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의 딸들, 충무로를 흔들다
충무로에 여배우시대가 오는 걸까. 남자배우가 정해져야 여배우뿐만 아니라 투자와 배급까지 결정되던 90년대 충무로 풍경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빅3으로 통하던 한석규·박중훈·최민수의 삼각체제에서 최민수가 이탈하고 박중훈이 주춤하면서 97년 후반부터는 한석규가 독주해온 형국이었다. 한때 충무로 제작자들의 집중공략 대상이던 배용준·송승헌은 무성한 소문만 남긴 채 아직 스크린과 만나지 못했고, 박신양·정우성·이정재가 선전했지만 신빅3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 틈새를 뚫고 여배우들이 뻗어올랐다. 심혜진·최진실·김혜수 등 베테랑들의 뒤를 이어, 심은하·고소영·전도연·신은경·김희선·최지우 등 브라운관의 스타들이 어느새 충무로 중심부에 진입했다. 아직 역전은 아니라도 이 가운데 몇몇은 남자스타 못지 않은 각광을 받으며 흥행의 일정 수준까지 담보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2, 3년간의 성적만 놓고 보면 이들 가운데 심은하·고소영·전도연의 활약이 단연 돋보인다. 이들의 출연작은 각각 2∼4편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흥행 상위에 올랐고 어떤 경우 극중 비중과 연기력에서 남자배우를 능가했다. 전성기 빅3의 위력에는 못 미친다 해도 이들을 20세기 충무로의 마지막 여배우 트로이카라고 부르는 일이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새로운 추세에는 액션 퇴조와 멜로 번성이라는 충무로 장르의 판도변화가 깊이 연관돼 있다. 액션물에서는 여배우가 남자의 보조 역할을 벗어나기는 힘든 반면 멜로는 남자와 1 대 1로 맞서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세 여배우의 최근 출연작도 대부분 멜로드라마다. 기실 1세대 트로이카 문희·윤정희·남정임, 2세대 트로이카 장미희·유지인·정윤희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멜로가 충무로를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 점은 신트로이카체제의 장수를 점치기 힘들게 하는 요소다. 충무로 장르는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고 있고, 다양한 장르는 다양한 개성의 배우들을 필요로 한다. 오늘의 스크린에서 절정을 맞은 여배우 가운데 예컨대 스릴러와 공포장르의 시험까지 통과할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명필름의 심재명 이사는 신트로이카라는 용어 자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이들의 현재 인기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는 다양한 개성의 연기자들이 할거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 그 근거다.
‘순위 정하기’와 ‘분류해서 이름 붙이기’는 원래 저널리즘의 칭찬받지 못하는 관행 가운데 하나다. 더구나 객관적 기준이 불분명한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이런 시도는 곧잘 자의적이거나 단견에 그치기 쉽다. 여배우 트로이카라는 이름으로 세 연기자를 꼽는 일도 이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한국영화 흥행붐과 함께 여배우시대를 주도하는 세 스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다양한 개성의 연기자들이 급성장해, 신트로이카체제가 단명에 그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