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99 여배우 트로이카 [4] - 고소영
1999-02-08
글 : 박은영
청춘의 빛, 젊음의 교과서

영화 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고소영을 ‘여신처럼’ 숭배한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 할지라도 기꺼이 순정을 바치고(<구미호>), 어두운 청춘을 밝히는 유일한 빛으로 삼기도(<비트>)한다. 그러나 고소영은 평범하고 순진한 남자들의 맘을 송두리째 채가고 그렇게 그들의 인생을 뒤흔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랑에 목매지 않는다는 듯 아주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일 때가 많다. 그가 평범한 남자와 맺어지는 설정은 그래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라는 토를 달고서야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벽화 속에서 걸어나와, 살아 숨쉬며 현실의 사랑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 TV드라마 <추억>과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으로 ‘배우’임을 입증한 뒤, 고소영은 <연풍연가>에서 다시 제주도 토박이 관광가이드로 거듭났다. 사랑에 설레고 망설이는, 소탈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으로의 변신은 배우 고소영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난 내숭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 커다랗게 치켜뜬 눈, 좋고 싫음이 그대로 리트머스 종이에 묻어날 것 같은 목소리, 탁월하고 세련된 패션감각. 고소영의 등장은 그 자체로 센세이션이었다. 참하고 다소곳한 배우들의 연승 행진에, 고소영이 ‘과감히’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출세작 <엄마의 바다>를 통해 고소영은 “통통 튄다”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게 됐다. 감정과 욕구에 솔직하고, 자기 개발과 치장에 열심인 젊은 세대에, 고소영은 교과서도 되고 참고서도 됐다. 데뷔 6년째로 접어들지만 고소영은 아직도 10대와 20대가 ‘닮고 싶어하는’ 아이돌 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꾸미지 않으면 저 직무유기하는 거예요.” 그 덕에 고소영은 그제나 이제나 광고주를 가장 달뜨게 하는 CF모델이다.

하지만 스타성과 작품운이 늘 함께 가는 것은 아니어서, 초창기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고소영은 고백한다. 아무런 정보나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작품을 결정하고, 사람만 보고 의리상 출연하기로 했다가, “달력에 촬영일수를 지워나가면서 작품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정도”로 괴로워한 기억도 있다. 특채로 탤런트가 되고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바람에, 대인 관계에 어려움도 많았다. “저보고 여우 같다고들 하시는데, 곰처럼 살았어요.” “몇년 전에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땐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부수적인 거라고 믿었는데, 지나고 보니 너무 좁은 생각이었더라구요.” 애당초 고소영에겐 서른 되고 마흔 돼서까지 연기자로 남아 “누구의 엄마 역할을 맡을” 생각이 없었다. 드라마 <추억>을 찍으면서, 같이 하는 작업의 재미, 그리고 연기의 맛을 알아가던 차에, “은퇴하지 말고 계속 남아서 괜찮은 30대, 40대 배우로 성숙했으면 좋겠다”던 이창순 PD의 따뜻한 진심을 읽었다.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늙어가기로, 그때 그렇게 맘을 고쳐먹었다.

<추억> 이후 달라진 자신을 실감한다는 고소영은 <해가 서쪽…>과 <연풍연가>를 쉬지 않고 연달아 찍었지만 지치지 않았으며 과정을 즐겼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여배우가 영화의 꽃이라면서요. 배우에 대한 배려가 많아 힘이 돼요. 모든 스탭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안 할 수 없죠.” 철 모를 때 찍은 <구미호>는 러브신이 많아 부담스러웠던 기억뿐이지만, <비트>에서는 입에 맞게 대사를 직접 고치기도 하고 함께 상의도 할 수 있어 신선했던 작업.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하는 커다란 스크린 앞에선 자꾸 주눅드는 게, 이제야 영화 무서운 줄 알겠단다. 작품을 고르는 것도 임하는 것도 그래서 자꾸 신중해진다.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흥행성이 있는지도 따지지만, 결정적으로 ‘동물적인 느낌’을 가장 신뢰한다. 고소영은 촬영 현장에서 잘 노는 걸로 유명한데, 대본을 언제 외는지가 스탭들 사이에선 미스터리다. “머리 좋고 순발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그를 겪어본 감독들의 이야기. 특히 가장 최근에 함께 작업한 <연풍연가>의 박대영 감독은 “고소영다움이 더 잘 발휘되면 배역을 고소영식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평한다.

멕 라이언이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던 <커리지 언더 파이어>와 데미 무어가 전혀 청순하지 않았던 <폭로>를 관객이 외면했듯, 고소영이 발랄하게 튀지 않으면 관객은 뜨악해 할지 모른다. 스타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은 배우에겐 그렇게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고소영은 예의 그 자신감을 보이며 “그래서 나한테만 들어올 수 있는 작품도 있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반면, 흔한 배역이지만 늘 그를 건너뛰는 비련의 여주인공도 언젠가는 꼭 시도해볼 참이라고.

내가 본 고소영

심재명 :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아직 전업 배우라기는 어렵지만 매력을 느껴가고 있는 것 같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도 같지만, 그의 장점이 영화에 잘 접목되면 가능성이 큰 배우다.

김성수: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도 말을 빨리 알아듣고 순발력 있게 대처한다. 청순가련한 고전적 이미지는 아니지만, 자기 주장 강한 요즘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데 잘 어울리는 배우다.

출연작

<구미호> 감독 박헌수 출연 고소영, 정우성/ 1994년/ 17만5천명 -고소영이 스타덤에 오른 직후 출연한 영화.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구미호를 맡아, 아직 신인이던 정우성과 짝을 이뤘다. 어찌 됐든 인상적인 영화 데뷔.

<비트> 감독 김성수 출연 정우성, 고소영, 임창정/ 1997년/ 35만명 -민과 로미로 가장 어울릴 배우를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라, 정우성과 고소영이 다시 만났다. 정우성이 <구미호>의 빚을 갚겠다며 고소영에게 함께 출연하자고 설득했다는 후문. 고소영은 주류의 삶을 좇다가 낙오하는 로미의 이미지를 잘 살려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감독 이은 출연 고소영, 임창정/1998년/ 20만명 -이번엔 다시 <비트>의 임창정과 만났다. 대학 시절 사랑을 느낀 두사람이 톱탤런트와 야구심판으로 다시 만나기까지.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은 탤런트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연풍연가> 감독 박대영 출연 장동건, 고소영/ 1999년/ 2월13일 개봉 -제주도 토박이 관광가이드로 출연, 종전의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웠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까지의 설렘과 망설임을 담았다. 연기 아닌 듯 있는 가장 편했다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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