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원정기> <꽃피는 봄이 오면> <엄마> <말아톤> <거칠마루>, 이들의 공통점은 KBS2에서 방송되고 있는 <인간극장>을 원작으로 삼거나 영향을 받은 영화라는 점이다. 또 <맨발의 기봉씨> <친구와 하모니카> <충칭의 별 이장수> 등이 <인간극장>을 바탕 삼아 촬영 중이거나 기획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영화는 지난해 후반부터 올해 사이에 개봉됐거나 내년 중 개봉을 목표로 한다. <인간극장>은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충무로의 ‘소재 공급원’인 것이다. 한국 영화계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극장>에 매료됐는가.
<인간극장>을 소재로 만들어진 첫 영화는 지난해 추석에 개봉한 <꽃피는 봄이 오면>이다. 2001년 5월과 2002년 3월 방송된 <건빵선생님의 약속>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중학교에서 관악부를 지도하는 교사의 이야기에 픽션을 가미해 만들어졌다. <인간극장>이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휘장을 드리운 영화는 올해 초의 <말아톤>이다. 사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알려진 바와 달리 <인간극장>이 아니다. 배형진씨의 어머니 박미경씨의 인터뷰를 담은 2001년 10월25일치 <조선일보>를 본 제작사 씨네라인-투의 석명홍 대표가 박미경씨와 만나면서 영화화는 시작됐다. 이듬해 <인간극장>의 <달려라 내 아들>(2002년 8월)이 방송됐고, 그리고 얼마 뒤 정윤철 감독이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는 뒤늦게 <달려라 내 아들>을 보면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영화의 50% 정도를 다큐에 의존”하게 됐다. 어머니의 시점을 취한 다큐와 달리 영화는 초원이를 중심에 내세웠지만, 상당수 에피소드를 다큐에서 차용함으로써 <인간극장>의 진가는 다시금 확인됐다.
이후, <추씨 할머니의 백리길>(2000년 11월)을 원작으로 한 <엄마>와 <무림일기>(2001년 8월과 2002년 6월)에서 영감을 얻은 <거칠마루>가 잇따라 개봉했으며, 11월23일에는 <노총각 우즈벡 가다>(2002년 5월)를 바탕으로 한 <나의 결혼원정기>가 공개될 예정이다. 현재 제작 중인 영화도 세편이나 된다. <맨발의 기봉씨>(2003년 2월)를 원작으로 한 <맨발의 기봉이>는 촬영 중이고, <친구와 하모니카>(2001년 2월과 4월)는 같은 제목으로, <충칭의 별>(2000년 12월과 2002년 4월)은 <충칭의 별 이장수>라는 제목으로 각각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밟고 있다. 충무로에서는 이들 외에도 수면 아래 묻혀 있는 ‘인간극장 프로젝트’가 여럿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단일 TV프로그램이 영화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 프로그램에서 소재를 얻은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발표된다는 점도 이상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극장>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너는 내 운명>이나 시나리오를 쓴 김은숙 작가의 조카 이야기인 <안녕, 형아>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인간극장표 영화’라 부를 만하다. 실화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작은 일상과 개인적 삶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들 영화는 지난해 절정을 이룬 근현대사 소재의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도대체 충무로에 불고 있는 ‘인간극장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삶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2000년 5월 첫 방송을 내보낸 <인간극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게 전달해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의 소녀 이야기 <산골 소녀 영자>를 비롯해, 트랜스젠더 하리수를 세상에 알렸던 <그 여자, 하리수>, 왜소증에 걸린 형제들을 소개한 <작은 거인 4형제>, 3년 동안 어머니 무덤을 지키는 사내의 이야기 <시묘살이>, 전신화상을 입은 20대 여성을 그린 <지선아 사랑해> 등 인기있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이 프로그램은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극적으로 담아냈다. <9시 뉴스> 시간대에 방송되는데도 12∼13%대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인기있는 에피소드의 경우 20%를 넘길 수 있는 비결은 동시대적 공감대다. <인간극장>의 두 제작사 중 하나인 리스프로의 박은희 본부장은 “<인간극장>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동시대의 사회구조 안에서 각자의 ‘인간적 구조’는 같기 때문에 공감대가 넓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극장>이 영화 관계자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 또한 비슷하다. 이 다큐멘터리가 조명하는 삶은 누군가 상상해낸 것보다도 훨씬 드라마틱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면을 가졌다. <말아톤>의 제작사 씨네라인-투의 석명홍 대표는 “논픽션에서 우러나오는 드라마틱함은 우러나오는 맛이 특별할 뿐 아니라 신뢰성과 공감대도 확보해준다”고 말한다. 때문에 영화 안에 리얼리티를 담아내려는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결혼원정기>의 황병국 감독은 “감독들은 소재를 찾으려고 소설, 만화, 다른 영화를 보곤 하는데,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인간극장>도 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은 “어차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어렵다고 했을 때, 한국에는 미국처럼 장르 소설이 없어 소재가 더욱 부족하다. 그런데 한국은 현실이 액티브하지 않나.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현실이 있어 좋은 소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게다가 <인간극장>의 에피소드들은 시청자들에게 얼마간 검증을 마친 상태나 다름없어 영화인들에게는 양질의 아이디어 창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극장표 영화의 바람이 부는 이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요즘 ‘인간극장표 영화’들이 양산되는 걸까. 정치, 경제, 사회심리 등 추상적인 분석을 제외하고 가장 단순한 가설은 ‘이제 나올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인간극장>이 방송을 시작한 게 2000년이고, 특정한 에피소드를 영화의 아이템으로 채택한 뒤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캐스팅을 하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완성품이 지금쯤 나오는 건 정상으로 보인다. 영화화된 에피소드들의 방송 시점을 참고하면 이런 가설은 대충 맞아떨어진다. 그렇다고 감독과 제작자들이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있다가 <인간극장>을 보고 반짝 아이디어를 얻은 건 아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프로듀서였던 최은화 PD는 “나 스스로도 사람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했고,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도 애초에는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시골에서 오케스트라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실제로 취재해보니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인간극장>을 봤다”고 설명한다.
사실, 그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집으로…> 정도를 제외하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접받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영화 시장이 커져감에 따라 관객의 폭이 넓어졌고, 이에 따라 ‘인간극장표 영화’를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충무로의 분석이다. 석명홍 대표는 “<말아톤>이 증명했듯 현실성을 갖춘 작은 이야기가 잘 만들어질 때 오히려 폭발력이 있다”며 “이후 만들 영화 중 상당수가 실화이거나 실화 같은 영화”라고 말한다. 이같은 견해에 심재명 대표도 동의한다. “최근 한 일간지에서 ‘공감 마케팅’이 뜬다는 기사를 봤다. 1인 미디어인 블로그나 미니홈피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일파만파를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였다. 영화에서도 일상이나 개인적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공감만 이끌어낼 수 있다면 큰 진폭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도 이러한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말아톤>의 폭발적인 성공은 불을 댕겼다. <꽃피는 봄이 오면> <엄마> <거칠마루>가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나름의 미덕을 평가받았고, <너는 내 운명> <안녕, 형아> 같은 ‘유사 <인간극장> 영화’도 평범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가진 잠재적 흥행력을 입증했다.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20대 초반, 중반의 여성을 주타깃으로 삼아 이들을 유혹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지난해 1천만 시대 이후 관객의 폭이 넓어진 것 같다. 30대 이상을 포괄하는 이야기인 <너는 내 운명>이나 가족영화 성격인 <말아톤>이 흥행된 것은 그 실례”라고 말한다. 그는 나아가 한국 주류영화계의 미묘한, 그리고 긍정적인 기류변화가 감지된다고 이야기한다.
득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 리얼리티
그렇다고 <인간극장>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취한다는 사실이 흥행을 보장하거나 작품성을 책임진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실화를 허구에 기반한 영화 장르로 옮겨내는 일이 쉽지 않다. <나의 결혼원정기>의 황병국 감독은 “아무리 시나리오를 써도 다큐의 이야기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실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데만 6∼7개월이 걸렸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결국 그는 실제의 이야기에서 설정만 빌려온 채, 캐릭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것은 단지 ‘코드 전환’의 문제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로맨틱코미디 성격의 소동극은 두 친구의 우정에 기반한 잔잔한 멜로드라마로 바뀌었다.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발굴한 국제결혼의 어두운 면도 삽입됐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튜브픽쳐스 황우현 대표는 “워낙 드라마틱한 다큐를 보고선 ‘거저 먹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화를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완전한 상상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큐멘터리 <달려라 내 아들>은 인간 승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지만, 나는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생하면서 소통과 자립이라는 주제로 바꿨다.” 결국, <인간극장>의 강한 리얼리티는 잘못 접근한다면 오히려 영화다운 틀과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극장>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그야말로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영화평론가는 “현재까지 나온 영화들을 보자면, <인간극장>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보다 못한 ‘그들’을 소재로만 삼는 데 그칠 뿐, 이를 보편성을 가진 주제로 확장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소재 발굴 경쟁 속에서 자칫 한바탕 눈물만을 뽑아내고 끝나는 영화들이 양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과열된 붐을 이룰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최은화 PD는 말한다. 관객의 취향이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까다로워진 탓에 “관객은 어설프게 영화를 보느니 차라리 원작인 다큐멘터리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황우현 대표도 비슷한 견해다. “머지않아 <인간극장>이 원작이라고 밝히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관객에게 어떤 분위기에 편승한다는 느낌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휴먼드라마의 길을 열다
어쨌건, <인간극장> 소재의 영화들이 주도한 기류는 점점 번져나가고 있다. <인간극장>에서 소개된 것은 아니더라도 작은 실화를 소재로 삼는 영화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씨네라인-투는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 소개된 다큐멘터리 <나의 아버지>를 바탕으로 한 입양 청년의 이야기를 담는 <마이 파더>를 만들 계획이고, MK픽쳐스는 2004년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던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팀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 중이다. 여기에 실제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영화들과 ‘실화 같은 상상의 이야기’까지 가세할 분위기다. 최근에는 이들 영화를 뭉뚱그린 ‘휴먼드라마’라는 장르도 부상하고 있다. 심재명 MK픽쳐스 사장은 “<YMCA 야구단>을 만들 때만 해도 마케팅쪽에서 ‘휴먼드라마’라는 말을 금기시했는데, 이제는 장점으로 내세우는 시대가 됐다”고 말한다.
한국영화라는 배는 블록버스터와 역사실화물, 경찰드라마 등을 거쳐 최근 ‘인간의 바다’에 당도했다. 그러한 한국영화의 근미래상을 알고 싶다면 당분간은 TV와 인터넷을 통해 <인간극장> 속을 파헤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