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가 만난 사람]
카덴차의 고수 <올드 미스 다이어리>, <서동요>의 임현식
2005-11-04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관목을 닮은 우리들의 아저씨

배우 임현식은 경기도 송추에 산다. 한때 젖소도 길렀던 터에서 지금은 개 여남은 마리와 훤칠한 나무들을 키우며 산다. 아니, 주인의 표현에 따르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니 어찌할 수 없이 자라는 것이다. “어젯밤에 말이지, 서리가 내렸어요.” 생면부지의 기자를 대문 밖에 마중 나온 임현식은 자신이나 객의 안부 대신 첫 서리 소식을 인사말로 건넸다. 서리 내린 것이 대견한 듯 서글픈 듯 말투가 오묘하다. 가느다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길가의 고춧잎들이 찬 기운에 풀이 죽어 수긋하다.

연기생활 35년째인 임현식은 아버지보다 아저씨나 양아버지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닌 배우다. 요즘 출연 중인 <서동요>에서도 임현식이 분하는 기와장인 맥도수는 주인공 장이(조현재)가 사랑하는 장남의 죽음을 초래했음에도, 이 고독한 고아로부터 정을 거두지 못한다. 하긴 <올인>과 <대장금>에서도 임현식은 일종의 의붓아버지였다. 장이에게 친부 위덕왕이 유명무실한 허깨비고 목라수 박사가 이상적 자아라면, 긴 여정에 오른 장이의 일상을 참견하는 어미닭 같은 양부/아저씨 역이 맥도수의 몫이 될 법하다. 아버지는 독한 애증의 대상이지만, 아저씨는 시시콜콜한 잔정의 대상이다. 때로는 친구도 될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도 임현식은 늘상 움직이며 낙을 찾아 두리번대는 역동적인 사람이었다. 살기 위해 늘 노동하지만 성취욕보다 인생을 즐길 궁리를 하는 남자였고, 위엄을 세우는 대신 젊은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하는 어른이었다.

오후가 돼 가을볕이 마당에 괴자, 그가 기르는 골든 리트리버 ‘장금이’가 얼마 전 낳은 아홉 마리의 강아지들이 일제히 깨어 칭얼거린다. 그 보드라운 꿈틀거림은 이 뜰에서 30년간 연주된 생(生)의 음악에 대면 짤막한 소절에 불과하다. 스물아홉의 초년병 탤런트 시절 임현식은 어머니와 이 집의 울타리를 세웠고 아내를 맞았으며 맏딸을 얻고 이듬해 쌍둥이 딸을 낳았다. 그리고 4년 전 이 집에서 어머니와 사별했고 지난해 아내를 앞세웠다. 슬픔이 가슴속에 쑥 들어올까봐 임현식은 일부러 쿵쾅대며 바쁘게 일해왔다. 이따금 먼산을 내다보면서. “씨,네,리”라고 명함을 읽어, 긴장한 기자의 웃음보부터 터뜨린 임현식은 인터뷰 중에도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연신 서성이고 책장을 뒤지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타닥타닥 땔나무가 보채는 뜨거운 난로 곁에서 마시는 커피는 적당히 달고 미지근했다.

-(인터뷰가 이루어진 서재 한켠은 클래식 LP와 CD, 오래된 각종 오디오 기기들로 빽빽했다.) 방금 선생님 전화벨 소리가 무슨 서곡이었죠?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직접 악기도 다루시죠?

=벨소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지. 우리 어머니가 음악교사였는데, 성악을 하고 싶어 애를 많이 쓴 분이라 같이 살면서 내가 좀 배웠어. 바이올린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사람 되게 만들려고 가르치셨지.

-“사람 되게 만들려고”라니요?

=음 뭐, 놀러만 다니고 그랬으니까, 정서적으로 안정을 갖는 소년이 되도록 그러셨는지… (불쑥 일어서서 난로에 나무를 넣는다.) 아이구, 이제 뜨끈하네. 당시에는 바이올린 선생님도 없어서 광주에 현악연주회하는 의사 모임의 회원이던 소아과 의사한테 레슨을 받았어요. 나는 열심히 안 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웃음) 예전에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있는 곡을 연주해 써먹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손을 안 대게 되었지. 최근에 좀 가다듬어보려고 악기도 손봐두었는데 또 가만히 있네. 올 겨울엔 좀 해야지.

-그처럼 음악을 먼저 접하셨는데 왜 연극영화과를 지망하셨어요?

=인간이란 누구나 유희본능이 있어서 춤도 추고 싶고 노래도 하고 싶은데 누가 탁월하게 끼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나오겠지? 나도 그런 축이어서 극장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고, 음악과 더불어 살고, 뭐든 소년답지 않게 해내니까 친구들이 칭찬을 많이 해줬어요. 당시 마리오 란자 같은 훌륭한 성악가들이 만든 뮤지컬 영화에도 심취하면서 음악하면 저렇게 화려한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나중에 고3쯤 되니 아무래도 마리오 란자처럼 되긴 힘들 것 같았고 우리나라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어.

-그래서 연극영화과를 택하셨군요. 뮤지컬 같은 장르를 염두에 두셨나봐요?

=그렇지. 종합예술 쪽으로 생각을 한 거지. 장래성이 있는지 검토해보고 뜻대로 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서는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

-이 집에서 1974년부터 사신 걸로 압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겠습니다.

=추억? 글쎄, 추억인지 뭔지. 우리 어머니가 나 하나 잘 키워보려 했는데 내가 이런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고생 많이 하셨지. (갑자기 일어나 책장을 뒤진다. 한참 만에 찾은 낡고 정갈한 스크랩북에는, 맏딸과 부인을 옆에 세우고 쌍둥이 딸을 양팔에 안은 농부 차림의 젊은 그가 실린 기사가 있었다.) 예전에는 우리 어머니가 이런 것들 다 모아두고 그랬는데.

-그보다 5년 전인 1969년에 MBC 공채1기 탤런트로 TV연기를 시작하셨지요?

=방송국 들어간 지 8년 만인 1978년도에 내가 조연상을 탔어요. 요즘으로 치면 연말 연기대상 같은 거지. 그때까지 상은 김무생 선생 같은 선배들만 줬는데, 1기생 중에 내가 처음 상을 탔지.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어. 그때부터 출연료랍시고 어머니께 얼마라도 드릴 수 있었어.

악역을 꼭 한번 하고 싶다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이병훈 감독님의 세 작품에 나오는 선생님의 캐릭터, 그러니까 <허준>의 약방종사 오근과 <대장금>의 대령숙수 덕구 그리고 한창 방영 중인 <서동요>의 장인 맥도수가 극적인 기능이나 성격면에서 유사한 인물로 비치는데요, 연기하시는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내가 <서동요>에서 역할을 잘못 맡은 거 같아. 원래는 주인공을 죽이려고 괴롭히는 악역을 꼭 한번 하고 싶다고 했어. 악하다고 눈 부라리는 악역 말고 악역다운 악역을 무척 하고 싶었는데 또 엇비슷해졌지.

-그와 관련해 <대장금>, <서동요>의 김영현 작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빠 보이지 않고 휴머니즘이 저절로 바닥에 깔리니까 작가가 마음 푹 놓고 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연기자인 반면, 진짜 인간의 사악한 속성을 내포한 캐릭터를 의도한다면 선택을 주저할 수 있는 배우라구요.

=그래서 작가들이 소홀해질 가능성도 있죠. 드라마는 영화가 아니니까 조연공은 조연공 나름대로 (그는 ‘조연공’이라는 단어를 썼다.) 뭔가 돼야 해요. (난로에 나무를 넣으며) 54회를 하는 동안 조연은 조연대로 뭐가 보여야 되거든. 뭐가 보여야 하냐면, (계속 땔감을 넣으며) 잘돼야 된다는 거지. 아니 잘돼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에구… 일단 나무 넣고 얘기합시다. 헷갈려서 원. 그러니까 요즘 드라마가 사극 빼면 홈드라마들인데, 소위 실버들의 삶에 대한 희망이나 재미, 확실한 내용을 주는 연속극이 없어요. 주인공 부모나 비슷한 역을 맡으면 “어, 너 이제 들어오냐? 힘들지? 그래, 올라가서 자라.” 이거 하나로 한 회가 끝날 때도 있어. 그렇다고 아예 안 쓰면 출연료가 안 나오니, 무조건 쓰긴 하는데 내용은 그렇게 졸속해지는 거지. 그나마 시도하는 경우도 시도에 그치고 채널 돌아가게 만드는 재미없는 내용이기가 쉬워요.

-뭔가 보여야 한다고 하시니 말씀입니다만, 영화 <튜브>에서 선생님의 연기에는 일선에서 발로 뛰며 살아온 형사의 체념과 긍지가 동시에 보였고, 드라마 <사랑찬가>,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는 떠나가는 자식들을 보며 스스로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아버지의 페이소스가 보였습니다. 홀아버지 최부록 부장이 애인이 생긴 딸 미자에게 비오는 날 우산을 갖다줄까 말까 망설이며 비내리는 창 밖을 보는 얼굴은 대사 없이도 많이 슬펐습니다. 요컨대 웬만하면 웃으시니까 그저 웃음만 거두셔도 보는 사람 마음이 쓰라려오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저 사람이 웃음으로 못 삭일 정도의 슬픔은 얼마나 클까 싶은 거죠.

=허허허. 딸과의 그런 연기는 누구나 자식 키우는 어른이라면 충분히 맛을 느끼며 할 수 있지. 진솔해질수록 까닭없이 슬퍼지더라구. 애비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구나 싶고, 우리 어머니한테 소홀히 지낸 젊은 시절이 후회스럽고. 우리 딸들도 분명 제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다 못 전하지. 때가 돼야 아는 거야. 우리 어머니가 너도 자식 낳고 살아보라고 얘기했는데, 그때 난 “자식 낳고 살아도 어머니처럼 안 그래” 했다고. 인생은 끝까지 느끼면서 사는 거야. 절대 달관이란 게 있을 수 없어. 인간이 인간을 충고할 수가 없는 것이, 아무리 말해봐야 전달은 200분의 1도 안 돼. 영화에 공감해 관객이 울 수는 있지만 다음날은 또 씻은 듯 그 감정이 없어져 버리지 않아? 다시 말하면 예술가가 지닌 감정의 200분의 1만 전해져도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감동할 수 있다는 얘기지.

-임현식 선생님을 흔히 웃음을 많이 주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히려 쉽게 우리를 울릴 수 있는 배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셔도 금방 슬퍼지니까요.

=작가들도 내게 그런 페이소스가 엿보인대. 그런데 나 역시 한 장면에다가도 뭔가를 집어넣으려고 해. 옛날에는 뭘 해볼까 얘기를 꺼내면 “자식아, 써 있는 거나 잘해” 하고 구박 들었지만, 요즘에는 한 장면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

-소위 애드리브, 그러니까 선생님이 ‘카덴차’(독주자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즉흥연주)라고 즐겨 부르시는 즉흥연기에서도 그런 의지를 느껴요. 지나가는 장면 하나에서도 나름대로 기승전결을 갖고 뭔가 따먹고 넘어가려는 긴장이랄까.

=작품에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 허투루 넘어가면 조연이니 가뜩이나 별 볼일 없는 장면이 정말 보잘것없이 흘러가 버려요. 그래서 결말도 없는 장면에서 괜히 나 혼자만의 엔딩을 가져보기도 하지. 그러면 혹시 보는 사람들이 뭔가 긴장하지 않을까 해서. 백만원짜리 연기자가 이백만원짜리 연기를 해야지, 대본에 “껄껄 웃으며 대사한다”고 적혀 있다고 그냥 웃으며 대사하고 20만, 30만원짜리 연기처럼 해버리면 왜 그 배우를 쓰겠어? 나를 캐스팅한 제 값을 하려는 의도가 40%, 연기를 하면서 의식과 내용을 갖겠다는 의지가 60%쯤 돼지.

실은 조연이 멋져야 하거든

-모든 배우들에게는 둥지 같은 장르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TV겠지요. 제가 만난 어떤 영화배우는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연기를 하는 것이 생경해 연극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어떤 연극배우는 흐름이 끊어지고 연기를 하며 개선되는 재미가 없어서 영화나 TV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TV는 일정에 쫓기고 영화보다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는데요. TV 연기의 매력과 편안함이 어디 있다고 보시나요?

=뭐니뭐니해도 텔레비전의 맛은 한 장면을 그냥 샤프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 카메라 세 대, 어떨 때는 네 대까지 써서 한 장면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스탭과 연기자들의 내용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야말로 우리가 어떤 희열을 느끼지.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TV 메커니즘에 적응하는 것이 쉽진 않으셨을 것 같아요. 그맘때는 녹화 시스템도 지금보다 훨씬 실수를 용납지 않았을 것이구요.

=그랬지. 그래서 우리 세대는 대사를 못 왼다거나 하는 법이 없어요. 요즘엔 기술이 발달해서 NG를 밥 먹듯이 하니, 연기가 갈수록 쉬워지는 거지. 대신 물량이 많아졌어요. 옛날에는 찍을 만큼 찍고 못하면 이튿날도 찍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여유가 없거든. 그리고 또 신이 많아졌어요. 템포가 빨라진 거지. 과거에 한 시간짜리 드라마가 약 120페이지였다면 지금은 150페이지쯤 돼요. 대사도 “에에, 저어, 그런데 으음” 이런 게 없어. 동작도 빨라 보이는 스타일이고 절대 늘어지면 안 돼. 자꾸 NG 내면 서로 맛이 떨어져. 내가 하는 연기는 세번 이상 다시 찍자 그러면 못 하겠더라고.

-그런 면에서는 영화가 가장 힘들겠습니다.

=영화는 불러 앉혀놓고 마냥 시간을 보내. 뭐, 원래 그런 줄 알고 사실 놀러가는 거야. (좌중 웃음) 기다리다가 한컷 찍겠다고 부르고 불러서는 또 한 20분 앉혀놔. 우리는 그저 카메라 서너대씩 두고 쫙쫙 찍어줬음 좋겠어. 영화만의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맛이 있지만 그건 역시 감독이나 주인공만의 희열이고, 우리나라에서 조연이라는 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지, 확실한 멋과 맛을 잘 못 싣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실은 조연이 멋져야 하거든. 서부 활극을 봐도 물론 주인공 총잡이가 다 잘하지만 주변에 넘나드는 조연의 이유 있는 등장, 멋진 죽음 혹은 퇴장, 그리고 그들의 확실한 내용이 중요하지.

-<당신>으로 이름을 알린 1978년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선생님을 뚜렷이 기억하는 첫 작품은 1984년의 <암행어사>거든요. 두 작품 사이의 6년은 어떤 시기였나요?

=그전에는 남들 하는 말 듣기만 하고 “예 잘해보겠습니다”가 전부였는데 70년대 후반부터는 내 이야기도 하고 들어주는 이도 생겼어. 일 끝나면 감독들과 포장집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뒷얘기도 하고 다음주 일도 상의하고. 웬만한 배우들은 끝나자마자 보따리 싸서 언제 없어졌나 모르게 사라져버리는데 말이지. 그맘때는 그러다 작가도 곧잘 불러내곤 했어요. 김운경 작가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냥 정리해가서 촬영해요. 굳이 이래저래 얘기해봤자 젊은 작가들 머리에는 전부 청춘남녀만 있어가지고. (웃음)

-그리고 1986년부터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해서 6년이 넘게 순돌이 아빠로 사셨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순돌이네 집이 이사를 나간 것으로 처리돼 빠졌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한 지붕 세 가족>을 6년7개월 했어요. 그만둘 때 내가 MBC 월간지에다 글도 썼지. ‘내키지 않은 보따리를 싸고’라는 제목으로. 허허. 그때가 SBS가 생기면서 좀 격동기였어. 탤런트들도 이동이 많았는데 MBC, 특히 <한 지붕 세 가족>은 연기자를 안 놓아주는 거라. 예를 들어 저쪽에서 출연료의 배를 주겠다고 섭외를 하는데 여기는 그저 30%만 올려주는 식이었던 거야. 박원숙이 고통을 많이 받았지. 출연료는 배우 값어치와 연결되니 동서를 막론하고 돈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고 나이 먹으면 더구나 배우가 의리 따져 연기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난 지금껏 평생 동안 “봐달라”, “도와주시오” 하는 소리만 들었어요. 예전에는 돈 얘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빨리 끝내버리지. 내가 그리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우리가 무슨 얘기하다 이렇게 됐나?

-<한 지붕 세 가족>을 떠나던 소감을 말씀하시다가 그만….

=음, 연기자 입장에서는 <한지붕 세 가족>을 끝까지 하고 싶었고 방송국에서 강력히 잡을 줄 알았는데, 알아서 하라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정말 보따리를 쌌어. 그랬더니 나중에 잡으려고 난리가 난 거야. 당장 스페인인가 어딘가로 도망갔지. 여행이 아니라 도망.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더라구. ‘빵꾸’를 내니까 그제야 찾은 걸 보니, 그동안은 다 회유였고 떠본 것이잖아? 연락 끊고 박원숙과 내가 단단히 약속하고 떠버렸어. (애석하게 조용히) 중간에서 순돌이만 안됐지.

배우는 독서를 제일 많이 해야 해

-배우 임현식하면 즉흥연기부터 떠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같은 방식을 오래 유지하신 것은 역으로 즉흥연기를 할 때 넘어서지 않는 미묘한 선에 대해서 본인의 마음속에 확실한 기준도 있다는 뜻 같습니다. 또한 같은 즉흥연기 안에도 몇 가지 유형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금이로세” 하는 식으로 어미를 살짝 바꾸기도 하고, 되받아치는 리듬이나 리액션의 박자를 살짝 뒤틀어주기도 하고 아예 대사 자체를 만들어넣으실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내겐 대체로 재미있는 연기를 기대해서 캐스팅을 해요. 예전에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을 할 때 SBS에서 제의받은 뜻도 그런 것이었지. 지금도 그 테이프를 보면 내가 참 잘했다는 느낌이 들어. 허허. 아주 활발하게 했더라구. 일반적으로 교수들은 애드리브를 “짧고 간결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뭔가 하나 던져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더라구. 그런데 옛날 우리 때 애드리브란 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었어. 간이란 뭐냐면 포즈(pause)지.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딱 맞게 나와줘야 되는데 몇 초 늦게 등장해서 “그런데 자네 괜찮은가?” 하고 돌아볼 때 없는 거라. 그런 간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호흡일 수 있었지.

-나올 연기자가 제때 등장을 안 하는 경우가 그렇게 잦았나요?

=그럼,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 기계도 아니고 말이지. 그 사이를 메꾸기 위해 말을 늘이기도 하고 방금 한 대사를 간추려 던지기도 하고 몇 가지 기법이 있어. 옛날엔 솔직히 엉망이었지. 예를 들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면 왕도 있고 옆에 신하 폴로니어스, 누구누구 있단 말야. 정말 그 이름자 외기도 힘들거든. 그럼 누가 폴로니어스한테 대사를 해야 하는데 딴 사람한테 가서 대사를 하는 거야. 그러면 어떡하겠어? 진짜 폴로니어스가 “여보게, 나 여기 있소.” 이러는 거지. 그러면 그제야 슬그머니 그쪽으로 가서 다시 “그렇지 않은가?” 애드리브를 하는 거야. (폭소)

-하지만 선생님은 즉흥연기를 임기응변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식으로 구사하지 않습니까?

=재미를 기대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바람 같은 인간을 만들어놓는 것이 내겐 힘들어요. 그렇다고 나까지 쉽게 가면 안 되니까 계산도 많이 하고 내 개성에 맞는 말도 고심을 하지. 그래서 배우는 독서를 제일 많이 해야 해. 그래서 뒷골에 잠재된 내용을 끌어내야 해. 저기 두꺼운 명언집 보이죠? (양주동 박사 편 <세계명언대사전>) 저게 내 평생의 필독서야. 소설 경우는 <쿼바디스>라든가 <레 미제라블>같은 스펙터클한 것을 잘 읽어요. 그런 작품의 완역판을 읽으면 정말 많은 것이 저장돼. 자베르, 코제트 아버지, 장발장, 모든 인물의 입장이 돼서 연기하는 스타일로 읽지. 내가 4년째 호남대학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거기서도 독서를 강조해요. 연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너희들 눈 안에 들어오는 현실만으로는 이거 어느 세월에 배우될지 모른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강의하는 거야. 시골길 꽃을 보는 감흥 하나도 본인의 감성적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으흠, 이젠 코스모스도 빛을 잃었겠네.

-그런 많은 느낌에 비해서 연기하면서 표현하실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끼시겠어요.

=그렇지! 나름대로 해보고 싶은 내용들이 참 많은데. <서동요>에서 우리가 1400년 전 백제를 연기하잖아요? 나는 말을 좀 달리 해보고 싶었어. 세종대왕이 만든 언문이 500년 전 것이라면 그 이전 사람들은 뜻글자 한문만 갖고 어떻게 언어를 구사했을까?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를 좀 넣어 백제말을 상상해본다거나, 신라 출신 인물은 억양이 좀 달라서 첩자인 사택기루가 신라인 만날 때와 백제 사람 대할 때 말투가 다르면 그게 또 재밌잖아.

-선생님도 시대극과 현대극에서 연기가 미세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극이 연극적인 면이 강한데 “어, 내가 왜 힘을 주지?” 싶으면 빼야지. 매알매알하게 연기하고 싶어.

-“매알매알”이 무슨 뜻인가요?

=응? 사부작사부작이라는 뜻이지. 악역을 맡아도 눈 부라리고 이 드러내고 그러지 않고 그야말로 사부작거리면서 못된 놈, 명작에서 보는 인간상을 그려보려고 하는데 악역은 절대 안 줘.

-생각보다 시트콤 출연작은 많지 않으십니다. 시트콤 제안에는 더 신중히 응하시나요? 게다가 최근작 시트콤인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는 오히려 선생님 개인으로 보면 어떤 작품보다 정극에 가까운, 정적이고 잔잔한 연기를 보여주셔서 흥미로웠습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처음에는 시트콤에 맞는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고독이 담기는 바람에 내 부분은 시트콤이 아니게 됐어요. 그런 역할은 거의 처음 해보았지. 그만한 드라마도 없다고 생각해요. 김석윤 감독이 참 잘 배운 감독이예요.

-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아빠로 7년, <암행어사>의 갑봉으로 4년 반을 사셨습니다. <전원일기>에도 2년간 출연하셨지요. 요즘들어 시청자와 함께 늙는 아주 긴 호흡의 드라마가 희귀해지고 미니시리즈가 많아지는 추세에 대해 아쉬움은 없으십니까?

=난 특별 기획드라마에는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일일연속극이나 주말연속극은 어쨌든 홈드라마로 가야 하거든. 그런데 내가 겪은 드라마들을 보면, 사람만 바뀌는 식이지 별반 다르지 않아. 사위 들어온다고 한번 떠들썩하고 어쨌다고 야단하고 맨 그거지. 그리고 드라마는 1년 전에 제작을 하는 것이 맞아요. 올여름 <NHK>에서 제의를 받았는데 내년 9월 방영될 드라마를 벌써 준비를 하는 거야. 아침 일일연속극인데 그 감독이 내가 나온 <슬픈 연가>를 보고 신부 역을 제안하더군.

그리움과 고독도 아름다워요

-중년을 넘은 연기자들이 사업을 시작하는 모습도 흔히 봅니다. 선생님은 나무를 키우는 일 외에 다른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으신가요?

=나무야 그냥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라는 거지. 난 항시 연기생활을 바쁘게 해온 사람이에요. 나만큼 또 캐스팅이 잘 되는 사람이 없잖아요? (눈웃음) 그러다보니 35년째 이러고 살았는데-물론 연기도 내 생활이지만-이제 와선 참 지루하기도 해. 내 연기가 좋다 나쁘다 정리해주던 어머니가 4년 전 돌아가시고는 더욱 충격이 컸고. 또 작년에는 마누라가 아파서 죽었지. 그러다보니 내가 가정에 소홀했던 것 같아 후회가 많이 남아요. 그저 출연하고 연기하고, 그러면서 출연료도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만 신경 쓰고 살았단 말야.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빨리 사라져버리니까…. 그런 후회와 우울함에서 벗어나려고 올해 굉장히 많이 일했어요. 그냥 막 하자는 대로 하고 밖에 자꾸 나가서 생활하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떨치고 남은 세월을 인간적으로 살고픈 느낌이 꽉 차 있지. 올 겨울에는 정말 몇 십년 만에 3, 4개월이라도 손을 놓고 싶었어요. 친구도 만나고 적조했던 사촌형제도 만나고 고향도 가보고 싶었어. <서동요>도 작년부터 약속하지 않았다면 안 했을 거야.

-선생님은 카메라 앞에서 무방비해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일지 자신을 전혀 방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얼굴뿐 아니라 의상도 그렇습니다. 현대극 경우는 의상은 어떻게 고르시는지요?

=난 의상을 버리지 않아요. 지금 입고 있는 이런 옷도 입는 사람 드물 거야. 대신 내가 70년대, 80년대 배경 드라마를 한다면, 이 옷을 입고 연기할 수 있지. 이리 와봐.(<수사반장>에 나올 법한 해묵은 옷가지가 가득한 방으로 안내한다.)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입었던 점퍼도 여기 있잖아.

-선생님한테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낙천성이 바닥으로부터 배어나옵니다. 그러나 나이 들고 가족과 사별하는 일도 겪으면서, 별안간 인생을 습격해서 흔들어놓는 재난이나 질병 같은 위협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셨을 것 같은데요.

=나처럼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이 세상에 없었어요. 어머니가 좋은 분위기에서 키우고 만들어주신 거지. 그런데 일하러 가는 나를 아침에 손 흔들며 배웅까지 해주셨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정말 아주, 미치겠더구만. 그래도 우울에지면 안 된다 싶어 <맹가네 전성시대> 같은 드라마에서 막 코믹 연기를 하고 그랬어. “야, 이런 상황에서 연기가 되네.” 스스로 놀랐지. 그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살았는데 또 2년 만에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니 내가 완전히 뒤집어지더라구. 아내로 인해 그런 충격을 받을지는 짐작도 못했어. 하지만 약속한 일은 해야지 어떡해. 그렇게 투병하다가 마누라가 10개월 만에 죽어버렸어. 도대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또 드라마들을 닥치는 대로 했지. 바쁘게 일주일을 뛰어다니니까 역시 좀… 낫더만.

-바쁜 생활로 슬픔을 잊으신 것 외에 선생님이 살아가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는지요?

=성격이나 생활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마누라 생각나서 술도 먹었지만 그걸로 해결하면 안 되지. 담배도 4개월 안 피다가 지금 다시 피우는데, 또 날잡아 끊으려 해요. 내 연기는 스트레스가 있으면 큰 손실이 와.

-그렇다면 현재 선생님께 제일 큰 두려움은 무엇이고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입니까?

=(인생의) 좋은 멤버들과 헤어진 일이 우울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요. 언제 내가 정말 고독해봤는가. 진정으로 슬픈 적이 있었나. 때리면 아파서 울고, 돈 빌려주고 못 받아서 애석한 적은 있어도 진정한 아픔과 그리움을 겪어봤던가. 그러니 이것을 슬퍼 말자. 이것도 삶의 과정이고 자연적인 섭리다. 우리 아내는 한참 좋을 때 나랑 헤어졌지만, 결혼식 때 말한 “죽음이 갈라놓은 때”가 빨랐을 뿐이다. 뭐, 그 정도로 다독이지. 그리움과 고독에서 오는 감정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움에 겨워 먼산을 본다거나 비오는데 집 앞 철길을 혼자 걷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가장 큰 즐거움과 큰 괴로움이 한데 있는 것인가요?

=아냐. 난 괴로움이라고는 표현 안 했어요. 그리움이라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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