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턴트의 내일, 이곳에 있소이다
이거 제대로 찾아온 건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안에 자리한 보라매체육관으로 들어선 순간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급작스레 터져나온 라틴음악 때문이었다. 끈적한 땀내음과 불꽃 튀는 무예 단련 대신 체육관 안에는 라틴댄스의 리듬을 타고 있는 남녀 몇쌍만이 있었다. 다시 한번 찬찬히 입구로 가보니 ‘댄스 스포츠 강좌’, ‘체대 입시 아카데미’, ‘배드민턴 교실’ 등 어지러이 나붙은 플래카드 틈새로 네모난 현판이 보인다. ‘서울액션스쿨’, 이 여섯 글자가 마음을 놓게 한다. 슬쩍 둘러보니 체육관 바깥을 서성대는 건장한 청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오전 동안 댄스 스포츠 강좌의 차지였던 이곳이 힘찬 기합과 고함 소리, 마룻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로 가득 찬 서울액션스쿨의 세상이 된다. 보라매체육관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서울액션스쿨은 98년 설립된 이후 한국 스턴트 액션의 메카로 자리잡아왔다. 정두홍 감독을 비롯해 9명의 무술감독과 38명의 단원들, 그리고 28명의 수련생 등이 뒤얽힌 이곳은 한국 스턴트 액션의 당당한 오늘을 한눈에 보여준다. 이제 성큼, 서울액션스쿨 안으로 한발 들어가 구석구석을 둘러보자.
1/ “웃싸!” 지중현(29)씨가 두발을 띄운 채 킥 연습을 하고 있다. 언뜻 김지운 감독을 연상시키는 외모를 가진 그는 1998년 서울액션스쿨의 교육생 1기로 스턴트 액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다수의 스턴트맨들이 태권도, 합기도, 우슈 등 무술을 익힌 경력의 소유자인 데 반해 그는 이곳에 들어온 뒤에야 운동을 시작했다. 드라마 촬영 도중 사고사한 스턴트맨 정사용씨의 삶을 담은 MBC <인간시대>를 보고 이 길을 택했다는 그는 “그저 지기 싫어서 미친놈처럼 운동을 했다”고 말한다. “최소한 ‘다찌마와리’ 액션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힌다고 자부한다”는 그는 “그냥 심심해서” 발차기를 하고 벽을 올라타고 있었다.
2/ 빨간 티셔츠를 입은 이 청년, 하라는 액션은 안 하고 껑충 뛰며 돌고, 발꿈치로 걷기도 한다. ‘희한하네, 꼭 발레 같네’ 하는데 “저 발레 전공 맞아요” 한다. 한양대 생활무용예술학과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있는 박지운(24)씨가 액션스쿨을 찾은 이유는 9월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예의없는 것들>을 위해서다. 극중 주인공 중 한명이 발레를 결합한 액션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는 그 배우의 대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해 출연하게 됐다”는 그는 액션을 연습하면서 “우리는 예술이라고 뻐기는 게 있는데 이쪽 사람들은 한번 구르고 뒹구는 데도 열심이다”라고 땀범벅의 느낌을 전한다.
3/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올해 3월부터 액션스쿨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9기 교육생 이정귀(20·왼쪽)씨와 최동철(25)씨가 맹연습 중이다. 3월14일 48명으로 출발했던 9기는 졸업을 앞둔 현재 28명만이 남은 상태. 9월이면 수료를 하게 되지만, 별도의 테스트와 훈련을 통해 선발된 극소수만이 잔류할 수 있다. 안정적인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액션스쿨에 온 동철씨는 누구보다 간절히 무술감독의 길을 걷기를 원한다. “열정을 다 바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 정귀씨는 재일동포 3세로 동포들의 삶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왔다. 고려대 어학원을 다니면서 액션스쿨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신림동 고시원에 살면서 액션배우의 꿈을 향해 땀을 흘리고 있다. 김원중 사무장은 이번 교육생 중에는 정귀씨 말고도 탈북자 출신과 재미동포 청년도 있다고 귀띔한다.
4/ 백전노장들도 액션스쿨을 즐겨 찾는다. 경력이 18년에서 27년에 이르는 김이호, 양해길, 박완규, 서장석씨 등은 한때 한국 액션영화계를 주름잡던 스턴트맨들이었다. 가장 경력이 화려한 김이호씨는 <소림사 주방장> <걸식도사> <맹룡도> 등의 영화에서 거룡, 바비김 등 액션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스크린을 누볐다. 아니, 이들의 삶은 과거형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최근까지 <불멸의 이순신>에 출연해왔고, 서장석씨는 현재 <제5공화국>에서 청와대 경호원으로 출연 중이다.
5/ 테스토스테론이 넘쳐 흐르는 보라매체육관에 아리따운 여성이 나타났다. 누구의 동생인가, 애인인가, 궁금해하는데 칼을 들고 역동적인 액션 연기를 연습하는 모습이 고수라는 느낌을 준다. 올해 스물네살의 배우 김효선씨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5년 전. 가수지망생이었던 그는 엉뚱하게도 액션영화를 준비했던 기획사의 소개로 이곳에서 액션을 익혔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기획사와는 헤어졌고, 운동이 좋아 체육관을 계속 나오게 된 효선씨는 “액션이 뛰어난 여자배우”가 되기 위해 ‘오빠’들과 살벌한 운동을 해나갔다. 정두홍 감독의 배려로 중국 선양의 무술학교에서 연검(부드러운 칼) 액션을 익히기까지 했다. 손해도 있었다. “다들 저를 배우가 아니라 스턴트우먼으로 생각하잖아요.” <내츄럴 시티> <대망>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에 출연했던 그는 <짝패> 촬영을 앞두고 기량을 연마하고 있다.
6/ “홍콩에서 왔슴다.” 성룡의 액션팀 ‘성가반’(成家班) 소속의 박현진(30)씨도 액션스쿨에 나왔다. 6년 전 성룡 팀에 발탁됐던 그는 이제 성가반의 ‘2인자’로 활약 중이다. 주로 성룡의 맞상대로 나왔고, 고층에서 뛰어내리는 대목 등에서 성룡의 대역을 맡았던 그는 한국에서도 곧 개봉할 <더 미스>에서는 악당 조직의 고수로 출연할 예정. 6년 만에 가장 긴 휴가를 받아 5개월째 한국에 체류 중인 그는 “홍콩으로 떠나기 전 친하게 지냈던 형들이 있는” 액션스쿨에서 꾸준히 기량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성가반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무술감독이 3명이라니 “할리우드의 무술감독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가시권에 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