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을 보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디서 매주 저런 사람들을 찾아낼까?’ 국정원과 FBI의 도움이라도 받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자료조사원이 1천명쯤 되는 것인가 하는 망상을 휴먼다큐 <인간극장>은 품도록 만든다. <인간극장>의 외주제작사 리스프로와 제3비전의 기획과정을 듣노라면 이 사람들에게 이산가족 찾기를 시키면 절묘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매번 격렬한 감정의 순간을 포착할까’ 하는 것이다. 그 비밀은 오로지 “인간적인 밀착마크”다. <인간극장>을 세상에 낳은 사람들과 5년 반 동안 매주 그들이 우리와 숨쉬도록 만든 장본인들에게 듣는 <인간극장>의 리얼 제작스토리.
<인간극장>의 탄생
<인간극장>이 움트기 시작한 것은 1999년 겨울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날, 경기도 안성에 소재한 동아방송대학 기숙사에 세 사람이 모였다. 2000년 5월1일 처음으로 방영된 <인간극장>의 첫 에피소드 <어느 특별한 휴가>를 연출한 강동석 PD, 리스비전 이동석 대표, 그리고 리스비전 박은희 본부장이 그들이다. 박 본부장은 초기에 <하늘이 준 다섯아들> <4인의 차력사> 등을 직접 집필한 작가였다. “당시 상대적으로 외주제작사가 접근하기 용이한 장르가 휴먼다큐였다. 하지만 고답적인 방식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라고 박 본부장은 기획 배경을 밝혔다. <인간극장>은 처음에는 3부작으로 준비됐다. 1시간이라는 제한된 분량에서 보여줄 수 없는 “현재성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연작 개념을 도입”했다. 그 과정에서 KBS가 “5부작으로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것이 현재 5부작 형태의 <인간극장>을 탄생시켰다. 처음 방영시간대는 오전 8시25분이었다. 주부를 주요 시청층으로 감안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들이 가장 바쁜 시간임을 간과한 점도 있었다. 어쨌든 오전 시간대에 첫발을 내디딘 <인간극장>은 책임CP(Chief Producer)인 KBS 김용두 PD의 설명처럼 “시청률 4%선에서 시작해서 단기간에 9%까지 올라갔다. 이후 <인간극장>은 개편이 되기 전에 시간대를 옮기는 이례적인 성과를 달성했다”고 한다.
아이템 선정 위해 하루 전화 취재만 50곳
현재 방영 중인 <분순 할매>는 <인간극장>의 285번째 작품이다. 편당 30분, 5부작을 기준으로 한 <인간극장>을 만들기 위해 평균 소요되는 기간은 두달 반이다. 리스프로 윤양석 PD는 “<인간극장>을 만드는 연출자는 1년을 다섯달로 산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영이 끝나는 동시에 3∼4주 동안 자료조사에 몰두한다. 방송, 신문, 잡지, 인터넷,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 등 루트를 가리지 않고 저인망식으로 아이템을 찾아낸다. 이때는 자료조사원이나 작가뿐만 아니라 PD, AD를 가리지 않고 전 팀원이 전화기와 자료 분석과 제보에 매달리는 시기다. 윤 PD의 전언에 따르면 “PD가 하루에 전화취재만 50군데 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현장취재도 보통 10군데를 넘기기 일쑤다. 본격적으로 조사에 임하는 “자료조사 담당과 작가의 고통은 그 10배는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인간극장>을 제작하는 리스프로와 제3비전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모든 사람들이 텔레마케터처럼 통화에 몰두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리스프로 박혜령 PD는 “예를 들어 혼자 섬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전국의 섬을 다 뒤지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아이템이 정해지면 출연자 섭외에 들어간다. 제3비전 이귀훈 PD는 “사회적으로는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점차 사생활을 공개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힘들다”고 전했다. 섭외를 마치고 출연자와 친해지는 과정이 <인간극장>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힘든 부분”이다. 윤 PD는 “눈만 뜨면 무조건 만나러 간다”고 취재가 생활임을 강조했다. 일단 출연자의 집이나 직장에 찾아가서 밥도 하고, 김장도 해주고, 농사도 돕고, 장사도 거들며,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출연자의 “가족 혹은 친구 되기”가 시작된다. 취재 당일에도 구순이 넘으신 할머니를 수발하러 나가는 한 PD를 동료 PD들이 격려하고 놀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장소가 머나먼 오지, 섬, 달동네가 되더라도 감내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귀훈 PD는 “<인간극장>에서 출연자들의 마음을 여는 특별한 기술은 없다. 그저 친구나 가족처럼 진심으로 그들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모 PD는 지체장애가 있는 형제를 취재하러 섬으로 갔다가 때아닌 봉변을 당했다. “효성이 너무 지극했던 형제들은 어머니를 촬영하러 온 제작진이 무엇을 조금만 하려고 하면 무조건 돌을 던졌다”고 한다. 모 작가의 귀띔에 따르면 허리가 좋지 않은 모 PD는 “출연자가 머슴처럼 부려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도 <인간극장>의 카메라는 돌아간다.
편집하다 호흡곤란으로 쓰러져본 적 있으신가요
이 과정이 무르익고 출연자의 마음이 정해지면 4주 정도 촬영에 돌입한다. 총 2시간30분 분량의 <인간극장> 한편을 위해 촬영 분량은 대체로 60분짜리 DV테이프로 70∼80개 선이다. 경우에 따라 100∼120개까지 촬영하는 상황도 생긴다. 당일에 촬영해서 저녁에 내보내는 엽기적인 스케줄도 있었다. 2002년 월드컵 태극전사를 다룬 <대한민국 나의 아들>은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당일 촬영, 편집, 방영을 해낸 에피소드다. 총동원된 모든 PD가 방영 직후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처럼 초죽음이 된 것은 자명하다. 촬영에는 출연자를 배려하여 만반의 준비를 기한다. 윤 PD는 “거부감을 느낄까봐 심지어 와이어리스 마이크도 사용하지 않는다. 초지향성 마이크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인간극장>의 AD들은 선배들의 현장에 따라나서기가 쉽지 않다. 출연자들은 사람이 한명만 늘어나도 금세 알아차리고 기껏 만들어놓은 감정을 숨겨버린다. 그럼 그날 촬영은 공치는 것이다. 촬영 중에도 설득과 인내는 계속된다. 만약 오랫동안 소원했던 가족이 놀이공원에 놀러가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자. PD가 집을 나서는데 비가 쏟아진다. 거기서 그대로 물러서면 <인간극장> PD가 아니다. “짜증내는 아이들, 기껏 장만한 김밥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잡아내야 한다”고 현장 PD들은 말한다.
촬영이 끝나면 “보는 사람에게는 <인간극장>이지만 만드는 사람에게는 ‘인간끝장’”인 ‘죽음의 편집’이 제작진을 기다린다. 평균 2주간의 편집은 “하루 24시간 중 평균 18시간을 꼬박 조그셔틀에 매달린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젊은 남자들도 체중이 쑥쑥 빠진다”고 이 PD는 설명했다. <인간극장> PD라면 입을 모아 손을 내젓는 과정이 바로 이 편집 기간이다. 최악의 상황은 시사를 마친 뒤 재편집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다. PD와 카메라맨이 출연자와 가족처럼 지내는 특성상 감정이입으로 인해 에피소드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는 상황이다. 다른 제작진으로 구성된 모니터들이 냉정히 판단할 따름이다. 수요일에 내부시사 뒤 재편집 명령을 받은 이 PD는 “월요일 아침에 일을 끝내고는 호흡곤란으로 쓰러져서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발견된 일”도 있었다.
<인간극장>은 인간 수양의 과정
<인간극장>을 만드는 일은 “인간적으로 수양되는 과정”이라고 현장 PD들은 입을 모은다. 이귀훈 PD의 표현처럼 “휴먼다큐를 만드는 PD들은 경력이 쌓일수록 사람들이 둥글둥글해진다”고나 할까. <인간극장> 담당 4년차이며 현장 PD를 총괄하는 윤양수 PD는 “내가 촬영에 나갈 때마다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빠 촬영갔구나’라고 눈치챌 정도로 아이가 창밖만 바라본다고 하더라”고 술회했다. 이 PD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태어난 지 1년이 된 아이를 맡기고 <인간극장>을 하다보니 아이가 엄마를 봐도 데면데면한다. 어느 날 3살이 된 아이가 자기 가슴팍에 내 손을 가져가서 얹고는 ‘아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놀란 일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인간극장>은 “그럼에도 가급적 결혼하지 않은 PD에게는 맡기지 않는 분위기”라고 이야기했다. 다큐멘터리의 만듦새에 대한 경력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고 대하는 경력을 <인간극장>은 요구한다. 그 이면에는 5년 전에 만난 출연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PD와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고 상의하는 출연자가 있다. 자연스러움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인간극장>은 방영 뒤에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로 옮아간다.
<인간극장>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거의 연출없이 진행되는 프로그램 특성상 “원하는 것을 찍으려고 조바심을 내면 사단이 나게 마련”이라고 제작진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그들은 “준비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서 먼저 내려간 PD들은 출연자랑 싸우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한민족리포트>를 담당하다가 <인간극장>으로 넘어와서 “억 소리가 절로 난다”는 황명옥 PD는 이를 ‘고통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고 설명한다. 출연자와 싸우고 올라온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기존 촬영분량을 모니터링해서 출연자가 큰 문제가 없고, PD와의 감정적인 사안이라고 판단되면 “담당 PD가 다시 촬영지로 내려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극장>이다. 5년 반을 줄곧 CP로 일한 김용두 PD는 <인간극장>의 성공요인을 “현장 PD와 작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애착에서 비롯됐다. 그 사람들은 완전히 <인간극장>에 미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주제작이 아니라 KBS의 인하우스였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극장>의 제작과정에서 PD와 양날개를 이루는 사람들은 노련한 작가와 전문 카메라맨이다. <추적60분> <PD수첩> <그것이 알고 싶다>를 두루 섭렵했고 처음부터 <인간극장>에 참여한 다큐멘터리 25년차 제3비전 이정혜 작가는 기억나는 작품을 묻자 “할 때마다 똑같이 어렵고 비명을 지를 만큼 힘들어 일일이 기억하면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한다”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인간극장>을 영화화하려면 책을 단순히 영상화하는 방식보다는 소재만 가져와서 영화적으로 변용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인간극장>의 카메라맨은 전반적인 상황을 언제나 숙지해야 한다. 돌발적인 상황이 거의 전부를 이루는 탓에 “황야의 총잡이처럼 어떤 상황이라도 카메라를 빼들 수 있어야” 하고 “감정이 극에 달할 때는 PD도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촬영을 하다보면 “어느 제작진보다 카메라맨들이 출연자와 친해진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고 한다.
진짜 제작팀은 출연자들이다
제작진과 만났을 때마다 그들이 가장 강조한 점은 단 하나였다. “<인간극장>은 출연자들이 제일 중요하고, 이 프로그램의 성공도 전부 그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인간극장>은 시청률 경쟁에서 MBC <뉴스데스크>를 가뿐히 제압하고 요일마다 바뀌는 SBS의 오락프로그램 융단폭격에도 5년 반 동안 끄떡하지 않은 12∼13%의 평균시청률을 유지하는 KBS의 효자 교양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인간극장>의 PD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연자, 그리고 그 다음이 시청자”라고 단언한다. 촬영을 앞두고 팔목을 긋고 자살을 기도했던 아버지가 촬영을 통해 좋은 아버지로 변모했다면 “시청률에서는 한 발짝 밀려나도 아쉬움은 갖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미세하게 다루는 프로그램 특성상 “그들의 인생에 사소하게라도 누를 끼치는 상황이라면 언제라도 카메라를 거둬야 한다”고 제작진은 이야기한다. 시청자들도 이러한 제작진에 화답한다. <세진이 이야기>를 보고 게시판에 자살을 포기했다고 글을 올린 시청자가 있었다. “저런 아이도 그렇게 열심히 산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인간극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사람에게 지친다. 하지만 다시 촬영에 임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도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내 삶을 반추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어느 PD의 마지막 전언은 그래서 가슴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