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스턴트맨이 사는 법 [5] - 한국 스턴트의 현황
2005-09-10
글 : 문석
가파른 발전 이룬 9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 스턴트가 걸어온 길

한국영화 스턴트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새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60∼70년대를 풍미했던 소자본 액션영화나 홍콩과의 합작영화, 이대근, 백일섭 등이 주연하는 액션영화, <소림사> 시리즈 등이 8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고, 액션영화는 <우뢰매> 시리즈 등의 아동영화나 비디오용 영화를 통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결국 대중적인 액션영화가 줄어들었고, 스턴트 인력 또한 방송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전설의 고향> <암행어사> 같은 드라마나 <긴급구조 119>류의 재연 프로그램은 당시 스턴트 인력이 깃든 공간이었다. 지금 한국영화를 이끌고 있는 스턴트계의 주요 인물들은 35mm 액션영화의 전통이 거의 끊어졌던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충무로에 들어왔다. 전문식 감독이 86년, 정두홍 감독과 신재명 감독이 90년에 영화계로 발을 디뎠고, 70년대에 들어왔다가 홍콩에서 활약했던 원진 감독을 제외하면 현역 무술감독의 대다수는 이때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시기에는 침체일로의 한국 액션영화계, 스턴트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한편의 작품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이 바로 그것. 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액션영화였던 <장군의 아들> 시리즈는 액션을 꿈꾸던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을 줬고, 희망을 던졌다. 양길영 무술감독은 “<장군의 아들>을 보고 배우들이 저렇게 액션을 잘하는데, 나도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자극받아서 충무로에 들어와보니 거의 다 대역들이 한 것이더라”고 말한다.

90년대 중반, 새로운 국면 맞은 한국 스턴트

<아라한 장풍대작전> 촬영현장
<아라한 장풍대작전> 촬영현장>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TV와 영화를 오가며 활약하던 이들 젊은 무술감독은 액션에 남다른 뜻을 품은 감독을 만나면서 그동안 갈고닦았던 기량을 해소하는 기회를 얻는다. 정두홍 무술감독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를 만났고, 전문식 무술감독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를, 신재명 무술감독은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를 만나면서 한국영화의 액션을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했다. 유창국, 이응준, 김광수, 원진, 고명안 감독 등도 이러한 흐름에 가세해 한국 액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고,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무사> <조폭마누라> <화산고> <말죽거리 잔혹사>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 액션의 역사에 획을 그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흔히 ‘다찌마와리’라 불리는 격투액션뿐 아니라 와이어액션, 총기액션, 사극액션 등으로 빠르게 폭과 깊이를 더해온 한국 액션과 스턴트는 불과 5∼6년 사이에 눈부신 도약을 한 셈이다.

이런 사정의 배경에는 “감독의 취향이 다양화되면서 다양한 액션을 시도하게 됐다”는 김영빈 감독의 이야기처럼 영화의 변화가 액션의 깊이를 요구했다는 점이나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 등 관련 분야가 함께 발전했다는 점 또한 자리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변화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동력은 스턴트 인력 그 자신들이었다. 최근 <태풍>을 마친 신재명 무술감독은 “95년경부터 무술지도에 대해 고민했다. 한국에 있는 책은 다 봤고, 누가 홍콩에 가서 어떤 비디오테이프를 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날로 달려가서 보곤 했다. 촬영이나 조명 퍼스트급을 잘 꼬셔서 카메라워크나 조명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고 말한다. <올드보이> 등의 무술감독이었던 서울액션스쿨의 양길영 감독도 “정두홍 감독을 중심으로 미국에 가서 장비를 많이 구입했다. 미국에서 쓰는 장비를 어렵사리 가져다가 우리끼리 개조도 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액션을 연습했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서는 무술팀이 동영상으로 해당되는 액션장면을 찍고 편집까지 마쳐서 감독에게 제시하는 ‘동영상 콘티’까지 일반화되고 있다.

‘으악새’에서 무술감독으로

액션과 스턴트의 기량이 발전함에 따라 현장에서의 대우도 달라지고 있다. 80년대 초반부터 스턴트 활동을 했던 박완규씨는 “당시만 해도 스턴트맨은 주인공에게 얻어맞는 단역을 주로 맡았다. ‘으악’ 하고 소리친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를 ‘으악새’라 부르면 자조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태풍태양> 등에서 무술감독으로 참여한 이홍표 서울액션스쿨 대표는 “과거에 현장에 가면 스턴트맨은 배우도 아니고 스탭도 아닌 애매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방송 현장에 가면 아무도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지만, 액션에 대해서도 지원이 부족하다보니 스턴트맨들은 별다른 장비를 갖추지 못하고 오로지 몸으로 모든 상황을 헤쳐나가야 했다. 경력 25년째인 양해길씨는 “감독이 3층에서 뛰어내리라고 지시하면, 바닥에 라면 박스 몇개만 깔아놓은 채 뛰어야 했다. 과거에는 피아노줄에 매달려 와이어액션을 했는데, 줄을 너무 오래 써서 꼬이거나 충격을 받으면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바닥에 떨어져야 했다”고 설명한다. 얼마 되지 않는 개런티도 떼어먹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18년째 스턴트 활동을 하는 서장석씨는 “돈을 보고 한 게 아니라 그저 운동이 좋아서 한 일”이라고 말한다. 스턴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나아졌다. “스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집에서 쫓겨났다. 얼굴이 등장해도 대개 주인공의 상대편인 악역뿐이니 더 안 좋게 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젊은 친구들은 집안에서 지지해주는 경우도 꽤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배경에서 현재 한국 영화계는 20여명의 무술감독과 200여명의 스턴트 인력을 확보한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 촬영현장
<아라한 장풍대작전> 촬영현장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스턴트 인력들이 느끼는 불만은 여전히 존재한다. 가장 공통된 불만은 보험과 관련된 것이다. <사생결단>으로 무술감독 데뷔를 하는 박정률 감독은 “웬만한 보험사는 직업이 스턴트맨이라고 하면 아예 보험을 안 들어준다. 연기자라고 해서 가입을 해도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보험 조사원들을 잘 속여넘겨야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육체가 궁극의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스턴트 인력들은 영화계 전반이 나서서 보험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줄 것을 요구한다. 또 아무리 지원과 장비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스턴트맨들에게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홍표 감독은 “한국 스턴트팀이 카액션을 못한다고 말들 하는데, 폐차 직전의 자동차로 얼마나 대단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박정률 감독도 “롱테이크 장면을 찍을 때 대역을 기용한다면 대개 한 사람만 쓰는데 두 사람을 기용하면 훨씬 효율적인 촬영이 될 것”이라고 토로한다. 또 연출자가 무술감독의 제안이나 아이디어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도 지속적인 불만사항이다.

한국영화 스턴트는 전진한다

액션에 관심있는 이들은 한국 스턴트 액션의 강점이 리얼리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흔히 ‘개싸움’이라고도 부르는 감정선과 밀착해 있고, 과장되지 않은 액션이야말로 한국 액션의 독특한 색깔이라는 것. 전문식 감독은 “리얼 액션에 있어선 한국이 세계 최고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현업에 종사하는 스턴트맨들은 한국 액션이 너무 리얼리티에 몰두한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신재명 감독은 “리얼한 액션도 있겠지만, 화려하고 환상적인 액션도 있을 수 있잖나. 너무 리얼 액션 일변도이다 보니 와이어액션이나 무협액션 기량을 한껏 키운 스턴트맨이 만족하지 못하고 홍콩 같은 곳으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생긴다”고 설명한다. 또 리얼리티를 위해 배우가 직접 대부분의 액션을 맡는 경향이 강해지다 보니 표현할 수 있는 동작이 제한되고 있다. 양길영 감독은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은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져 다양한 액션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 스턴트의 발전이 이들의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의욕에서 비롯된 게 틀림없다면 충무로의 관심과 지지는 이들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날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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