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의 후예, 그들에게 꽃을 던져라
미국과 영국에서 지난 11일 개봉한 <비치>의 삼총사 대니 보일과 작가 존 호지, 제작자 앤드루 맥도널드는 영화 홍보를 위해 방문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잠시 당황한 순간을 맞았다. 질문하라는 사회자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청중은 입을 꼭 다문 채 눈만 껌벅이고 있던 것. 대니 보일은 나중에야 그들이 입장하기 전에 사회자가 “레오에 대한 질문만 빼면 뭐든 물어도 좋다”고 청중에게 다짐두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디 벨파스트뿐이랴. 디카프리오의 사랑스러움에 탄식하는 여자친구 옆자리에 구겨박혀 하품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세계 어느 극장에서나 눈에 띄는 광경일 테다.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신경전은 끝나지 않는다. 미남 스타의 매력에 감전된 관객과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치 생판 다른 두편의 영화를 본 사람들처럼 영화를 한껏 부풀리거나 뭉텅 깎아내리며 아웅다웅한다. 미모의 여성 스타를 앞세운 영화는 이런 다툼까지 이르는 일이 드문 걸 보면 남자들의 질투가 더 무섭다는(?) 속설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어쨌거나 밸렌타인 축제라도 치르듯 <슬리피 할로우>의 조니 뎁, <비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리플리>의 주드 로 등 미남 배우들이 줄줄이 극장가에 입성하고 있는 요즘은, 시샘 많은 애인을 둔 여성 관객에겐 행복하고도 피곤한 계절이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의 피에서 피어났다는 아네모네는 바람이 불면 피고 다시 바람이 불면 지는 덧없는 꽃이다. 그런 연유인지 스크린의 아도니스들 역시 숭배에서 멸시로 변덕스레 치닫는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빼어나게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가 나타났을 때 연기자로서 그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좋은 자질을 지녔다싶은 남자 배우가 별나게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갖고 있다면 사람들은 별안간 미모가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거라며 앞다투어 근심하기 시작한다. ‘예쁘장한 사내 녀석’들은 아무래도 신뢰할 수 없다는 듯.
욕망의 대상으로서 스스로의 육체를 은막에 전시한 최초의 남자 배우는 이탈리아 출신의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다. 열여덟살에 혈혈단신 할리우드로 건너온 발렌티노는 MGM의 <묵시록의 네 기수>(1920), <시크>(1921), <피와 모래>(1922) 등을 공전의 히트작으로 이끌며 20세기 초 여성 관객의 넋을 빼앗아갔다. 1927년 루린 프루엣은 “만약 지금까지 남성이 여성을 그들의 욕망과 필요를 만족시키는 피조물로 빚어냈다면 이젠 여자들이 그렇게 할 차례”라고 썼다. 이국적 열정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금지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암시한 발렌티노의 고공 스타덤은, 19세기 말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어받은 당시의 신페미니즘 공기 속에 솟아오른 기념비였다. 당시로선 치명적 꼬리표였던 게이니 성불구자니 지골로니 하는 발렌티노에게 쏟아진 악의적 뒷공론들은, 여성들의 욕망에 물꼬를 튼 그의 ‘도발’에 대한 무의식적 반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반증하듯 많은 영화 속에서 발렌티노의 육체는 징벌이라도 받는 양 숱하게 매맞고 고초를 겪는다. 발렌티노가 요절한 1926년은 이미 그의 인기가 내리막을 걷던 시점이었으나 그의 장례날에는 구름같이 몰려든 여성팬들로 생난리가 빚어졌다.
미남 스타의 계보, 귀공자품에서 반항아로
무성 영화 시대 ‘은막의 연인’ 왕관은 존 길버트와 존 배리모어(드루 배리모어의 할아버지)에게 계승됐다. 길버트는 그레타 가르보의 상대역으로 유명해진 스타로 발렌티노보다는 덜 위험스런 매력으로 여성을 사로잡았고, 귀공자풍 완전무결한 옆모습으로 찬탄을 자아낸 배리모어는 연기적 재능 못지 않게 부단한 염문과 알코올에 얽힌 스캔들로 대중의 관심 한복판에 머물렀다. 무성 영화 스타들의 어딘지 초월적이고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미는 1927년 사운드 시대가 도래하면서 점차 세속적인 매력으로 대체돼 갔다. 특히 여성 스타에 비해 넓은 행동 반경을 허락받은 남성 스타들은 스테레오타입 안에서 그나마 다양하게 변주된 캐릭터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1930년대 로맨틱한 우상으로 부상해 풍성한 커리어를 일군 게리 쿠퍼(1901∼61)는 정의감과 용기 같은 정신적 가치를 섹시함의 범주에 처음 끌어들인 ‘미남 영웅’의 원형이다. 사색의 표정이 고인 여윈 얼굴로 조용히 움직이는 그는 여성의 존경심과 모성애를 동시에 자극했다. 반면 스크루볼 코미디의 귀재인 ‘오목턱’ 케리 그랜트(1904∼86)는 세련된 바람둥이 역을 힘도 들이지 않고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1950, 60년대 히치콕 영화까지 기운찬 행진을 계속했다. 오뚝한 코와 큰 눈동자, 고른 치열을 찬미한 1940년대는 엄격한 미적 규범이 지배한 시대였다.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1911∼69)는 결코 여자를 울리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온화한 미남자의 이미지를 스크린 안팎에서 체현하면서 1930, 40년대 여성 스타들이 선호하는 ‘무난한’ 상대역으로 상종가를 누렸다. 테일러의 후계자는 1950, 60년대 멜로드라마의 흥행 보증수표로 통했던 최후의 ‘메이드 인 스튜디오’ 스타 록 허드슨. 가명에서 결혼까지 모조리 스튜디오에 의해 프로그램 된 삶을 산 그는 동성애자로서 정체성을 비밀에 붙여야 했다. 로맨틱 코미디 <필로우 토크>(1959)에서 ‘게이 흉내를 내는 이성애자’를 연기하며 겹겹의 가면을 뒤집어쓴 게이 배우 허드슨의 모습은 오늘날 관객을 서글프게 한다.
1950년대는 미남 배우의 아름다움 속에 가시를 세운 전복의 에너지를 목격했다. 자신의 미모가 성가신 듯 눈살을 찌푸린 액터즈 스튜디오 졸업생 제임스 딘과 폴 뉴먼, 말론 브랜도는 여성관객들에게 꽃다발 대신 뻔뻔하게도 신경쇠약과 성욕, 콤플렉스를 눌러담은 상자를 내밀었다. “가진 건 이것뿐이니 맘대로 하라”는 식인 그들의 구애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60, 70년대에는 스튜디오 체제가 해체되고 에이전트들 중심으로 영화제작 인력을 규합하는 패키지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아예 스타를 염두에 두고 씌인 영화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1930년대부터 올림포스 신전을 벗어나 한 걸음씩 하산하기 시작한 스타들은 이 무렵 완전히 지상에 발을 디뎠다. 평범한 외모의 안티 히어로들이 중원을 점령한 1960년대 이후로는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이외에 중요한 미남형 스타를 찾기 어렵다.
스크린 속 남성, 탐한들 어떠리
스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와 백일몽을 담은 성궤이며, 이상적인 남성과 여성의 모델을 밝혀보이는 전광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 동성애와 이성애, 소년과 성인 남성 사이의 높은 담벼락을 부드럽게 타넘는 미남 스타들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배적인 남성성의 이미지를 교란하고 재구성하는 유혹적인 ‘게릴라’들이기도 하다.
미모는 그저 피부 한 꺼풀이라는 옛말도, 적어도 영화의 세계에서는 다시 생각해야 할 명제가 아닐까. 관객이 영화를 숨쉬고 체험하는 것은 배우를 통해서이며, 그들은 캐릭터 이전에 우선 하나의 얼굴로서 몸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선다. 영화학자 벨라 발라스가 클로즈업의 효과를 분석하며 지적했듯이 얼굴은 언어보다 더 고유하고 개성적인 영혼의 표현이다. 외모가 배우의 연기 인생에 끼치는 위력 역시 크다. <스크린 연기의 비밀>의 저자 패트릭 터커는 배우의 얼굴에는 이미 연기가 새겨져 있다고 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보러 극장에 가고, 우리가 디카프리오 때문에 <타이타닉>을 두번 본 것은 창피한 일일까? 장동건에게 반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봤다고 말하는 일은 부끄러운 노릇일까? 인간 신체 일부나 사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페티시즘은, 주로 여성을 쾌락의 소재로 착취하는 장치로 악용돼 온 탓에, 영화 매체가 지닌 악덕 중 하나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원칙적인 의미에서의 관음증이나 페티시즘이 없었다면 도대체 영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혹은 어떤 사물을 경배하고 열망하고 쓰다듬고 싶어하는 ‘팬’이다. 영화 보기의 그같은 쾌락을 부정한다면, 그는 혹시 지나치게 많이 읽고 쓰느라 보는 법을 잊은 사람이 아닐까. 스크린 위에 거대하게 떠오른 인간의 형상이 너무 아름다워 꽃이라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우리는 영화의 가장 마술적인 모멘트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