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4일 <8월의 크리스마스>로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았을 때 심은하(27)는 “고 유영길 감독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작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의 당연한 예의기도 하지만, 그냥 예의는 아니었다. “그분은 훌륭한 촬영감독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라는 걸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으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영화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가도 그분을 통해 배웠다”고 심은하는 말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배운 건 태도뿐이 아니다.
심은하는 <8월의…> 촬영 초반에 마음고생을 했다. 첫 촬영의 오케이 사인은 14번만에 떨어졌다. 게다가 허진호 감독은 뭐가 못마땅한지 설명하지 않았고 뭘 어떻게 바꾸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느낌이 아닌데…”라고만 할 뿐이었다. 심은하는 “솔직히 말해 짜증이 좀 났었다”고 말한다. 그전까지는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5번 이상 간 기억이 별로 없었다. 시나리오부터 약간 못마땅한 점이 있었다. 이야기 자체는 좋았지만 여주인공의 비중이 너무 작아보였던 까닭이다. 스탭들은 스탭들대로 심은하에게만 초조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한석규는 그냥 믿고 맡겨도 됐지만 심은하의 연기는 안심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오케이 사인도 주로 심은하의 연기에 따라 결정됐다. 스탭들과 심은하의 보이지 않는 긴장이 초반의 촬영장에 은근히 흘렀다.
촬영이 중반을 지나자 심은하는 손톱이 깨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편지를 문에 끼워넣는 ‘사소한’ 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화가 완성되고 나서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진짜 연기가 뭐라는 걸 알게 됐다”고 스탭들에 고마움을 표했다. “힘든 초반촬영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나자 그전까지 내가 껍질 안에 둘러싸인 답답한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였다”는 것이다. <8월의…>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조민환씨는 “이 영화를 거치면서 심은하는 일상성의 연기를 체득한 것 같다”고 평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심은하는 <8월의…>에서 희로애락의 정형화된 연기를 벗어나 나른함과 쓸쓸함이 스민 일상적 심리의 미세한 결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로 거듭났다. 이건 같은 세대의 어떤 여배우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과찬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면 된다. <8월의…>와 <미술관…>은 일상의 질감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자가 피할 수 없는 사멸의 운명을 응시하는 일상의 비가라면, <미술관…>은 환상과 현실이 기꺼이 공모하는 일상의 찬가다. 길을 가다가 하품을 쩍쩍 하고 찌개를 앞에 놓고 인디언 소리를 질러대는 여인이, 문득 하늘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을 때 관객은 이 여인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잠시 잊게 된다. 여전히 힘들었지만 이 가운데 몇장면은 심은하가 마치 자신을 연기하듯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게 이정향 감독의 전언이다.
작위성을 씻어낸 연기는 그러나 어떤 연기보다도 고도의 작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기던 아이가 어느 순간에 걷게 되는 건 몇가지 기술을 암기해서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뇌세포와 신경이 동원된 숱한 시행 착오 끝에 몸 전체가 새로운 균형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94년 TV미니시리즈 <마지막 승부>에서 시작된 심은하의 5년 연기인생 전체가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청소년 관객의 가슴을 설레게 한 이 청순가련계의 새 주자는 갖가지 드라마와 <M> 같은 공포물까지 거치며 또래의 어떤 연기자보다 풍부한 표정과 섬세한 눈빛을 지녔음을 알렸고, 98년에 마침내 두 감독의 연금술을 만나 자기 안의 보석을 발견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찾아진 이 귀한 균형은 아직 불안정하다. 실패한 미니시리즈 <백야 3.98>은 <8월의…>에서의 수일한 연기를 보여준 뒤인데도 다시 얼마간 청순가련형의 상투성으로 후퇴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 점은 탓할 일이 못된다. 영화든 TV드라마든, 미세한 연기를 필요로 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8월의…>와 <미술관…>이 예쁜 인형이 아니라 숨소리가 들리는 인간을 필요로 하는 영화였다는 것은 심은하 본인에게도 행운이었다.
심은하는 1월 말부터 방영되고 있는 미니시리즈 <청춘의 덫> 녹화하느라 녹초가 돼 있고, 1월 초부터 시작된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란> 미촬영분도 마쳐야 한다. 두 작품이 98년의 두 영화만큼 심은하의 연기를 빛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장이라도 걸작으로 필모그래피를 다 채우지는 않는다. 그래도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는 눈빛으로 말하는 연기를 이미 보여주고 있다.
내가 본 심은하
심재명(명필름 이사)- 브라운관은 심은하의 가능성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스크린을 위해 태어난 배우. 영화사를 빛낼 걸출한 배우로 기대한다.
이정향(영화감독)- 예쁘고 명민하다. 시나리오 해석력, 순간 집중력이 놀랄 만큼 뛰어나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톤, 정확한 발음…, 천생 배우다.
출연작
아찌아빠 1995, 신승수 감독, 서울관객 7만 -스크린 데뷔작. 심은하는 유학생 출신의 자유분방한 19세 여성으로 나와 최민수의 상대역을 맡았으나 아직 연기보다는 미모가 앞섰다.
본투킬 1996, 장현수 감독, 서울관객 14만 -고독한 킬러 정우성의 인형 같은 상대역. 애당초 연기보다는 비장미와 활극에 치중한 영화라, 심은하의 연기는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허진호 감독, 서울 관객 40만 -한국 멜로드라마의 새 경지를 펼쳐보인 역작. 심은하는 초반의 우려를 씻어내고 일상의 나른함과 불안함을 섬세하게 그려 찬사를 받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1998, 이정향 감독, 서울관객 40만 -비로소 심은하를 위한 그리고 심은하에 의한 영화. 그녀가 연기한 춘희를 어떤 평자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캐릭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