬영에 들어간 상태. 엘리베이터 안에서 키스하는 두 남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린 <웃긴 놈>, 집에서는 결벽증 있는 어머니에게 가사를 미루면서 남의 집에 가서는 어느새 엄마와 닮은 행동을 하는 여자를 관찰한 <걸레> 등, 주로 일상의 표면을 찬찬히 주시하는 내용을 지닌 이들 단편은 전주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될 예정이다.

충무로는 실험중, 충무로 밖도 실험중

김윤태 감독

충무로 역시 조심스럽게 디지털 방식을 노크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의 <눈물>은 기획단계부터 화제가 됐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데뷔한 임상수 감독이 두 번째 영화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겠다는 것도 그러했지만, 검증된 적 없는 디지털 장편영화에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가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가출해서 ‘삐끼’로 용돈을 버는 가리봉동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쓴 시나리오인데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감을 위해 임상수 감독은 신인들로 배우진을 짰다. <눈물> 팀은 3월28일 크랭크인 때까지 감독, 배우뿐 아니라 스탭까지 서울 근교에서 합숙하고 있다. 이번 합숙에서 특이한 점은 뭔가 체득해야 할 쪽은 신인배우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유로운 데 비해 감독과 스탭들은 이들의 자잘한 습관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동선의 리듬이나 시선의 느낌까지 잡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 촬영시에 3대의 카메라가 배우들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게 감독의 생각이다. <눈물>에서 디지털 카메라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르는 ‘보조장치’로서,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할 생각이다.

“필름과 디지털은 서로 다른 캔버스고 둘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예요. 금속성 디지털의 낯선 질감이 생생한 감을 전달해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개별 작품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매체 자체가 관객의 현실감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아닌 이상 선택이 중요하죠.” 촬영감독을 맡은 이두만 기사의 말이다. <눈물>에서 사용하는 카메라 PD-100AP는 1초가 25프레임으로 구성되는 PAL방식이며 29.97프레임인 NTSC방식보다 극장 상영을 위한 키네코 작업에서 더 유리하다.

임상수 감독이 충무로 안이라면 그 바깥에는 이지상 감독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는 일반 관객에게 보여진 적 없는 <둘 하나 섹스> <돈오>와 함께 ‘노란 꽃’ 3부작인 이번 영화 <그녀 이야기>는 <돈오>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다. 하지만 소니 VX1000에 PD100A를 추가했고, 단 둘이서 찍었던 <돈오>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때론 부담스러운 열다섯명의 스탭이 참여했으며, 모니터에 재생한 다음 이를 필름으로 담아냈던 키네스코핑 방식의 키네코 작업까지 포함해서 제작비 2천만원이 3억원으로 늘어났다는 점이 다르다. “디지털 카메라를 먼저 염두에 둡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완결된 이야기, 고정된 이야긴 없는 셈이죠. 매체가 메시지인 셈이고 짤막한 메모만이 필요하죠. 3부작을 묶을 수 있는 건 공(空)이고 이야기는 필요없습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 맞물려가면서 굴러가고 그러면서 사건과 의미가 발생하는 거고. 카메라는 그걸 보면 되고. 그래도 <돈오> 때와 가장 다른 점은 공동작업이라는 사실입니다. 촬영감독인 함순호 촬영감독이 욕심내는 것과 내가 욕심부리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고. 양보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런 걸 느끼네요.”

어떤 영화를 하더라도 일탈이나 조롱, 허무 같은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탈색시킬 수 없을 거라는 이지상 감독은 <그녀 이야기>가 꼭 극장에서 개봉하면 좋겠다는 욕심 하나를 털어놓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카메라와 단촐한 조명 장비, PC로 하는 편집. 디지털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은 접근의 용이함이다. 물론 이처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값싸고 기동성 있는 영화 제작은 여전히 디지털 최대의 장점이나 더이상 유일한 장점은 아니다.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소니와 파나비전이 새롭게 합작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24P HDCAM으로 촬영된 빔 벤더스 감독의 <밀리언달러 호텔> 뮤직비디오 편집본을 갖고 개최된 워크숍을 참관하고 돌아온 이광모 감독은 “충격받았다”는 말로 감상을 요약했다. 디지털 영화에 관심을 가져왔으나 화질의 격차에 낙심해왔던 이 감독은 35mm 필름에 견주어 그림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두배의 심도로 필름이 잡아내지 못하는 영역을 열어냄으로써 오히려 더 정밀한 미장센을 요구하는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에 전망을 얻었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공들인 <아름다운 시절> 필름이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게 현상되고 몇컷쯤 예사로 빼먹고 영사되는가 하면 함부로 훼손되기까지 하는 데 절망했던 이 감독에게, 완성된 하나의 디지베타 테이프에 담긴 데이터를 모든 스크린에서 똑같은 질로 상영할 수 있는 디지털 영화는 매혹적인 가능성이다. 차기작 <어머니>를 ‘픽션의 조각이 모여 이루는 신문의 스타일’에 어렴풋이 빗대는 이 감독은 필름보다 디지털에 적합한 내용을 가진 새 작품이, 조악한 화질을 극복하고 순발력과 리얼리티에 대한 침투력은 보존한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몸에 꼭 맞는 형식을 얻게 되기를 희망했다.

디지털의 바다로 돛을 올리다

바야흐로 디지털 영화에 다가가는 프로와 아마추어 영화인들의 야심과 꿈은 몰래카메라에서 디지털 블록버스터까지 다각화하고 있다. ‘도그마’식의 엄격한 리얼리즘 영화, 소형 촬영기로 검열의 그물을 빠져나간 다큐멘터리, 필름 영화의 기법을 절충한 프렌치 도그마 영화를 망라한 전주영화제의 N-비전 섹션은 그 스펙트럼을 일별할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담을 허무는 도발, 대규모 집단 작업의 소재가 되지 못했던 극히 사적인 비전들, 첨단 테크놀러지로 캐낸 낯선 영상미, 몸집 작고 민활한 카메라가 유혹해낸 형식과 내용의 자연스러움이 모두 디지털의 플래카드 아래 웅성대고 있다. 20세기 영화의 누벨바그는 들고찍는 가벼운 카메라와 나그라 녹음기의 출현으로 파고를 높였다. 신테크놀로지는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와 만나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까. 영화사가 사연 많은 굽이길을 한 바퀴 돌아온 지금, 그것이 열어젖히는 문과 창의 숫자는 반세기 전보다 월등히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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