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살아 있다고 설정하면 어떨까”
미스터리 심리썰렁물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파트>는 사람 잡는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다. 청년 ‘고혁’은 맞은편 동에서 밤 9시56분만 되면 여러 집의 불이 동시에 꺼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불가사의한 암전현상과 연속적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한 고혁은, 항상 외로이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여인을 구해내기 위해 죽음의 아파트로 뛰어든다. 2004년 5월19일부터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연재되었던 <아파트>는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며 감상하는 인터넷 만화의 독창적인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새로운 회가 업데이트되는 날이면 다음(Daum)의 서버가 느려질 만큼 많은 독자들이 몰려들었고, 일본에 판권도 두둑하게 팔았으며, ‘공포영화 전문감독’ 안병기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진행되는 <아파트>의 각색이 쉬울 리가 없다. “지금 시나리오를 7고째 고쳐쓰고 있어요.” 강풀은 힘들어 죽겠다는 감독을 ‘알아서 하세요. 저는 모릅니다’(혹은 믿습니다)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중에 죽은 고혁의 얼굴을 귀신과 반반, 아수라 백작처럼 하는 건 어떨까?” “감독님, 제발….” “윤수일의 <아파트>를 편곡해서 넣어야지.” “….” 비오는 월요일 저녁에 만난 안병기 감독과 만화가 강풀의 미스터리 심리썰렁 대화.
안병기 |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네요. 만화가니까 안경끼고 수염나고 좀 마른 사람이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갔더니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나도 영화계에서는 키가 제일 큰 편이지만. (웃음)
강풀 | 사실 감독님이 관심을 보인다니까 되게 기분이 좋았어요. <아파트>가 영화화되면 비주얼이 좀 끝내주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사실 만화를 그리면서도 비주얼이 좀 안 되잖아요. 주변 친구들도 안병기 감독님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들 하고. 근데 감독님이 딱 하신다더라고. 그래서 처음 만났는데, 야아, 참 잘생기셨구나 하고, 생각했죠. 감독님, 인터뷰 땐 아까처럼 말고 이렇게 해주는 겁니다. (웃음)
안병기 | (웃음) 강 작가와 이야기를 해보니까 주인공 고혁이랑 참 비슷하더라고요. 그래서 본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린 줄 알았어요.
강풀 | 대개 만화가들은 주인공을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그려요. 거울로 제일 자주 보는 얼굴이라서 저절로 비슷하게 그려지거든요. 근데 <아파트> 말고도 준비하신 것들이 있지 않았나요?
안병기 | <가위>가 개봉한 2000년 이후로 한국 공포영화가 꽤 많이 나왔죠. 그런데 다 비슷비슷했고 새로운 느낌이 있는 영화를 보는 게 참 힘들었어요. 다 여성의 한을 소재로 하고, 그래서 결국 복수극이고, 전화받으면 죽고, 싱크대에서 기어나오고.
강풀 | 엄청 기어들 나오죠. (웃음)
안병기 | 촉박한 제작기간에 저예산으로 스타 없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쉽게쉽게 준비해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해요. 관객은 이제 식상할 대로 식상해하고. 그래서 <분신사바> 만들고 나서는 많이 힘들었어요. 한국에서 계속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발전하는 걸 못 보여주니까 벽에 막힌 기분이었죠. 그래서 귀신 나오는 영화는 안 하겠다고 인터뷰에서도 밝혔고….
강풀 | <아파트>에도 귀신은 나오는데.
안병기 | <아파트>는 귀신이 나오는데도 새로운 게 있어요. 좀더 현실적이라고 할까. 강남에서 강변대로 주욱 타고 가다보면 아파트가 얼마나 많아요. 거기에 얽힌 사건도 많잖아요. 빚 때문에 동반자살하기도 하고. 그런 현실이 <아파트>에는 잘 살아 있어요. 귀신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번 마음먹고 도전해서 극복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싶었죠. 강 작가 특유의 썰렁개그도 있고.
강풀 | 미스터리 심리썰렁물이라고 써놓았죠. (웃음) 제가 아는 말 다 집어넣은 거예요.
안병기 | 여태껏 만들어온 영화를 정리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시나리오를 7고째 쓰다가 지쳐서 쉬고 있다니까.
강풀 | 제 만화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재창조할지 궁금해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는 것도 재미있고. 오리지널과 똑같이 하려면 뭐하러 만듭니까. 재미없어요 그런 건. <그루지>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주온>과 똑같게 만들려면 왜 만든 걸까.
안병기 | 제가 <하얀 전쟁> 조감독할 때 안정효 선생님도 자주 뵈었었는데, 원작을 놓고 감독이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각도에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간섭도 안 하셨어요. 소설은 내 창작품이고 영화는 감독 창작품이라는 마인드였죠. 강 작가도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참 고마워요. 자기 작품에 깊이 간섭하는 작가들도 꽤 있거든요.
강풀 | 영화는 감독의 창작품이니까요. 내가 원작자이긴 하지만 만화와 영화는 다르잖아요. 같은 뼈대를 가지고 있어도 매체가 다를 때는 강요할 수 없죠. 하긴 내가 뭘 알아야 강요를 하지. (웃음) 그리고 일단은 감독에게 신뢰가 가니까.
안병기 | 신뢰. 좋네. (웃음)
강풀 | 복학할 즈음에 <가위>를 봤거든요. 참 좋더라고요. 비주얼도 먹어주고. 그래서 <폰>도 극장에서 봤어요.
안병기 | 아주 좋아요. 극장에서 내 영화 보는 거. (웃음) 그런데 말이죠. 전국 영상위를 통해서 아파트를 섭외해봤는데 베란다끼리 서로 마주보는 아파트는 있을 수가 없다더라고. 사생활 침해 때문에 그렇게 안 짓는대요. 그러니 영화 때문에 15층짜리 아파트 두채를 지을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강풀 | 제가 알 게 뭐예요. (웃음)
안병기 | 그래서 CG를 많이 써야 할 거고 제작비 규모도 커질 것 같아요. 제가 만든 작품들 중 가장 어려운 영화가 될 것 같고. 또 이 영화 만들면서 나올 공포영화들은 다 봐두어야 할 것 같아요. 귀신이 나오니까 다른 영화들과 비슷한 장면들이 나올 수도 있거든요.
강풀 | 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베란다에 서 있는 사람과 추락하는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장면은 <4인용 식탁>에서 나왔다더라고요. 근데 저 그거 안 봤거든요. 만화가 이러니 영화는 더 문제가 심각해지겠죠?
안병기 | 특별히 <아파트> 그리면서 영향받은 공포영화는 없어요?
강풀 | 영화는 없고 실제 이야기들은 좀 있어요. 우리 누나가 덕수에 있는 아파트 2층에 살다가 이사 나왔어요. 왜 갑자기 이사가냐고 물어보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고요. 꿈만 꾸면 항상 창문 밖에서 아이 하나가 넘어와서는 피아노 방으로 기어들어가더래요. 그런데 하루는 애들 재워놓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또 꿈속의 애가 2층 창 밖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서 넘어오더니 피아노 방으로 가는 도중에 누나 팔을 밟더래요. 그 순간 ‘화악!’ 깼는데, 진짜로 팔에 하얀 자국이 남은 거예요. 꼭 발자국처럼 생긴. 그 이후로는 너무 무서워져서 이사나왔대요.
안병기 | 아, 그거 소름끼친다. 영화에 써먹어야지.
강풀 | 아파트가 좀 무서운 데가 있죠. 제가 사는 오피스텔 맞은편에 조망권에 걸려서 짓다 만 아파트가 있었어요. 건물은 거의 다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아무도 안 살아서 흉물스러웠죠. 그런 아파트에 불이 동시에 켜졌다가 꺼지면 참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이제는 그 아파트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사는데, 우리집에서 사람들 사는 게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관음증에 대한 테마도 떠올랐고, 그러다보니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그런 게 <아파트>의 시작이었죠.
안병기 |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잡혔을 때 옆집에 살던 이웃들 인터뷰를 봤거든요. 유영철이 음악 틀어놓고 전기톱으로 사람을 토막냈잖아요. 그런데 옆집 사람들은 그제야 그게 사람 토막내는 소리였다는 걸 알고 소름끼쳐하더라고. 지금 한국이 이런 사회라는 거죠. 그래서 <아파트>를 영화화하면 좀더 현실적인 공포영화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정지된 만화에서는 귀신 얼굴만 그려놔도 무섭지만, 영화는 안 그래요. 지금껏 공포영화에서 귀신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나왔어요.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기어나오기도 하고. 그런데 정지한 귀신 얼굴만 보여준다고 사람들이 무서워할까.
강풀 | 제 만화를 두고 사람들이 영화 같다는 말을 자주 해요. 꼭 영화와 만화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나쁘진 않죠. 그런데 반대로, 영화가 꼭 만화 같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은 게 사실이잖아요. 좀 잘못된 표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폄하할 때 사용하는 말이니까. <아파트> 영화가 꼭 만화 같다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시나리오 7, 8고까지 나온 게 다 이해가 갑니다. (웃음)
안병기 | 우리 제작부가 그래요. 감독님, 시나리오는 왜 쓰세요? 여기 콘티 있잖아요. 이러면서 원작만화 툭 던져준다니까. (웃음) 강 작가 만화는 너무 생략이 잘되어 있는 게 영화화하는 데는 좀 까다로운 것 같아.
강풀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사실 온라인에서 호러만화는 처음이거든요. 만화란 게 원래 소리도 안 나는 정지된 세계니까 어려움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게 장점이 돼요. 독자들이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상상을 하면 공포도 더 커지잖아요.
안병기 | 그런데 작품들마다 화자가 바뀌는 옴니버스식 구성을 쓰는 이유가 뭐예요?
강풀 | 집중력이 높아지거든요. 나중에 가서야 한 캐릭터의 이야기가 진행되던 동안 다른 캐릭터도 사건에 얽혀 있었다고 밝혀지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안병기 | 사실 <아파트>의 또 다른 재미가 바로 그거였어요. 한 사람의 눈으로 진행되다가 또 다른 화자를 중심으로 다시 진행되고. 그런 것들이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으로 모아지고. 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옴니버스식 구성을 고집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만화와 다르게 영화는 중심 화자가 있어야 해요. 많아지면 집중력이 산만해지거든. 그래서 고혁을 중심인물로 놓으려고 해요. 그리고 저승사자 이야기는 빼려고요. 영화에서도 만화에서처럼 ‘난 저승사자인데요’라고 말하면 관객이 다 웃을 거예요.
강풀 | 저승사자 이야기는 살렸으면 좋겠는데.
안병기 | 아깝지만 만화가 지닌 몇몇 재미는 영화 속에서 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워서 다시 시나리오에 넣어봐도 수습이 좀 곤란하더라고요. 내 옆집에도 저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 관객이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하거든요.
강풀 | 뭐 안 살아도 상관은 없어요. (웃음) 배우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세요?
안병기 | 유력한 사람은 있지만 아직 접촉 중이에요. 원작과는 다르게 조금 샤프하고 차가운 외형의 인물이 필요하거든요.
강풀 | 형사 역할은 누가 하죠? 박기형 감독님(<여고괴담> <아카시아>)이 지금 연재 중인 <타이밍>을 영화화하기로 하셨거든요. 근데 <아파트>에 나오는 형사 캐릭터가 지금 연재 중인 <타이밍>에도 나와요. 박기형 감독님은 안병기 감독님이 캐스팅할 형사 역 배우 그대로 쓰겠다던데.
안병기 | 그거 좋네. 출연료를 반씩 내면 되잖아. 의상도 같이 쓰면 되겠다. (웃음) 강 작가는 생각해본 배우 없어요?
강풀 | 없어요. 아, 한명 있다. 배두나요. 그리고 형사는 차승원의 건들건들한 이미지를 생각해봤었어요.
안병기 | 그 배우들을 하려면 제작비가….
강풀 | 나중엔 <아파트2>도 그릴 거예요. 밤이면 주차장에 차들이 꽉 차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도 어떤 법칙이 있는 거예요. 잘 모르는 사람이 잘못 주차하면 죽게 되는 거죠.
안병기 |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가 살아 있는 거라고 설정하는 건 어떨까요.
강풀 | 제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안병기 | 근데 <아파트2> 그릴 생각이라면, 영화 <아파트>의 라스트도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바꿔야겠네.
강풀 | <아파트2>. 안 할지도 몰라요. (웃음)
안병기 | 영화 <아파트>가 잘돼야 2편이 나오는 거죠. <아파트2>는 언제쯤 시작하는데요?
강풀 | 3∼4년 뒤에요. <타이밍>은 10월13일에 마칠 예정이고, 내년엔 상계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게 되었어요. 저는 원래 이야기를 다 생각해놓은 다음에 만화를 그리는데, 네편의 만화를 끝내고 나니까 아이디어가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한 1년은 학생들과 지내고, 내년 후반에는 드라마 각본도 하나 쓰고. 다음 1년은 해외여행을 가볼까 해요. 한번도 비행기를 못 타봤어요. 예전에 강화도로 놀러간다기에 마침내 비행기 한번 타보나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강화도는 지상하고 연결돼 있더라고. (웃음).
안병기 | 강 작가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시나리오도 잘 써질 것 같네. 그래봐야 컴퓨터 앞에 앉으면 또 머리 싸매겠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