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원작자와 감독이 만났을 때 [4] - <검은 꽃>의 김영하+이재한
2005-07-27
글 : 이혜정
정리 : 김혜리

“비장하기만한 역사는 가짜 같다”


엘리베이터와 달라서 비행기는 종종 완벽한 타인을 향해 말문을 트게 만든다. 1996년 즈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이재한 감독(<컷 런스 딥>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재한 감독의 우연한 대화 상대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한국 혈통의 승객이었고, 이민사의 아마추어 연구자였던 그는 감독에게 20세기 초 멕시코에 계약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이 밀림에 세운 이상한 소국 ‘신대한’의 설화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몇해 뒤 이재한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한 김영하 작가의 품에 소설의 씨앗을 심었고, 2003년 여름 장편 <검은 꽃>이 출간됐다. 김영하가 민족과 국가가 초래한 운명적 비극의 대하서사를 썼다는 사실에 그의 오랜 독자 대부분은 약간 놀랐다. 그리고는 그중 대부분은 책장을 덮은 뒤 납득했다.

<검은 꽃>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5년 제물포항에서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의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으로 신세계의 신기루에 속아 팔려간 조선인 1033명이 어떻게 (끝내) 사라져갔는지를 담담히 읊조린다. 한때 도둑, 황족, 신부, 무당, 고아, 군인이었던 그들은 모두 노예가 됐다. 때로 간절한 사랑을 나눴고 때로 서로를 착취했으며 남의 나라 혁명에 휘말렸다. 첫눈에 보아도 영화로 거듭나기까지 거대한 노력과 예산을 요하는 소설 <검은 꽃>은, 원안을 선사한 이재한 감독을 연출자로 강력히 원한 김영하 작가의 의지로 결국 영화사 싸이더스FNH의 프로젝트가 됐다. <검은 꽃>을 가리켜 “나를 감독이 되게 만든 영화들 같은 영화”라고 부르는 감독과 “어느 때보다 내 영화 같은 영화”라고 부르는 작가는, 한달 전부터 강남의 한 에이전시 사무실 한쪽에 손수 방을 꾸미고 아침 9시 반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시나리오 3고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 출가시켰으니 내 자식이 아니겠거니” 하는 달관한 원작자나 원작자를 부담스러워하는 감독의 이미지는 여기서 지워야 한다. <검은 꽃>의 시나리오 작업실은 흡사 한몸에 두개의 뇌를 가진 쌍둥이가 들어앉은 태(胎) 같았다. 이마를 붙인 두대의 책상에 두대의 노트북이 마주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별도의 모니터 두대가 맞은편 노트북과 교차 연결되어 파트너가 방금 쓴 것을 실시간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김영하 | 흔히 시나리오 작업하라고 영화사에서 콘도를 잡아주는데 우리나라 콘도는 사실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도착하면 “우리 꼭 오늘부터 일을 해야 하나?” 하면서 백숙도 먹고 케이블카도 타고. 주말이면 놀러온 사람들이 술마시며 회포풀다가 멱살잡이를 하질 않나. 한번은 옆방에서 새벽까지 그 지방 일진회 10대들이 기합을 받더라고요. 참다못해 프런트에 항의했더니 잠시 뒤 “너희를 믿고 방 빌려준 내가 잘못이지. 다 엎드려뻗쳐!” 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고요. 프런트 직원이 일진회 선배였던 거죠. (폭소) 아무튼 도시형 인간인 나는 시골 가면 파도만 왔다갔다 갈매기만 끼룩끼룩하지 아무 생각이 없어요. “파도야 말해다오” 한들 파도는 아무 말도 안 해줘요.

이재한 | 동감이에요. 그래서 <검은 꽃>을 어떤 환경과 공간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많이 고민했죠. 새로운 작풍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궁리 끝에 결정한 지금의 작업방식이 영화 만들기 이전과 이후의 생활양식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완성 시점까지 집중의 밀도를 유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 같아요. 흔히 예술가들이 영감에만 의존한다는 인상을 갖는데 특히 시나리오 작업은 자기규율이 중요해요.

김영하 | 한국의 출판사가 작가에게 이런 식으로 청탁했으면 훨씬 생산성이 높았을 텐데. 회사원 생활을 안 해봤더니 ‘나인 투 파이브’ 생활이 재미있네요. 커피 들고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와 다른 직원들과 인사도 주고받고.

이재한 | (잠시 생각한 뒤) 나는… 신발을 신고 글을 쓴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맨발에 옷도 갖춰 입지 않고 풀어져서 쓰는 게 아니라 적당한 긴장 속에서.

김영하 | 발바닥 긁으면서 하는 게 아니라. (웃음)

이재한 | 공동각본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시나리오를 쓰는 건 불가능하죠. 하나가 왼손, 나머지가 오른손으로 자판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상호작용을 가장 긴밀하게 할 수 있는 책상배치를 고민했어요. 최근에 안 사실인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마리오 푸조가 <대부> 작업을 할 때 비슷한 방식을 썼더라고요. 감독이 영화적 문법으로 초고를 쓰고 계속 주고받는.

김영하 | 우리도 감독님이 겨울과 봄에 걸쳐 초고를 썼잖아요. 나는 원작자이기 때문에 소설을 영화적 어법으로 1차 고쳐 쓰는 작업에 적역이 아닌 거죠.

이재한 | 첫 페이지를 쓰기 전 3개월가량 나눈 대화가 무척 중요했어요. 내가 쓴 초고는 어디를 버리고 압축하고 무엇을 더할지 정해서 장편소설의 내러티브를 2시간 내지 2시간 반가량의 스토리텔링으로 옮기는 뼈대라고 봐요.

김영하 | 끝까지 다 써서 기획팀에 돌려 완전히 고치고 또 고치는 게 아니라 매일 세 장면씩 농부가 밭을 갈 듯 전진하는 게 우리 스타일 같아요. 어쨌거나 단선적으로 이야기가 풀리는 영화는 안 되겠죠. 대하 서사극 시리즈로 가자는 제안도 있긴 했어요.

이재한 | 24부작 TV드라마로 푸는 것과 한편의 영화로 푸는 것 중 어느 편이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영화에는 미장센의 스펙터클과 감정의 스펙터클이 있죠. 나로선 늘 꿈꾸어오던 영화예요.

김영하 | <검은 꽃>의 핵심은 농장 노예로서 그런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후일 1916년에 어떻게 행동했느냐, 혹은 1905년부터 1916년까지 공생했던 사람들은 어떤 과거를 거쳤고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수난사라면 알렉스 헤일리(<뿌리>의 작가) 등 숱하게 나오지 않았나요? 예컨대 남자들이 군대 경험담을 들려줄 때 몇 장면의 회상이면 충분하지 병장, 상병, 일병 다 출연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거죠.

이재한 | 감독으로서 항상 <아라비아의 로렌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같은 서사시적 이야기, 신화적인 인물, 장려한 비주얼이 있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참 시나리오 쓰기도 투자받기도 고생스러운 영화들인데도 그 모험들이 재미있는 거예요.

김영하 | 현란한 입담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영화를 상상해요. 왜 할머니들한테 옛날얘기를 들을 때 “그래서 네 삼촌이 그 여자랑 결혼했단다” 하다가 전쟁 추억담으로 빠지면 “그 얘기 말고요” 조르면서 다시 거슬러가잖아요. 그런 제대로 된 구성이 결여된 기억과 같은 느낌의 영화, 극장문을 나서며 “재미있는데 정리는 잘 안 돼. 그냥 가서 봐”라고 말하게 되는 영화. (웃음)

이재한 | 소설에서는 그냥 쓰여 있지만,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사물을 보여줘야 하니까 궁리가 많아요. 당시의 전보며 축음기, 게틀링 기관총 등등. 요즘은 인물들이 서 있는 전경보다 백그라운드의 이미지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거든요. 당시 막 발명된 포드의 신차가 결함 때문에 뻥 터진다거나.

김영하 | 음악 한곡이 흘러도 암스트롱인지 쿠바 민요인지 정해야 하잖아요. 아악부 내시 출신 인물인 김옥선이 10년 뒤에 기타를 익혀 카운터테너의 음색으로 멕시코의 광장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은 어떨까 싶기도 하고. 일포드호가 한달 넘게 항해하는데 여흥도 있지 않았을까요? 배에서 만난 극중 연인인 연수와 이정의 사랑도 갑판에 소리꾼이 올라와 사랑가를 부를 때 눈길이 마주치면서 싹트는 겁니다.

이재한 | 프랑코 제피렐리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을 <춘향가>로 푸는 거죠. (웃음)

김영하 | 그런데 노래를 마친 소리꾼이 멕시코 뱀독에 듣는 약을 팔기 시작하는 거예요. (폭소) 나는 비장하기만 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가짜라고 여겨왔습니다. 독립군이라고 늘 조국의 독립만 생각했겠어요? 참호에서 서로 똥침도 놓고 그랬을 거예요. 그게 역사의 진실에 가깝겠죠. <인생은 아름다워>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을 웃기잖아요.

이재한 | 영화로 풀기 위해 억지로 재미있는 인물을 만들 것이 아니라 풍부한 비주얼 안에서 자연스럽게 고안돼야 할 것 같아요.

김영하 | 지난번에 “35신까지 썼는데 벌써 100억이야” 하면서 농담도 했지만 한줄한줄 쓰며 갑자기 돈 계산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멕시코 대평원을 달리는 기차. 말들이 쫓아가고 100여명의 강도가 뒤를 따른다. 흙먼지가 인다. 이때 30여두의 말이 쓰러진다.” (웃음) 이거 한줄한줄이 다 얼마예요. 사실 예산을 신경쓰며 쓰자면 “기병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기차는 떠났다. 망연자실한 기병 뒤로 멀리 사라지는 기차. 늙은 역장이 메모를 전해준다” 이러면 수색역에서도 찍을 수 있고, 멀리 사라지는 기차는 CG로 그려넣어도 되겠죠. (웃음)

이재한 | 일단은 상상력을 맘껏 풀어두고 완성된 그림을 흐뭇하게 그려보며 쓰는 것이 맞다고 봐요.

김영하 | 이야기 성격상 해외 투자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장 영화가 되든 안 되든 예산에 짓눌리지 않고 완성도가 높은 시나리오를 써놓으면 최악의 경우에도 언젠가 한국영화의 자금 사정이 좋아지면 만들어질 거라고 봐요. <검은 꽃>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예요. 라라와 지바고가 만나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도 우리는 <닥터 지바고>를 혁명에 관한 시대극이 아니라 사랑영화로 기억하잖아요. 사람들 ‘뒤로’ 혁명과 역사가 지나가는 거죠. 사실 소설 <검은 꽃>을 쓰면서 참신한 기법, 다큐 기법, 소설과 상관없는 기사도 인용하는 나름의 시도를 많이 했는데 결국 독자에게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연수와 이정은 어떻게 된 거냐?”였어요.

이재한 | 하긴 나도 그랬어요. 연수와 이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검은 꽃>에서 사랑과 국가는 분리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김영하 | 그러나 말이 국가의 건설이지 실상 국가의 상실에 가깝죠. 인물들이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밀림에 세웠을 때 “와, 드디어 건국했다!”가 아니라 “에이휴” 한숨이 나오잖아요. 이를테면 최영처럼, 먼 옛날의 위대한 장군을 사당에 모시는 행위처럼 보이고, 국가에 대한 작은 화상이라도 그려보려다가 그것까지 불타버리고 마는 느낌이 <검은 꽃>이 남기는 잔상이죠.

이재한 | <검은 꽃>에서는 국가를 세우려는 노력과 태도 아래에 흐르는 정서가 허무와 상실감이죠.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에 최초로 매료된 것도 각색에서 꼭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한 부분도, 사라져버리고 죽어가고 떠돈 조선인들이 과테말라 밀림에 나라를 세운 사실이었어요.

김영하 | 만약 우리에게 이견이 있다면 이 부분인 것 같아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지향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나는 국가보다는 허무주의와 멜로를, 감독은 건국의 모티브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러나 아직 쓰지 않은 대목이니 한발한발 계단을 밟아 3장(원작의 제3부)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기대해요.

이재한 | 국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될 것이고 저변에 깔리느냐 전면에 나서느냐의 문제겠죠. 개인적으로 삶의 절반쯤을 외국에서 살았지만, <검은 꽃>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국적 인간의 고민이라기보다 국적, 성별처럼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어떤 경계에 대한 시선이었어요.

김영하 |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하는 철학 수업에서 흔히 고민하는 주제인데 삶을 좌우하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조건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국적, 성별 그 다음은 계급 아닐까요.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면 지식인이라도 폭탄 피해다니며 살아야겠죠. <검은 꽃>의 그들도 특정 시대의 조선에서 태어나서 제물포 근처에 살아서 멕시코로 간 거고, 당대의 멕시코인들도 멕시코에서 태어났기에 혁명에 휩쓸렸겠죠. 그러고보니 감독님은 국경을 넘어가는 요소를 포함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아닌가요?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그렇고 <대부>도 이민 가족의 이야기고.

이재한 | 음, 그러고보니 <와일드 번치>도 그렇군요. 한데 기묘한 것은 원작에 의해 결론과 설계가 완전히 그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작업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김영하 |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한분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목수나 배관공의 일과 소설가의 일이 다른 점이 바로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애들’을 풀어서 시킬 수 없다는 것도 우리의 비극이죠. (웃음) 아무리 거물 작가라도 앉아서 자판을 두들기며 한줄한줄 써내려가는 것 외에는 수가 없으니까요.

이재한 | <검은 꽃>은 초조해하지 말고 1고, 1고 굉장히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할 영화라고 생각해요. 프리 프로덕션도 무척 길 테고 일러야 내년 겨울에나 촬영에 들어가지 않을까.

김영하 | 시간도 충분하고 전에는 다 써놓고야 알 수 있었던 문제를 초반에 포착할 수 있었고 소설을 쓰면서 연구한 세계이고 인물이니까 손에 힘이 붙는 기분입니다. 인물도 많고 여러 연대를 넘나드는 영화니까 플롯의 과감함과 혁신적인 영화적 기법을 동시에 관객에게 쉽게 이해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봐요. 관객에게 역사를 계몽할 생각도 현명한 척할 생각도 전혀 없어요. 건축물에 비하자면 들어갔을 때 기둥에 부딪히는 일 없이 자연히 마음이 정화되는 성당, 그림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미술관 같은 영화였으면 좋겠어요. 건축가의 의도를 몰라도 들어갔다 나오면 공간에 관한 이해가 깊어져 있는 건물 같은 영화.

이재한 | 아름다운 건물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유리창이 몇개였고 기둥 자재가 무엇이었고 샹들리에는 어땠다는 기억은 남지 않아요. 공간이 자아내는 한 덩어리의 감동, 하나의 하모니로 남는 거죠. 마찬가지 목표를 영화를 통해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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