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태풍> 블라디보스토크 촬영현장 [1]
2005-07-06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태풍> 촬영 8개월째, <태풍> 블라디보스토크 촬영현장을 가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인구 70만명의 러시아 항구에 내려앉는 순간 극동 끝자락의 냉기가 슬며시 얼굴을 때린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착역이 있는 도시, 소비에트연방의 극동함대 본부가 자리잡았던 도시. 이곳이 바로 꽁꽁 숨겨져 있던 곽경택의 150억원 블록버스터 <태풍>의 제작진이 한달여간 자리잡고 촬영을 진행 중인 곳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풍>의 제작진은 극소수의 매체만을 초빙한 채 6월17일부터 19일까지 현장의 문을 비밀리에 열어젖혔다. 지난 5월26일 부산 해운대에서 선행되었던 1차 현장공개는 쓰나미처럼 몰려든 100여명의 기자단으로 가득했고, 도저히 <태풍>의 진면모와 곽경택의 솔직한 비전을 훔쳐볼 수조차 없는 이벤트였다. 초대받은 소수로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한 탓일까.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장에서도 <태풍>은 빙산의 일각만을 슬쩍 내보였을 뿐이다. 바다도, 액션도, 스펙터클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장은 <태풍>의 드라마가 도달할 감정적 클라이맥스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8개월 동안 그 육중한 모습을 감춰왔고, 12월 개봉까지 6개월여를 기다려야만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곽경택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태풍>.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켜보고 귀에 담아온 현장기를 여기에 싣는다.

태풍은 끓어오른 바닷물이다. 적도 근처의 바닷물이 태양열로 인해 증발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뜨거운 공기가 지구 자전의 영향을 받아 지표 근처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가속하는 것이 태풍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태풍은 고위도로 상승하면서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타이에서 시작되어, 부산을 할퀴고, 동해의 북쪽 끝에서 온화한 바람으로 화해 사라진다. 영화 <태풍>의 여정도 이와 닮아 있다. 끓어오른 바닷물처럼 시작된 <태풍>의 드라마는 타이과 부산을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보게 될 참이다. 해군 UDT 대위인 강세종(이정재)은 미국 선박을 기습해서 군사물품을 강탈하는 해적 씬(장동건)을 잡기 위해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차출된다. 씬(Sin)이라 불리는 최명신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탈북했으나 남한 정부의 입국 거절로 누나 최명주(이미연)와 단 둘이 살아남았고,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남한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인물. 이를 막기 위해 강세종은 타이과 한국을 넘나들며 숨가쁘게 씬을 쫓는다. 그리고 두 남자 사이에는 최명주라는 여자가 있다. 동생 씬을 잃어버리고 러시아로 흘러들어온 그는 몸을 팔며 살아가다 약물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있고, 서로의 자취를 쫓던 두 남자는 명주의 그림자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든다.

붉은색 트레일러 안에 만들어진 사창가

지난 6월18일 현지시각 4시25분, 블라디보스토크 고리키극장의 옆뜰에 붉은색 트레일러가 놓여 있다. 30시간이나 걸려 속초항에서 운송해왔다는 3대의 촬영차와 1대의 레커차 주위로 스탭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하얀 천막 아래 설치된 모니터 앞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곽경택 감독이 앉아 있다. Smile ^^. 모니터 위에 누군가가 붙여놓은 영어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웃어라. 그렇게라도 억지로 웃어야만 하는 현장인가. 트레일러 속을 흘끗 들여다보았더니 TV와 침대, 온갖 살림살이가 꽉 들어차 있는 누추한 거처가 만들어져 있다. 어두운 트레일러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우수리스크의 시장 골목 속 사창가에서 죽어가는 최명주의 삶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씬을 잡기 위해 러시아로 온 세종이 처음으로 최명주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이날의 촬영분. 남루한 옷차림과 허연 병색을 얼굴에 분장해놓은 이미연은 리허설을 마치고는 진이 다 빠진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 어깨 너머로 훔쳐본 대본에는 누군가가 써놓은 단호한 글씨체가 보인다. 즐겨라. 스스로에게 즐기라는 주문을 걸지 않으면 한치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하루도 약을 먹지 않고 잔 적이 없다. 저녁 10시에야 해가 지니까 잠도 안 온다. 북한 사투리는 영어 공부보다 더 어렵다”는 그는 빈 호텔 방에 누워서 잠을 청해도 정신이 멍한데다, 머릿속으로는 북한 사투리만 계속해서 되뇌어진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겪어온 여자의 현재를 연기하려다보니 단 한 장면만 촬영해도 에너지 소모가 크다는 하소연이다. 그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곽경택 감독은 연신 기침을 해대는 이미연이 딱하다는 표정을 잠시 짓다가도 금세 고개를 돌려 “들어갑시다!”를 외친다. “이미연씨. 이번에는 저음을 더 깔아서 좀 세게 갑시다.”

“감독님,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요”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트레일러의 한쪽 창으로 조명이 은은하게 들어온다. 최명주의 손에 들린 담배에서 아스라이 올라오는 연기가 조명을 타고 근사하게 트레일러 속을 맴돈다. 세종이 들어선다. 앉아 있던 여자의 목에서 새나오는 쉰소리. “시떠?”(‘뭐야?’라는 뜻의 러시아말) 세종은 컴컴한 집안을 채운 담배연기와 퀴퀴한 냄새에 놀란 표정이다. “최명주씨 맞죠? 최명신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최명신이라는 이름을 들은 명주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린다. “뉘기요?” 덩달아 흔들리는 세종의 목소리. “아버님 성함이 최진규씨 맞죠?” 최진규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명주의 눈빛이 담배연기 사이로 무너져내린다. 쌀쌀한 블라디보스토크의 공기에도 불구하고 좁은 트레일러 속은 촬영장비와 홍경표 촬영감독, 스탭과 사진기자들의 체온으로 후끈하게 덥혀 있다. “강세종이 들어가는 순간, 최명주씨가 곧바로 ‘시떠?’라고 합시다.” 곽경택 감독은 이날의 촬영이 감정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신이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최명주는 씬과 세종의 중간에서 감정의 교량을 하는 역할이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용서로 화하게 만드는 촉매 같은 사람이다. 오늘 장면은 세종이 지금껏 적으로 삼아왔던 인물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하는 첫 출발이다. 그만큼이나 중요한 만남이다.” 곽경택 감독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동안 강세종 역의 이정재는 타이트한 검은 양복을 입고 연신 트레일러 주위를 맴돈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대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정재에게는 절대적으로 까다로운 촬영분일 것이다. 그는 최명주가 처해 있는 비참한 환경에 놀라는 동시에, 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찾았다는 희열 역시 희미하게나마 얼굴에 떠올려야 한다.

곽경택의 다양한 주문이 이어진다. “오히려 여유를 조금 가지고, 너무 긴장하면 안 된다” “세종아 잠깐만. 조명에서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라니까.” “혹시 가능하면, 거짓말하는 게 어렵다는 감정도 조금 얼굴에 남았으면 좋겠어.” 곽경택 감독은 이정재를 연신 극중 이름인 세종이라 부르고 있다. 이정재의 얼굴이 ‘감독님 그런 애정은 고맙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고요’라는 표정을 잠시 드러냈다. 애써 외면하는 무정한 감독. 곽경택의 주문은 두꺼운 점퍼를 돌돌 말아 입고 대사를 반복하고 있는 이미연에게도 계속된다. “조금 더 놀란 듯이, 최명신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으니까 좀 공격적으로 대응합시다.” 슛은 계속되고, 이미연은 섬뜩한 눈빛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약물에 취한 듯한 눈을 멍하게 든다. “명신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끔찍한 표정으로, 그리고 진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너지세요.” 곽경택 감독은 전반적인 연기의 테두리를 잡아주지만 세밀한 결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미연이라는 고집스러운 배우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명주라는 인물은 중간에서 두 남자 덜미를 딱 잡고 있어야 하는 캐릭터다. 내공이 깊지 않은 사람이 하면 그냥 묻혀버릴 역할이다. 이미연이 캐스팅에 응하자 이제야 제대로 되겠다 싶더라.” 언제나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미연이라는 톱스타를 캐스팅한 연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태풍>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점점 소용돌이로 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에너지를 흡수하는 영화다. 그는 “마침내는 이미연이라는 배우까지 흡수하는구나 싶더라”며 희열과 야심이 섞인, 육식주의자 부처 같은 표정을 드러낸다.

쓰나미와 화재를 넘었더니, 이번엔 감정의 고통이

150억짜리 <태풍>호가 순조롭게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알려진 것처럼 <태풍>은 지난 8개월간 몇번의 암초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다. 2004년 11월1일에 크랭크인한 <태풍>의 제작진은 부산에서의 1차 촬영을 마치고 타이로 날아가 거대한 규모의 로케이션 촬영을 시작했다. 방콕 중심가의 시암대학은 공항으로 탈바꿈했고, 유명한 휴양지인 크라비 근처의 섬에는 씬의 본거지인 집시촌의 세트가 세워졌다. 만만치가 않았다. 무더위는 사람들의 열의마저 증발시킬 만큼 끔찍했고, 점점 늘어지는 로케이션 기간은 곽경택 감독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돈이었다. 마침내 크라비에서의 마지막 촬영날, 몇몇 배경장면들을 따야 하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손세훈 PD는 고민하는 감독에게 조명을 설치해서 찍어두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고, 이 무심한 제의는 결과적으로 많은 생명과 돈을 구해냈다. 다음날 대부분의 스탭이 철수한 크라비의 세트장을 인도네시아 해저의 진동으로부터 밀려온 쓰나미가 덮친 것이다. 배우들은 이미 출국한 상태였고, 잔류 스탭들은 미리 짐을 싸둔 상태였기 때문에 신속하게 고지대로 탈출할 수 있었다. 곽경택 감독과 주요 제작진은 저마다 전화로 생사를 확인하며 “나 살아 있다”를 외쳤다. <태풍>이 태풍과 해일의 도전만 받은 것도 아니다. 실물 크기의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김블(Gimbal) 장치’가 국내 최초로 설치되었던 고흥의 세트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화마가 덮쳤다. <태풍>은 죽지 않고 살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고 있었지만, 충무로의 기우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곽경택 감독이 늘 바라봐야 하는 모니터 위에 박광일 편집기사가 ‘Smile ^^’이라는 문구를 붙였던 것도 그때쯤이었다고 한다. 도저히 스스로 잘하고 있다 세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곽경택 감독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사람은 강제규 감독이었다. “사람들이 <태풍>에 대해서도 걱정을 많이 하지만,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크게 걱정을 했었나. 다들 과연 잘되겠냐며 삐딱하게 바라볼 때 강제규 감독은 그 큰일을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공포가 있었을까.” 곽경택 감독의 지난 고행은 이제 어느 정도 끝이 났지만, 기술과 자본의 부담감에 시달렸던 타이 로케이션에 버금가는 지난한 감정의 소모가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씬과 세종이라는 두 남자가 명주라는 여자를 매개로 만나 서로에 대한 증오를 이해로 바꾸는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뜻을 품은 로케이션이다. “싼값으로 원하는 그림을 얻어낼 로케이션을 고민하다가 결정한 장소”라는 곽경택 감독의 재미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명주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될 만큼 어둡고 침잠된 매력을 지닌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가 현장의 분위기를 감싸안고 있다.

기자들이 머문 호텔은 조그마한 아시아 남자들의 달러에 몸을 내맡길 8등신 인터걸들로 가득하고, 저녁 9시 이후에 바깥을 돌아다니지 말라는 현지 제작진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가 <태풍> 제작진에게 어두운 도시의 이미지만을 팔아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영상위원회의 도움이 없다면 곽경택의 비전이 온전히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영상위는 한국에서 총기를 들여갈 수 없는 제작진을 위해 영화에 필요한 총기를 모스크바에서 수급해주고, 모든 기자재의 통관 업무를 도와주며, 로케이션과 조연배우 섭외에도 가담하고 있다. 손세훈 PD는 “큰 규모의 지하상가를 막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번은 상인들이 와서 항의를 했지만 ‘시장에게 가서 항의하라’는 경찰들의 말에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고 귀띔한다. 곽경택 감독은 블라디보스토크영상위가 공급하는 조연들의 능력에도 혀를 내두른다. “5% 진하게, 5% 연하게 연기해달라는 주문이 먹히더라. 놀랍다”는 그의 감탄처럼, 연해주 전체에서 1년에 단 한명을 뽑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고리키극단에서 수급된 배우들이라 연기의 수준 자체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블라디보스토크영상위가 <태풍>에 전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까닭은, 출범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는 영상위가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대규모 합동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현장은 영상위와 지역언론에서 나온 기자들의 카메라가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날 찍어 그날 현장에서 바로 편집

배우들의 세밀한 연기톤에 집중된 그날의 촬영은 오후 6시가 넘어가면서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었다. 지지 않는 북구의 태양이 대낮처럼 내리는 가운데, 편집기사가 현장 편집된 분량에 대충 한번 사운드를 입혀본다. “이거 봐라. 컬러가 묘~한 게 좋잖아.” 현장 편집본을 모니터로 바라보던 곽경택 감독이 만족을 표한다. 이미연은 힘든 하루를 마치면서도 도에 지나칠 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곽경택 감독이 못내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감독님 혼자 숙소에서 먹는 특별한 약이 분명히 있을 거다.” 곽경택 감독은 웃으면서 묘약의 정체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약이 사실 있다. 현장 편집기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는 그날 찍으면 그날 현장에서 바로 컷을 붙여본다. 적어도 오늘 한 작업에 대해서 확인함으로써 보람찬 하루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게 분발할 수 있는 큰 힘 중 하나다.” 곽경택 감독을 지탱해주는 현장 편집기는 <친구>를 촬영하면서 그와 황기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했던 장비다. 그는 가끔식 사운드를 최대한 높여서 모든 스탭들에게 현장 편집본을 보여준다고 한다. 지난 8개월 동안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른 스탭들과 자기자신을 다시 곧추세우는 곽경택만의 방식일까.

이제 슬슬 <태풍>의 프로덕션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촬영이 끝나는 6월25일(이 역시 아이러니한 날짜다) 이후, 부산에서의 남은 촬영이 끝나면 곧 크랭크업의 축포가 울릴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CG 소스들을 현장에서 넘긴 터라 후반작업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곽경택 감독은 예정하고 있는 12월 개봉에 무리가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장을 지켜보고도 <태풍>의 베일을 온전히 열어젖힐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장동건이 등장한 이날 오전의 촬영은 감정적으로 격한 순간이라 배우에게도 감독에게도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풍>이 바다 위의 스펙터클에만 경도된 블록버스터는 아니라는 희망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구식 싸나이’ 곽경택은 드라마와 캐릭터의 힘을 알고 있는 감독이고, 그가 배우들과 자신을 괴롭혀가며 굵직하게 엮어가는 드라마의 밀도는 반나절의 현장공개분으로도 결코 옅어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블라디보스토크 현장은 열어도 열어도 계속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산 마트료시카 인형 속의 가장 조그마한, 그러나 가장 만들기 힘든 인형인 셈이다. 물론 인형의 큰 껍질은 12월까지 계속될 후반작업의 산물이고, 곽경택 감독이 말하는 “한국영화 기술력의 최대치”를 보여줄 150억원짜리 태풍은 그제야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한국영화를 뒤흔들 태풍은 천천히 신중하게 행보를 거듭하며 에너지를 흡수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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