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2] - 새내기 스턴트맨의 하루 ②
2005-09-10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한 게임 더?”

8월20일 PM 5:00 경기도 강화군 석모도

“너무 체력이 약한데. 한 게임 더 하는 게 어때요?” 방송 출연으로 얼굴이 낯익은 여의도 FC의 최창호 박사가 나이스 가이 팀을 약올린다. 무술연기자노조 축구팀인 나이스 가이쪽에서는 “우리는 다 환자예요”라며 슬그머니 물러서더니 결국 마지막 게임에 뛸 선수들을 물색하느라 바쁘다. 잠깐 교체멤버로 들어섰다가 10분을 채 뛰지 못하고 허리가 아프다며 빠져나온 김형준 무술감독은 통증이 계속되는지 계속 울상이다. 노조 지부장인 김범석 무술감독은 한 방송사와 계약문제를 이야기하느라 휴대폰을 좀처럼 놓지 않는다. “축구공 다 바람 빼버려!” 번듯한 휴가 한번 가지 못해서인가. 서울 떠나 강화도라고 해서 아이 데리고 따라왔더니만, 종일 축구 구경만 하게 만드는 남편이 못마땅한지 한 무술감독의 아내가 분통을 터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친선 축구는 느지막한 오후까지 선수를 바꿔가며 끝모르게 계속되고 있다. 한 게임도 빠지지 않고 뛰어야 했던 탓에 탈진한 상태의 광락씨도 한숨 돌리더니 여자친구가 슬슬 걱정되는 모양이다. 새벽에 갑자기 아픈 여자친구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는 그는 기필코 노조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아침부터 싸웠다고 한다. 광락씨가 이 모임에 절대로 빠지지 않으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곳에서 혹시나 일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배들과 얼굴을 익혀두는 것도 앞으로를 위해서 꾸준히 해둬야 한다. 9월5일에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광락씨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현장 경험을 더 해보고 싶어 안달이다. 그런 광락씨의 마음을 알고 있는 선배 추현경씨가 다음주에 <카리스마 탈출기>의 촬영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단 기다려보라고 일러준다. 그게 고마운지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인 추씨의 주먹 장난을 그는 싫은 내색 않고 고스란히 받아준다.

“우리 동네에 유명한 형이 있었어요. 김도진이라고. 지금도 힘들 때마다 의지하는 형인데, 중학교 때 그 형이 다니는 킥복싱장에 갔다가 엄청난 걸 봤어요. 지하 도장에 난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친구들하고 봤는데, 정말 샌드백이 천장에서 내려올 새가 없어요. 그만큼 발차기가 세고, 빠르더라고요. 저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죠. 원래 꿈은 축구선수였는데, 축구부에서 키 작다고 넌 안 된다고 해서 그럼 뭐하나 싶던 차에 하고 싶은 걸 발견한 거죠. 마침 쌍둥이 형이 또래들에게 맞고 이가 부러져서 집에 돌아오는 사건도 있었고. 많이 맞아야 피할 줄도 알게 되고 때릴 줄도 알게 된다고. 처음 몇년 동안 죽어라 맞기만 했어요. 너무 아파서 다음날 학교 계단 오를 때는 항상 난간 붙잡고 올랐고, 그때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형과는 일란성 쌍둥이인데 얼굴이 달라요. 다들 친구인 줄 알죠. 그때 강호체육관을 운영하시던 분이 최강호 관장님이라고, 1980년대 말부터 스턴트 연기를 하셨어요. 관장님은 전 나이가 어려서 항상 빼놓고 형들 데리고 촬영장에 가시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신기해요, 조금만 더 해봐요”

8월21일 PM 7:00 석관동 의릉

광락씨는 짬이 나면 집 근처 의릉에서 운동을 한다. 평소에는 의형제라 할 만한 선배 김철준, 안용우씨 등과 함께 운동을 하지만,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 촬영 때문에 지방에 머물고 있는 터라, 이날은 혼자다.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촬영현장에서의 호출도 눈에 띄게 줄어든 탓에 사정상 <불멸의 이순신> 오디션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광락씨의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나온 여자친구 전소연씨는 “매일 대기하다가 일 있다고 선배들에게 연락받으면 만사 제쳐두고 휙 가버린다”며 “수영장에 놀러가기로 한 약속은 언제나 지킬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가볍게 몸을 풀던 광락씨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니만큼 현장에서 써먹을 만한 액션은 보여줄 수 없다면서 과거에 익혔던 우슈 자세를 보여준다. 의릉 입구에 ‘운동기구를 활용한 운동행위 금지’라는 경고 문구는 혹시 광락씨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비기 연마를 위해 낮밤 가리지 않고 의릉에서 목검을 휘둘렀던 그를 주민들이 오해해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한참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오해를 풀었다는 그는 이제는 운동을 하면 구경꾼이 몰려드는데다, 경찰들까지도 가세해 “신기하다. 조금만 더 해보라”고 부추기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운동을 그만뒀어요. 1학년 마치고 자퇴를 하고선 친구들하고 어울려 원단도 나르고, 식당 일도 하면서 떠돌았어요. 그런데 한번은 술에 취해서 깼더니 노량진우체국 앞에 제가 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더라고요. 서울 외곽에서부터 밤새 걸어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어 주먹질을 한 거죠. 온몸이 피투성이인데 주변에 한 아주머니가 불쌍했는지 아는 사람에게 전화걸라며 100원을 주시더라고요. 그때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다시 운동을 시작했죠. 낮엔 일하고, 밤엔 운동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중학교 때 막연하게 나중에 스턴트맨이 돼야지 했던 꿈이 떠올랐어요. 여기에 한번 인생을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때가 스물이 넘어서였니까. 남들보다 한참 늦은 거죠. 남 아프게 때릴 줄만 알았는데, 그때부터 안 아프게 때리는 법도 배워야 하고. 발차기를 예쁘게 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하나라도 더 빨리 배워야 했으니까 운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죠.”

“현실에선 불가능해도 영화적으로는 가능한 발차기”

8월22일 PM 10:00 석관동 집

운동을 빼면 광락씨의 유일한 취미는 게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게임기를 쥐고 살았다는 그는 격투게임이 액션안무를 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귀무자3> <진삼국무쌍4> 같은 게임 오프닝은 언젠가 자신이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선보이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라는 그는 요즘 게임의 경우 다양한 카메라 앵글까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게임에 문외한인 기자가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어서인가. 그는 <철권4>를 빌려오더니 주먹으로 상대의 다리를 공격해 쓰러뜨리는 기술을 짚어주면서 “누군가와 현실에서 싸울 때는 불가능한 기술이지만, 영화적으로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아직 제대로 된 와이어액션 한번 못해본 터라 선배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면서도 그는 요즘 한국영화 액션이 너무 리얼한 대결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의 취향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관객으로서 한국영화의 액션을 대할 때마다 움직임 자체의 멋이 전해져오는 게 아니라 저렇게 맞았으니 얼마나 아플까 하는 느낌이 먼저 드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보는 사람 홀리는 서양의 빠른 액션보다는 보는 사람이 움직임을 음미할 수 있는 동양적인 액션 연기가 더 맘에 든다는 그는 언젠가 스크린 위에 자신의 꿈을 펼쳐 보이겠다고 한다.

“체질인가봐요. 카메라 앞에선 안 떠는 거 보면. 한번은 죽는 연기를 하는데 내가 살아 있다는 게 가슴으로 느껴진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신기가 있으신데 제 사주팔자를 보시더니 대성할 직업으로 1순위가 영화배우라고 하시대요. 그 말 듣고 배우의 자질은 없지만, 이쪽 길이 영 틀린 건 아니구나 싶었어요. 요즘엔 영화개론서나 시나리오도 찾아 읽고 그래요. 워낙 책하고 안 친해서 힘들긴 한데, 카메라를 모르면 바보 취급 당하니까. 완전 초짜일 때인데, 상대를 노려봐야 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앞서서 혼자서 칼 들고 빙빙 돈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 다들 ‘쟤, 누가 데려왔냐’ 하시더라고요. 사극에선 몸을 잘 돌려야 그림이 예쁘다는 걸 어디서 듣고서 혼자 까분 거죠. 경쟁자요? 토니 자, 성룡, 정두홍 순이죠. <옹박> VCD를 체육관에서 모여서 봤는데, 상대를 걷어찬 발로 착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토니 자는 남들보다 공중에서 한 바퀴 더 돌더라고요. 큰돈 벌거나 무술감독이 빨리 돼야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토니 자 같은 발차기를 언젠가 제 몸으로 직접 해보고 싶을 따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