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에 투항한 건 아니다"
-단편이긴 하지만 박광수답지 않은 영화다. 제목부터.
=글쎄. <그 섬에 가고 싶다> 때 떠오른 이야기였다. <그 섬…>에 출연했던 안소영씨가 벗는 장면 때문에 고민하는 걸 봤다. 안소영씨는 우리 세대의 뇌리엔 깊이 새겨진 배우다. 에로 스타가 예술 영화에 출연해 진지한 연기자로 변신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벗어야 한다면? 그런 모티브가 흥미로웠다. 당시에 삼성이 제작비를 대 장편 감독 몇몇이 단편을 만들기로 했는데, 나만 시나리오를 썼다. 7년 잠자고 있다가 이번에 기회가 온 거다.
-<이재수의 난>에서 예고된 변신이라고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특별히 변신을 의식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최근 세 작품이 모두 시대물이었기 때문에 현대물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있다. 하지만 유행하는 가벼움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거다. 모두가 가벼움을 좇고 있는데, 나까지 그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빤스 벗고 덤벼라>는 오래 전에 생각했던 것이고, 부담없이 찍는 과정을 즐기면서 만들고 싶었다. 촬영 기간에 술도 마시고.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여유가 별로 안 생긴다.
-처음 구상과는 내용이 많이 달라졌겠다.
=그렇다. 우선 당시엔 에로 비디오가 요즘처럼 유행하진 않았다. 주인공부터 스크린 스타에서 에로 비디오계 스타로 바뀌었다. 그리고 통신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이 첨가됐다. 인터넷에 중독된 이른바 N세대가 등장하고 퀵서비스 소년도 나온다. 의식하진 않았는데 전체적으로는 역시 소외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됐다.
-에로물을 별로 안 봤을 것 같은데.
=<엠마뉴엘 부인>이나 <감각의 제국> 같은 건 봤다. 정통 에로물을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에로 비디오를 두편 봤다. 그쪽 여배우들과 술도 마시면서 얘기도 나눠보고. 주연이라고 해도 개런티 200만원 정도 받는데, 연기자로 불리고 싶은 욕구는 무지 강하더라. 술 마시니까 행동이 과격해져서 감당하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쪽 장르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는 않나.
=거부감이라기보다…, 에로 비디오계는 영화산업의 그늘이라고 생각해왔다. 스탭 중 한명이 이런 주장을 하는 걸 들었다. 에로 비디오는 애당초 섹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보여주니까 나쁠 게 없는데, 오히려 진지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에로 비디오보다 더 노골적인 충무로 영화가 진짜 나쁘다는 게 그 친구 지론이다. 맞는 말 아닌가.
-디지털 촬영이 영화 만들기의 미학적 원칙에 영향을 끼치진 않나.
=큰 영향은 없다. 다만 이 영화처럼 여러 가지 시점이 동시에 개입하는 영화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면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다. 35mm 카메라를 다섯대 동원할 만큼 돈이 많으면 논외겠지만. 제작비가 저렴하다는 게 무엇보다 좋다. 아직 필름에 비해 화면의 깊이가 얕고, 조명을 사용한 톤 조절이 힘들다는 단점도 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가볍다.
=단편이기 때문인 점도 있을 테고, 소재도 재미있고, 35mm보다는 부담이 덜한 탓도 있을 거다. 43번 찍은 장면도 있는데, 필름 촬영이면 돈 걱정 때문에 못했을 일을 부담없이 ‘한번 더해보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재미있다.
-디지털에 대한 충무로 출신 스탭들의 거부감도 있을 것 같다.
=새 테크놀로지가 들어오면 반드시 거부감이 생긴다. 힘들게 35mm 카메라로 작업해온 사람들에겐 이 작고 볼품없는 기계가 자기의 영역을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당연히 싫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찍을 때 충무로에서 처음으로 모니터를 썼는데, 이것도 큰 변화다. 뷰파인더 보는 건 그때까지 촬영기사와 감독만의 특권이었는데, 모니터가 들어온 뒤로는 스탭이면 모두 어떤 장면이 찍히고 있는지 알게 됐고, ‘카메라가 여기서 흔들렸네’라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젠 모니터 없는 촬영장은 없다. 디지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로움을 두려워하면 발전이 없다. 서양인들에게 그림에 글자와 낙관까지 찍힌 동양화는 얼마나 충격이었겠나. 그런 충격을 흡수하는 과정이 현대 서양화 발전의 한 계기가 됐다. 영화도 마찬가지 아닌가. 감독의 손길이 영화에 직접 드러나는 게 요즘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지 않았나.
-디지털 영화에서 일종의 희망을 보는 건가.
=난 스스로 충무로 감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난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충무로에서 영화 만들기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럴 때 디지털 영화는 좋은 대안이 된다. 물론 슈퍼 8mm일 수도 있고. 영상원의 교수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에는 첨단 기자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